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좌파(左派)가 좌파(座派)로 남지 않으려면

[논설] 촛불은 블랙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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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남짓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4월 말인가 5월 초인가 청계 광장에 시민들이 촛불 점화식을 할 때만 해도 촛불이 이렇게 활활 타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촛불 집회 초반부에 필자는 다음 아고라와 이명박 탄핵본부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며 댓글을 올렸다. 촛불이 점화될 때부터 나온 시민들의 구호는 미국산 소고기 반대가 대세였지만 의료민영화 반대, 0교시 자율화 반대도 자유발언에서 많이 나왔다. 옆의 사람 촛불에 촛불을 옮기던 집회가 불길을 확 댕긴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데이비드 캠프에 가서 보인 행태와 3조 6천억에 해당하는 미국산 소고기 시장을 완전히 열어준 5월 이후였다. 그 후 촛불은 마치 횃불로 진화한 듯한 느낌이었다. 19세기 말 동학군이 부정부패에 저항해 높이 들었던 횃불을 본 것 같았다.

그 후 두 달 남짓 흐르던 동안 미국산 소고기 문제는 공영방송 지키기, 한반도대운하 반대, 의료민영화 반대, 0교시 자율화 반대 등으로 확산 진화하고 있다. 블랙홀처럼 온갖 이슈들이 촛불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있다. 블랙홀이야 우주 안의 온갖 것들을 깡그리 말아 넣고 지구로 진격하고 있다지만 세상사는 반드시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블랙홀은 자연사고 세상사란 곧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과연 촛불은 블랙홀이 되어 청와대로 진격할 것인가?

이명박 정권은 노도 같은 횃불로 진화한 촛불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인가? 김진홍, 최시중, 서경석, 고엽제 전우회 등 보수단체, 조중동, 이문열 등 보수우익들이 맞불을 지르는데 혈안이 되어 있고 민주당, 자유선진당은 시민들이 애써 키워 온 촛불 물타기를 시도하면서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장집 교수는 대의제 운운하며 촛불이 거둔 민주주의의 성과를 국회에 밀수하려 하고 있다.

현재 촛불은 대단히 민감한 상황에 놓여 있다. 애초부터 시민들의 ‘원초적 이기주의’에 호소한 것이 촛불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 이기주의의 고지를 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강남 아줌마가 촛불 집회에 참여한 것은 결국 자기 가족을 미국산 소고기 인간 광우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발로다. 만일 현재 이명박 정부가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종부세 완화 정책이 튀어 나온다면 강남 아줌마는 다시 강남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촛불은 현재 복잡계 그 자체다. 계층, 지역별로 이해관계가 얽히고 섞여 있기 때문이다. 촛불을 공중에서 보면 엄청나게 기다란 하나의 질긴 엿가락처럼 보이지만 그 촛불 안에는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설탕 조각 안에 수많은 설탕 분자들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 - 분자들 사이의 비대칭성을 어떻게 고민해야 할 것인가? 숨 고르기에 들어간 촛불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닫힌 군중이 열린 군중으로 진화 성장하려면 ‘방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방전은 독일어로 Entladung인데, 방전은 일종의 ‘짐 벗어던지기’에 해당한다. 충전되었던 전기가 방전되어 못쓰게 되는 것이 방전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기의 삶을 짓누르고 있던 짐을 훌훌 벗어던지는 것,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고 만끽하는 것이 방전이다.

카네티는 닫힌 군중이 열린 군중으로 진화하는 것을 두고 ‘분출’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분출 현상은 지난 6·10에서 나타났다. 문제는 군중의 끊임없이 성장하려는 욕구를 어떻게 방전시킬까 하는 것이다. 방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카네티가 말하는 대로 군중은 그 안에서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촛불이 블랙홀처럼 온갖 이슈를 끌어들이고 있고 이명박 탄핵 카페에서도 공영방송지키기, 의료민영화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군중이 보기에 이러한 이슈들은 ‘낯선’ 것들이다.

카네티는 군중은 낯선 것에 대한 공포를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군중 안에 끼어 밀리고 밀리면서 그 공포심을 해소한다고 말한다. 군중 안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군중 내부의 적 탓에 방전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군중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 광장에 모인 촛불이 KBS 앞으로 몰려가긴 했지만 공영방송 지키기는 촛불들에게 낯선 것이다. 사람은 자기 얼굴과 비슷한 것의 죽음에는 애도를 느끼지만 가령, 개구리의 죽음 같은 것에는 인간에 대한 애도 정도의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촛불은 든 자는 시민이자 인간이다. 촛불은 애초부터 ‘원초적 이기주의’에서 시작했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그 이기주의를 건드린 문제다. 자기의 생명을 바로 죽일 수 있는 이슈에 대해서는 지역, 계층, 계급을 초월해 즉각 반응한다. 죽은 개구리의 얼굴이 아니라 미국산 소고기로 죽을지도 모르는 자기 자식들의 얼굴 때문에 촛불은 지난 두 달 동안 꾸역꾸역 모여들었던 것이다.

한반도 대운하 문제는 바로 혹은 조만간 내가 죽을 공포의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낯설다. 쓰나미처럼 해변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밀려들어올 문제이지만 내 생명을 직접, 바로 문 닫게 하는 이슈는 아니다.

