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프지 않았다. 밤늦게 밀린 서면을 쓸 때면 “노동자를 대변할 법리가 없다는 현실보다 배가 고픈게 더 참기 힘들어”라며 엄살을 피우던 나이지만 국회 앞 짱짱한 뙤약볕 아래서도 이상하리만치 배가 고프지 않았다. 허기가 사라져버린 건 무거운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막상 피켓을 들고 서서, 그동안 내가 만나왔고 앞으로 만나게 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맞아야 할 오늘, 그리고 늘 오늘 같을 수많은 내일들을 생각하니 쓴 약을 입에 문 듯 입안에 씁쓸함이 배어들었다.
'비정규직법 개정안 결렬시 7월 비정규직 대량해고 불가피', '비정규직법 2년 도래로 기업의 시름 깊어', '민주당은 6개월안 한나라당은 2년안을 놓고 공방'
비정규직법 논란은 마치 비정규직 중 일부만이 무기계약직이 되고 대다수는 해고되는 현행 비정규직법과 비정규직 모두 비정규직으로나마 계속 일할 수 있다(사실인지도 의심스럽지만)는 유예법안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판가름하는 것이 사태의 핵심인 것처럼 연일 보도되고 있다. 피켓을 힐끗 쳐다보며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 버스를 대절해 국회의사당에 견학을 온 아이들, 국회 앞이 자기 관할이라며 언제까지 할꺼냐 껄렁한 농을 거는 형사에게조차도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행동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국회에서 내려온 2개의 동아줄 중 무엇을 잡으라는 얘기인지 묻는 듯 했다.
둘 모두 썩은 동아줄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어느 것을 붙잡든 사용자는 2년 내에 언제든지 기간만료로 근로관계를 단절할 수 있고, 고령자, 직업훈련생, 조교뿐만 아니라 박사학위자와 같이 전문직이라는 이름을 달기만 하면 기간제한 없이 비정규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더라도 정규직과 같은 임금을 지급할 의무도 없고 비정규직 중 한 명만이라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시켜 놓으면 다른 비정규직들의 임금차별 문제도 수월하게 피해갈 수 있다. 그것도 귀찮으면 사내하청이나 외주화를 하면 되고, 차별시정신청을 하거나 노동조합을 만드는 미꾸라지가 있으면 기간만료나 도급업체 폐업을 통해 근로관계를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썩은 동아줄 두 개를 붙잡고 어느 것이 덜 썩었을지, 어느 것이 그나마 좀 더 버틸 수 있는 동아줄인지를 양자택일해야만 할까.
앞 다투어 “비정규직을 위하여”를 외치지만 그들은 사용자에게 속삭인다. “법이 바뀌지 않는 한 정규직전환을 하는 건 손해다. 해고를 하라” 비정규직법을 확대 해석하여 100만 해고대란설을 제기하고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는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정부와 경제위기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2년 유예라는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산다고 벼랑으로 밀어넣는 한나라당의 비정규직법 개악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법률위원회의 법률가들은 '비정규직법·최저임금법의 올바른 개정을 위한 법률가공동행동'을 기획하게 되었다. 2009년 4월 12일부터 비정규직법 시행 2년이 되는 6월 30일까지 80일 간의 1일 단식농성 및 국회앞 1인시위를 진행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법 시행 2년이 되는 6월 30일까지 법개악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래는 여전히 안개속이다. 7월 1일 노동부장관은 유예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정규직전환 지원금을 줄 수 없다고, 그러니 유예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까지는 계속 해고를 하라고 사용자를 부추긴다. 앞다투어 “비정규직을 위하여”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노동부장관의 담화 어디에도 비정규직의 실직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오히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는 개정안을 다시 추진할 것이라고까지 한다.
비정규직 과잉의 시대, 새로운 새끼줄꼬기. 어느 것이 덜 썩은 동아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데 있다. 비정규직 사용에 대한 사유제한을 하지 않는 한 비정규직 남용을 막을 수 없다. 기간제한만을 한 비정규직법이 야합에 의해 졸속처리될 때 2년이 지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될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리고 마치 지금까지는 비정규직 해고가 없었던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실제로 2년이 되기 전에도 많은 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용자의 임의에 따라 기간만료라는 이유로 실직되고 있었다.
비정규직 규모의 확대가 노동자의 삶의 질과 우리 산업의 건전성을 훼손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경제위기의 해법을 노동유연화에서만 찾는 정부의 노동정책은 자본주의 경기순환의 작은 골짜기마다 고용환경을 점점 유연화하고 변동성을 키운 결과, 예전이라면 사회적으로 큰 충격없이 담담하게 넘길 수 있는 경기순환의 가벼운 고비조차도 앞으로는 대량의 고용위기로 확산시킨다. 경제위기라는 공포를 이용하여 더 이상 썩은 동아줄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젠 비정규직 규모를 줄이기 위한 근본적인 방안을 고민해야 할 차례이다. 그래서 1일릴레이단식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싸움에 함께 할 것임을 다짐하며, 입 안 가득 고인 쓴 물을 삼킨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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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노무사는 노무법인 현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4월 12일~6월 30일까지 진행된 [비정규직법의 올바른 개정을 위한 법률가 공동행동]의 릴레이 하루단식, 국회앞 1인 시위를 80일차로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