용산에는 대통령이 없다. 대통령‘님’은 더더욱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고 간에 용산에는 대통령이 없다. 오직 민중만 있을 뿐이다.
나라가 또 한 바탕 추모 열기에 휩싸이는 형국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자 이후 몇 년 만에 국장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이미 전국 곳곳에 고 김대중 대통령 분향소가 속속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지난 1월 20일 이유는 그저 하나, 살아 보겠다고 용산에서 추방되면 갈 곳이 없어 한 번 더 살아 보겠다고 망루를 치고 저항하던 사람들이 무참하게 학살된 지 7달이 지나가고 있건만, 돈 없고 백 없는 철거민들의 영혼은 대통령들의 빈소에 비치된 그 수많은 국화 한 송이 향기조차 맡아본 적이 없이 지금도 구천을 떠돌고 있다.
대통령이라는 망자와 철거민이라는 망자 사이에는 죽어서도 계급적 차별이 존재하는 것인지, 누구는 국장으로 할 것이냐 국민장으로 할 것이냐, 경제 위기를 고려해 6일 장은 어떤가 의견도 분분하게 망자의 넋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건만, 용산에서 두개골이 함몰되고 둔부가 포 뜨듯이 떠지며 그을려 죽어간 망자들의 넋에 대해서는 한겨레고 경향이고 아무 말이 없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치적’ 세우기에 바쁘다.
박노자는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6.15 선언을 발표한 날 거의 직후에 롯데호텔 노동자 탄압 사태를 언급한 적이 있다. 박노자가 말한 대로 그 당시 정부와 경찰 당국은 귀한 외빈들의 잡음 공해를 줄이기 위해 자기 나라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추태를 벌였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하였다.
신경영기법이 도입된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구조조정을 통한 해고를 더 세련되게 한 것이 신경영기법 아니었던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이라니? 그 리더십은 노동자들을 잘라내는 리더십 아니었던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카리스마라니? 그 카리스마는 이 땅의 노동자 민중을 죽인 카리스마 아니던가? 박노자가 그 당시 롯데호텔 노동자 탄압을 지켜보면서 폭력주의와 사대주의가 이 나라를 계속 다스리고 있다는 서글픈 생각을 가진 것처럼, 이명박 정권에 의한 강요된 자살과 그로 인한 충격의 죽음은 이해할만한 일이라 해도,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운명은 이토록 쉽사리 버려지고 망각되고 폐기되는구나 하는 더러울 만치 서글픈 생각이 눈가로 흘러나온다.
지금 이 시대에 노동자 민중들은 말라버린 개울가의 물고기처럼 살아가고 있다. 평상시 같으면 유유자작하게 물에서 노닐던 물고기들은 가뭄이 들고 개울이 버쩍버쩍 말라버리자 개울 밑바닥을 뚫고 들어간다. 살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물을 찾기 위해 속속들이 웅덩이로 모여든다. 우리 시대의 노동자들은 경제 공황이라는 가뭄이 들자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 평택 도장 공장으로, 용산의 망루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물줄기는 끊기고 물고기들이 고스란히 냄비에 갇힌 꼴이 되듯, 공적 자금의 물줄기는 끊기고 고스란히 망루에서 죽임을 당했고 도장 공장에서 고스란히 백기를 들고 나와 버렸다. 임금이라는 물을 찾아서, 생존권이라는 물을 찾아서 저항하고 투쟁했건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패배와 처참한 죽음뿐이었다.
처절하게 물을 찾아 땅 속을 헤집고 들어가는 그 물고기들을 고스란히 건져 올려 포식한 것은 강태공이 아니라 이 땅의 자본과 국가 아니었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때부터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 민중의 고혈을 빠는 강태공의 낚시 줄, 아니 아예 투망을 노동의 시장에 던지고 배터리로 노동의 강물을 지져가며,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야만적인 해고와 철거로 약탈해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망자에 대한 개인적인 슬픔 이외에 왜 아무도, 왜 누구도, 이토록 철저하리만치 용산을 망각의 강에 처박아 두는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 국민의 정부라 하지 않았던가? 국민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해서 참여정부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국민은 말로만 허울만 나라의 주인이었고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은 국가가 나서서 억압하고 국가가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았던가? 대통령이 되면 국민을 위해 하지 못할 일도 생기는 법이라 이라크 파병을 했고 국민의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좀 더 높은 단계로 업그레이드하고 한미 FTA를 추진했단 말인가?
대통령을 지내보지 않은 일개 국민은, 시민은, 노동자는, 민중은, 경찰의 몽둥이에 온 몸이 시퍼렇게 두들겨 맞아도 목소리를 잃은 자처럼, 아직도 망자의 육신을 반년이 넘도록 냉동고에 처박아 두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대들은 누군가? 노동자 민중의 후두를 절개 수술하여 목소리마저 강탈해간 그대들은? 대통령은 국장을 지내고 철거민들은 사랑하는 자신들의 남편을 장례도 못 치르고 망자의 영혼이 저토록 썩게 방치해둔단 말인가? 대통령의 육신을 국장 지내고 국민장 지낼 때, 그대들은, 한 번이라도 노동자 민중의 죽음을 같이 하자고, 장례를 같이 치르자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대통령의 빈소에 이 시대의 악령들이 우글거릴 때, 그대들은 그 악령들의 무심한 낚시 줄에 걸려,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성찰해본 적이 있는가?
다윈이 인간의 생존 경쟁을 열대 자연에서의 생태 투쟁에 비유했듯이 이 시대의 노동자 민중들이 살려고 기를 써 가며 모종의 틈새를 그것이 아무리 비좁더라도 비집고 들어가며 아등바등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자본주의의 최악의 유산인 예의 그 ‘경쟁’ 시장에 저마다 생존하기 위해 박아놓은 쐐기를 상상해 보자. 손바닥만한 노동 시장 안을 아무리 작은 틈새라도 꾸역꾸역 기어들어가 살고자 발버둥치는 노동자 민중들의 피 말리는 삶을 상상해 보자.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이 시대의 현실이고 두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실재의 현실이다.
그런데, 그런데, 용산의 철거민들이 그 참혹한 실재의 현실을 뚫고자 망루에 올라갔건만, 틈만 나면 개발차익을 챙기려고 머리 굴리는 투기꾼과 개발업자들의 더러운 욕망, 도심 재생 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건설자본 - 지자체에 사적 이익을 몰아다주는 국가와 자본의 비열한 욕망에 저항하고자 망루에 올라갔건만, 민중들에게는 ‘죽음의 폐기’가, 대통령에게는 ‘죽음의 승화’가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국민을 섬기라고 말은 했지만 국민이 왜, 어떻게, 대통령보다 높은 곳에 있어야 하는지 차마 깨닫지 못했고 그 국민이 노동자 민중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두 번 치르는 대통령의 추모 정국에 노동자 민중 용산 철거민들의 삶을 이토록 비루하게 만드는 자는? 국가와 자본의 더러운 욕망에 학살당한 우리들이 이제는 그 더럽고 추악한 욕망을 죽여야 할 때다. 용산에는 대통령이 없다. 그 욕망에 저항하고, 저항을 조직할 노동자 민중들의 목소리들만이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