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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權)

[워커스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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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육계에선 부쩍 교권(敎權)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교사의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 무례한 행동을 하는 학생, 교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학생과 보호자의 사례가 집중 조명을 받는다.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당해서 고생하는 교사가 많다는 시사 방송도 화제다. 5월 중순에는 스승의 날을 맞이해 “무너진 교권 회복, 교권 보호”를 외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서 어김없이 학생 인권이 과잉 보장돼 교권이 작아졌다는 말들도 나온다.

이러한 논리 구조와 인식의 틀은 익숙하고도 식상하다. 가령 페미니즘 운동과 그에 대한 백래시를 ‘젠더(남녀) 갈등’으로 부르는 것 역시 꼭 같은 방식이다. 어느 한쪽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그 권리가 과다해진 탓에 다른 한쪽의 권리가 작아진다, 경시된다는 해석도 판박이다. 서로 다른 두 주체의 권리가 충돌하는 권리 대 권리의 갈등 상황이라는 프레임인데, 이런 논리는 곧 양비론과 균형론으로 귀결된다. 권리라 하면 모두 마땅히 보장돼야 할 것,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이므로, 두 권리 사이에서 적절한 절충안을 마련하고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식이다.

단순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프레임이지만, 구체적으로 따져 보면 이런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 때가 많다. 대개 소수자의 권리가 딱히 과다하지도 철저히 보장되는 상황도 아닐뿐더러, 어느 한쪽의 권리 신장이 다른 쪽의 권리 실추를 초래했다는 인과관계도 허술하다. 무엇보다 그 밑바탕에는 권리에 대한 오개념이 깔려 있다. 권리는 양적으로 비교 가능한, 개개인이 가진 소유물 혹은 재산이나 권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권리와 권력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그리고 같은 층위에 있지 않거나 권리가 아닌 것들이 모두 ‘권(權)’ 자를 달고 대등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인민의 ‘right’와 군주의 ‘power’가 구분되지 않으면

19세기 중반, 일본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권리’ 개념에 해당하는 영어 ‘right’와 네덜란드어 ‘regt’(현재는 ‘recht’)를 ‘정직(正直)’, ‘도리(道理)’, ‘통의(通義)’ 등 도덕적인 올바름이나 마땅한 이치를 뜻하는 한자어로 번역했다. 도덕적·법적 정당성을 가지면서 개인에게 보장되는 그 개념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right를 과연 무엇으로 옮겨야 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새삼 ‘권리’란 것이 꽤나 복잡하고도 어려운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결국 right의 번역어로 ‘권리(權利)’, ‘권(權)’이 자리 잡게 된다.1

그런데 이 ‘권’은 권리·인권·기본권 등에도 쓰이지만, 권력·권위 같은 단어에도 쓰인다. 아니, 권리라는 개념이 수입되기 전에는 권력 내지 권세의 의미와 어감으로 더 많이 쓰였다. 초기의 이런 번역이 사람들에게 권리도 일종의 권력, 힘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데 일조했다. 본래 ‘권(權)’은 저울 또는 저울질하는 행위를 나타낸 글자다. 주요하게는 무언가를 평가하고 판단한다는 뜻이 있고, 국가나 왕의 역할, 힘, 권력 등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한문 고전들의 용례를 보면, 법 자체 또는 법을 적용·판단하는 행위 및 권력을 뜻했고, 자의적으로 휘둘러지는 힘이란 맥락에서 ‘권세(權勢)’라는 조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지배자의 권력을 가리키던 한자가 그와는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피지배자들의 ‘rights’를 담는 단어로 채택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로 인해 일본에선 right에 해당하는 ‘인민의 권’과 power에 해당하는 ‘군주의 권’을 같은 차원에 놓고 다루는 잘못된 논리가 등장하기도 했다.2

