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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죽음

[비문명의 역습] 〈우영우〉의 세계관은 ‘한국판 T4’를 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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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캐릭터’들의 매력이 감추는 것들

우영우는 보기 드물게 매력적인 캐릭터다. ‘천재 자폐인 주인공’이란 진부한 설정에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우영우〉)는 딱히 진부하지 않다. 〈우영우〉가 자폐 여성을 ‘모에화’한다거나 대다수 장애인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은 물론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우영우〉는 통상적인 세계에 돌연 나타난 ‘이상한 존재’가 타자들과 낯선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가며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그려낸다. 기존의 많은 콘텐츠와 달리, 이 세계관에서 장애는 사회적 편견 탓에 차별의 대상이 될 뿐 그저 안타까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영우가 타자들 사이에서 독창적 세계를 창조하는 한 방식이 된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포스터 [출처: ENA 홈페이지]

단순히 ‘천재’로 환원될 수 없는 ‘풋내기 변호사’ 우영우가 모범적인 상호의존 속에서 성장해가는 모습은 작품에 흥미를 더한다. 극 초반만 해도 ‘법무새’에 가까웠던 우영우는 관계가 넓어질수록 법 너머의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변해간다. 한편 타자들과의 경험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존재와 좋은 관계 맺음에 대한 그녀의 고민도 깊어진다. 마침 우영우 곁에는 훌륭한 타자들이 있다. 어떤 동료는 공감 능력이 눈부시게 뛰어나고, 어떤 동료는 우영우의 이상함을 장점으로 승화하는데 탁월한 모습을 보인다. 우영우가 소송 과정에서 유대감을 품는 이들 역시 참 괜찮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또 어딘가 이상하고,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어쩐지 억압받는 이일수록, 해방을 꿈꾸는 이일수록 더 그런 것만 같다.

그러나 지나치게 매력적인 캐릭터는 때로 구조가 가진 문제를 의도치 않게 감춘다. 물론 〈우영우〉는 다양한 소수자들, 해고노동자, 대형 로펌 등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꽤 섬세하게 다룬다. 문제는 〈우영우〉가 여기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천재 장애인 주인공’이라는 설정보다 더 진부한 K-드라마의 ‘힐링 강박’은 여기서도 반복된다. 이 세계관에서는 나와는 너무 달라 낯선 타자는 물론, 나를 위기에 빠뜨린 이조차 다 사정이 있기에 쉽게 품을 수 있다. 우리 주변엔 사회적 약자들을 기꺼이 돕는 멋진 사람들도 꽤 있어서 여전히 희망이 넘친다. 정작 문제를 낳는 구조는 그대로인데,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선하고 정의로운 행동들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문제가 해결된 것만 같은 환상에 빠져든다.

우영우가 법무법인 한바다 입구에서 겪는 변화는 특히나 상징적이다. 자신을 혼란과 공포에 빠뜨린 회전문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회전문은 통행량 속도가 느리고 어린이나 노약자가 문에 끼일 수 있으며 휠체어 사용자가 이용하기 어려워요.” 이내 우영우와 곧 ‘썸’을 탈 것만 같은 훈남이 개입해 제안한다. “왈츠를 춘다고 생각하면 어때요? 쿵 짝짝. 쿵 짝짝.” 회전문 밖으로는 따사로운 빛이 그득하고, 차별의 장소였던 회전문은 단숨에 설렘의 장소로 전환된다. 그리고 회전문이 갖는 구조적 문제는 우영우를 한층 더 성장시킨 이준호의 훈훈한 미소와 함께 이내 감춰진다.

‘공정의 아이콘’ 변호사 권민우에게 날린 시니어 변호사 정명석의 일침은 어떠할까? “의견이 안 맞고 문제가 생기면 같이 이야기하고 서로 해결해야죠. 매번 잘잘못 가려서 상주고 벌주고, 난 그렇게 일 안 합니다.” 그러나 이 말과 함께 부각되는 정명석의 ‘간지’는 1년짜리 계약직 제도가 한바다건 어디서건 수많은 권모술수와 소수자 혐오를 유발할 것임을 잊게 만든다. 최수연 변호사가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 졸업했다면 대형 로펌에 입사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 일갈하는 장면은? 혹 그 정의로운 장면은 오늘날 공정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갖는 문제점들을 그 특유의 선한 매력으로 감춰버리진 않았는가?