촛불이 조중동에 타격을 주고 82쿡 닷 컴(http://www.82cook.com/)이 조선일보에 지면 축소 등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것은 촛불의 큰 성과다. 대한민국에서 8백만 가구 이상이 보고 있는 조선일보만 문을 닫게 해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시중이 발 벗고 나서서 방송통제를 하며 현재 촛불들의 행보에 맞불을 놓고 있다. 하지만 카네티가 말한 ‘이중 군중’처럼 군중 옆에서 맞불을 놓는 또 다른 보수우익군중들은 닫힌 군중을 열린 군중으로 분출하게 만드는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82쿡닷컴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촛불들의 ‘원초적인 이기주의’를 더 물고 늘어져야 한다.
촛불은 현재 방향이 없다. 촛불의 방향을 놓고 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미 촛불들조차도 다 알고 있는 내용으로는 촛불을 ‘방전’시킬 수 없다. 촛불들의 ‘원초적인 이기주의’를 더 물고 늘어져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명박 탄핵 카페, 다음 아고라에도 이미 자료가 다 올라와 있는 ‘유전자조작 옥수수’ 문제가 왜 이슈화되지 않는지, 촛불이라는 블랙홀에 왜 이 이슈가 빠져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의료민영화, 한반도대운하, 0교시 자율화 문제, 물/가스/전기/철도 등 대중적으로 선전 선동되지 않은 이슈들도 많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시민촛불들에게 아직 낯선 것들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푹 익혀지지 않아서 낯설다는 것이 아니다. 시민촛불들의 생명을 즉각 위협하는 문제들이 아니기 때문에 낯설고 날 거라는 말이다.

미국산 쇠고기도 이미 들어와 유통되고 있고 유전자조작 옥수수도 이미 들어와 유통되고 있는데, 불매운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민들 자기 가족들의 생명에 직접 타격을 가할 문제보다 쓰나미로 머물고 있는 문제들이 먼저 더 부각되고 있고 부각되어 나간다면, 촛불에 위기가 다가올 것이다. 원초적인 이기주의에 호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친숙한 것보다는 낯선 것들을 먼저 이슈로 들고 나오면 군중은 공포를 느끼고 그 공포는 금방 해소되지 않는다. 낯선 것이 친숙한 것은 먹물들의 엘리트적인 느낌일 뿐이다. 이러한 엘리트적인 감정이 한껏 더 나아가면 ‘디지털 게릴라’ 라는 형상을 환상 수준으로 증폭시킨다. 물론 온라인이 오프라인의 촛불에 불을 댕긴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그 이상 그 이하로 볼 문제가 아니다.

대학이 기업화하는 시대에 교수들은 아직도 자기가 노동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교수라는 관념은 친숙하지만 노동자라는 관념은 낯설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라는 관념은 ‘낯설게 하기 기법’에 사로잡혀 왔다.

국가와 자본이 노동자라는 관념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낯선 것으로 조작해왔기 때문에, 촛불은 노동자라는 관념에 대해 낯선 감정을 느낀다. 항간에서는 한 편에서는 촛불의 날개로, 다른 한 편에서는 민노총의 날개로 양면 작전을 불사한다지만 이 작전은 촛불들 안으로 파고 들어가 촛불 안에서 벌이는 작업이 아니다. 촛불 외부에서 하는 작업은 촛불의 성장 진화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 촛불은 촛불대로 자라나야 하고 진화해야 한다. 촛불의 기원인 ‘원초적인 이기주의’에 호소하고 그 호소로 촛불의 불씨를 장기적으로 키워나가며 촛불 안에서 촛불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좌파(左派)가 좌파(座派)로 남지 않으려면 촛불의 심지에서부터 촛불의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나머지는 모두 촛불의 외부에 서서 외부 나름으로 일을 해 나가야 한다. 촛불이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횃불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촛불 외부의 투쟁은 투쟁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두 가지의 융합은 인위적으로 촛불의 정세에 개입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라는 우발 점을 만나 촛불에 불길이 댕겨졌듯이 그 두 가지의 시너지 효과 또한 우발성으로 촉진될 것이다. 촛불은 지금 그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 팔팔 끓었던 라면 국물은 식을 것인가, 다시 데워질 것인가? 아뿔싸, 미국산 쇠고기 뼛가루 들어간 라면 수프를 라면에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덧붙이는 말

이득재 님은 대구카톨릭대 교수로, 참세상 논설위원 입니다.

  • 앉고

    좌파는 그냥 앉아있는 게 도와주는 거겠네요. 아니 광우병 얘기하다 지치니까 옥수수 얘기하면 촛불이 살아날 거라는 게 멀로 생각하셔서 나온 결론인가요? 머리로 앉아계신 것 아닌지.

  • 나그네

    좋은 글입니다. "좌파(左派)가 좌파(座派)로 남지 않으려면 촛불의 심지에서부터 촛불의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와 닿네요.

    앉고님께도 한말씀 드립니다. 6.10이후 수그러들고 있는 촛불 정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이 있으시다면 그렇게 얘기하시면 안됩니다. 글쓴이가 말하는 것은 그래서 옥수수 얘기를 하자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님께서 좌파더러 앉아있으라 그러는 건 ('좌파'도 엄연한 '시민'의 한 사람'들'이므로) 저에게는 모든 시민들을 향해 그냥 앉아있으라는 말로 들리네요.

  • 촛불

    촛불들고 앉아 있음되지 뭐.... 요지부동으로 촛불들고 앉아있는 것도 괜찮은듯 한데.... 꼭 뭘 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