이러한 혼란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변주되고 있다. 교권 논란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교권은 교사의 인권을 가리키는지, 직무상의 권한을 가리키는지, 학생에 행사하는 권력을 가리키는지, 교사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인정받는 권위를 말하는지 혼란스러운 개념이다. 학생 인권의 대립항으로 교권을 들 때는 보통 교사의 인권이나 법적 권한이라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학생들이 교사의 지시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사례가 ‘교권 실추’의 대표 현상으로 거론되는 것은 대중의 머릿속에서 교권이 실은 권위나 권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교권은 교사의 안전과 인격에 대한 보호부터 학생을 통제할 권력, 타인의 인권을 제한할 재량까지 뒤섞여서 이야기된다. 반면 학생 인권의 내용은 주로 학생의 인격, 신체, 사생활을 존중하고 침해하지 말라는 데 그친다. 교권과 대조적으로 교사를 통제할 권력이나 교사의 인권을 제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전혀 다른 성격의 ‘교사의 권’과 ‘학생의 권’이 대등한 대립항이며 균형을 이뤄야 할 것처럼 보이는 것이야말로 ‘권’이 일으키는 착시이다.

서구 사회라고 해서 권리를 개인의 소유물처럼 인식하는 모습, 법형식주의적으로만 작동하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특히 권리, 권력, 권위 등이 잘 구분되지 않은 채 다뤄지고, 인권을 특권이나 권력과 동일시하는 모습에는 이러한 모순된 번역 및 개념어가 어느 정도 원인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행정기관의 권한에 불과한 검찰의 수사권이 중요한 헌법적 권리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고,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면 이들이 마치 특권을 바라는 것처럼 왜곡되는 상황들을 목격하고 있다.

무엇이 올바른 상태인가

올바름, 정당함, 법 등의 뜻을 가진 right가 ‘권리’가 된 것은 17세기 자연법사상을 거치면서였다. 인간이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가 있고, 그 상태를 실현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존재 목적이자 정당성의 원천이라는 의미가 권리로서의 right 개념에 담겨 있다. 따라서 자연권-인권은 곧 우리 사회가 보편적으로 지향해야 할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함의한다. 이런 의미에서 권리는 개개인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가지는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수도 있다. 권리는 법제도와 여타 사회 시스템의 전제이며 동시에 목적으로 존재한다. 예컨대 학생의 인권을 실현하는 것은 교육 활동의 목적이며, 인권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만 교육 활동이 가능하기에 교육의 전제다.

사회적 갈등 및 충돌을 권리 사이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권리를 힘겨루기나 이익 다툼의 소재쯤으로 간주하기에 부적절하다. 권리 대 권리의 문제이니 균형 있게 봐야 한다는, 한쪽 권리만 강조해선 안 된다는 접근법은 무엇이 바람직하고 올바른 상태인지에 대한 판단을 회피하기에 불의하고 오히려 반(反)권리적이다.

장애인 활동가들이 전철에 탑승하는 시위를 벌여 전철 이용자들이 불편을 겪는다며 ‘불편을 느끼지 않을 방법으로 하라’라고 주문하는 것은 올바른가?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집회로 인해 기업이 손해를 보고 학습에, 교통에, 소비자의 향유에 곤란이 생기므로 파업과 집회의 권리를 제한하려 드는 것은 정당한가? 이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권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매우 원리적인 정당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불편·불쾌·손해의 문제를 인권과 나란히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더군다나 그런 행동에 나서는 이들이 차별받고 불의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것이라면 그러한 조건까지도 고려되고 논의돼야 마땅하다.

권리, 인권의 개념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고도 당위적으로 보장돼야 할 조건 및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묻고, 그 실현을 위해 사회나 국가가 어떤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를 따져 묻게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권리를 각자의 이익이나 편리로, 집단 간의 상대적 힘과 우열로 이해하면 이러한 질문과 비판은 중단된다. 무엇이 올바른 상태인가 하는 문제를 덮은 채로 ‘저울질’만이 남게 된다.

현 사회 체제의 지속 가능성이 의문시되고 있는 시대다. 마땅히 보장돼야 할 권리란 무엇인지, 우리 사회가 함께 추구하고 공유해야 할 목적과 정당성은 무엇인지 다시 이야기하고 만들어 가야 할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일단은 권리에 관한 논의 또는 사회 문제를 이렇게 ‘젠더 갈등’이니 ‘학생 인권 대 교권’이니 ‘노동자의 권리 대 사용자의 권리’니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를 멈추는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각주>
(1) 조효제, 〈인권이라는 말의 유래〉, 한겨레, 2013년 5월 29일.
(2) 야나부 아키라 지음, 김옥희 옮김, 《프리덤, 어떻게 자유로 번역되었는가》,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