〈우영우〉의 ‘따뜻한 정의’는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선한 태도를 통해 해결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정말로 장애인에 대한 억압도 사라질까? ‘우영우 신드롬’이 부는 동안 많은 이들이 〈우영우〉의 선한 캐릭터들처럼 살아갈 것임을 다짐했는데도, 대다수 장애인이 여전히 희망을 품지 못하는 것을 보면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나치의 T4와 한국판 T4
: 장애인들이 겪는 비극의 원인은 바로 이 체제에 있다


지난 3월 2일, 50대 어머니가 발달장애인 딸을 살해한 후 자살을 시도했다. 같은 날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한 어머니가 7세 아들을 살해했다. 5월 23일, 서울 성동구에서는 40대 어머니가 6세 아들과 함께 목숨을 끊었다. 5월 30일, 밀양에서는 한 어머니가 발달장애 자녀와 함께 투신했고, 6월 3일, 안산에서는 발달장애 자녀를 둔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8월 8일에는 신림동 반지하에 살던 발달장애인과 가족들, 상도동 반지하에 살던 발달장애인이 집 안으로 쏟아진 물에 잠겨 목숨을 잃었다.

올해 언론에 공개된 사건 몇 개만 추려도 이 정도다. 세상에 부고를 전하지 못한 채 죽어간 장애인과 가족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실제로 2020년 기준, 한국 지적장애인의 평균 수명은 55.9세, 자폐 장애인의 평균 수명은 23.8세다. 심지어 장애인의 자살률은 전체 인구 자살률의 2.2배이고, 자폐인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기후위기로 재난이 일상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반지하 가구의 21.6%가 장애인 가구라는 사실은 불안감을 더한다.

이 참담한 현실의 원인은 이 체제가 장애인 돌봄의 책임을 가족들에게 전적으로 떠넘긴 데 있다. 장애인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들을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을 ‘생산성 없는’ 인구에게 투입하는 걸 한낱 낭비라 여기는 이 체제의 암묵적 믿음을 진작 깨뜨렸다면, 저 비극적 사건들은 벌어질 이유가 없다.

  지난 7월 1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용산에서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T4장례식을 열고 있다. [출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지난 7월 1일, 이 체제 속에서 죽어간 발달장애인 희생자들의 장례를 치르고, 이 비극적 사건들을 모아 ‘한국판 T4(Aktion T4)’라 명명했다. ‘T4’는 1939년 히틀러의 지시로 시작된 나치의 ‘장애인 안락사’ 비밀 작전으로, 본부가 베를린 티어가르텐 4가에 있어 붙여진 암호명이다. 이 작전은 공식적으로 1941년까지 지속됐는데, 이 과정에서 7만여 명의 장애인이 가스실에서 죽었다. 1938년 시작된 약물 과다 투여 및 굶김을 통한 장애아동 살해, 1945년까지 나치 점령지 곳곳에서 이어진 살인 실험들까지 포함하면, 나치에 희생당한 장애인·불치병환자는 대략 3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물론 나치의 T4와 한국판 T4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오늘날 한국 정부는 나치와 달리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둘 뿐이다.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나치 때처럼 어떤 사람을 죽이라 지시하지 않는다. 그냥 이 시대 복지 서비스 기준에 맞춰 장애 정도를 진단할 뿐이다. 오늘날에는 극우 세력도 ‘열등한 인구’를 말살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도생하느라 힘든 본인에게 ‘역차별(?)’ 등 피해가 올 때만 혐오를 표출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나치의 T4에서 기시감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공교롭게도 전장연이 장례를 치르고 며칠 후, 우영우도 T4를 한국 사회와 연결 지어 이렇게 말했다. “한스 아스퍼거는 나치 부역자였습니다. 그는 살 가치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를 구분하는 일을 했어요. 80년 전만 해도 나와 자폐 장애인들은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수백 명의 사람이 의대생이 죽고 자폐인이 살면 국가적 손실이라는 글에 ‘좋아요’를 누릅니다.”

  나치 시절 사용된 포스터로, 비장애인 노동자가 장애인들을 부양하기 위해 지는 부담을 표현하고 있다.

나치 때 ‘죽여야 할 사람’은 매우 자의적으로 선정되곤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기준은 ‘생산성’과 ‘의료적 이상’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영우가 당시를 살았다면 정말 살해당했을지는 확실치 않다. 우영우의 담당 의사가 고기능 자폐의 긍정적 잠재력을 잘 알고 있던 아스퍼거였다면, 그는 우영우를 더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영우의 이 말이 진실인지와는 별개로, 이 장면은 T4와 한국판 T4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확연히 드러낸다.

1925년 독일 장애인 부모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73%가 ‘치료될 수 없는 백치로 고통받는 이라면 생명을 단축해야 한다’고 답했다. 오늘날 한국의 장애인 부모들은 자녀 돌봄에 대한 부담을 견디지 못해 ‘감옥 같은’ 거주시설을 찾는다. 그리고 자식을 시설로 보내지 않는다면, 자신과 자식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절규한다. 나치는 ‘인종 정화’의 구호를 외치는 한편, 다음과 같은 프로파간다를 사용했다. “한 명의 장애인에게 매일 국가가 쓰는 돈 5.50라이히스마르크! 5.50라이히스마르크로 4인 가족이 살 수 있다.” 오늘날 정부는 국가적 성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부자 감세’를 추진하면서 “장애인들의 권리예산 요구를 다 들어주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말한다.

80년 전이건 지금이건 반복되는 이 참담한 현실은 단순히 이 사회에 선한 사람들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선한 이들의 도움으로 잠시 더 나은 삶을 꾸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운 좋게 선한 사람을 만나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게 이 사회라면, 이 사회는 좋은 사회라 할 수 있는가? 구조가 낳은 공백을 개인들의 선행으로 메꿔야 하는 사회에는 정말로 희망이 있는가?

‘평범한 선’을 넘어 ‘체제를 바꾸는 나쁨’으로

T4에 투입된 사람 중 상당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는 이 작전을 통해 보너스를 받아 가려 했고, 어떤 이는 희생자들에게 뽑은 금니로 치과 할인을 받으려 했다. 심지어 국제적인 기준에서 보더라도, T4에 동조할 사람은 차고 넘쳤다. 193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장애인 안락사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 〈나는 고발한다(Ich klage an)〉가 상을 받았다. 독일 의사들은 미국 우생학과 단종법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1930년대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차례로 단종법이 시행됐다. 존 록펠러, 존 켈로그 등 대자본가들은 물론, 사회주의자들 상당수도 우생학을 지지했다. 앤 설리번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선한 돌봄’이 장애인의 삶을 얼마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준 헬렌 켈러조차 ‘정신적 손상을 가진 아동’을 제거해야 한다고 봤다.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진 것은 단순히 ‘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이들은 단지 ‘살 가치가 있는 사람’과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 나뉘어 있다고 믿어지는 체제 안에서 살았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 히틀러와 그의 주치의 카를 브란트(Karl Brandt)는 “장애인·불치병 환자는 죽여서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윤리적인 것”이라 말한 바 있는데, 실제로 당시 많은 이들은 이 주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영우〉는 끊임없이 선하게 살 것을 권장하며, 심지어 당신들의 내면에 이미 그 가능성이 잠재돼 있음을 자극한다. 다행히도 그 선함은 나치 때와 달리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야만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체제가 지금처럼 유지된다면, 〈우영우〉의 시청자들이 아무리 착한 마음을 먹는다 해도 장애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찾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최소한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며, 주간활동서비스, 주거권, 교육권, 노동권 등의 예산을 대폭 확대하지 않는다면, 선한 사람들이 많아지건 말건 한국판 T4는 지속될 것이다.

  지난 7월 26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발표한 만평. [출처: 피델체]

그러나 〈우영우〉를 보고 감화받은 시청자들 상당수마저 이 체제를 바꾸는 운동, 최소한 ‘장애인 권리예산 투쟁’에 여전히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장연은 지난 7월 26일 이와 관련된 만평을 하나 발표했다. 만평에서 어느 시민은 우영우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장애인도 함께 살아야지.” 반면 출근길 지하철 문을 막아 세우고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을 외치며 바닥을 기는 장애인을 두고는 이렇게 말한다. “집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출근길 막고 난리야!” 전장연 SNS는 물론, 이 만평을 기사화한 글들에는 이내 다음과 같은 댓글들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우영우는 지하철을 막지 않잖아.” “세상 도움 하나 안 되는 범죄자들이랑, 능력이 있는데 차별받아 온 우영우랑 같냐?”

나치의 T4를 막기 위해서는 나치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 체제의 작동을 멈춰 세우는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은 과거 나치에 맞서 싸운 ‘범죄자’들을 선한 사람들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상당수에조차, 한국판 T4를 막아 세우기 위해 체제의 작동을 멈춰 세우는 이들은 그저 ‘사회악’일 뿐이다. 단순히 한국 정부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서일까? 수만 명이 단숨에 죽는 게 아니라, 한 명씩 한 명씩 따로따로 죽어가고 있어서일까? 그러나 사회적 타살의 악함 정도를 잔인함의 스펙터클로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잘못된 체제 안에서, 그 체제의 기준에 맞춰서만 선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체제가 낳는 악에 동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악의 작동을 멈춰 세우는 것은 결국 그 체제에 맞서 싸우는 ‘나쁜 사람들’이다. ‘우영우 신드롬’을 통해 재확인된 선한 시민들의 정의감이 80년 전 T4를 다르게 반복하는 이 체제에 맞서 싸우는 연대의 실천으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