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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라 하기엔 충분히 잔인했다

[인터뷰]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노동자 박지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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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 씨가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 한 말은 “미안하다”였다. 그녀가 지은 죄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 이름만으로도 공포일 수밖에 없는 백혈병에 걸려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스무 세 살의 지연 씨가 왜 ‘미안한 인생’을 살아야 할까.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한지 3년이 채 안 돼, 급성골수성백혈병 판정을 받아 투병중인 박지연 씨. 그녀가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노동자 4명과 함께 제출한 산업재해 신청이, 지난 5월 19일 전원 불승인 결정을 받았다.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도 착용해야하는 지연 씨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하면서 머리카락이 다 빠졌을 때는 모자를 써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고 했다. [출처: 미디어충청]

소녀가 품었던 꿈과는 거리가 한 참 먼 현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그녀는 중학생일 때 이미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상고를 진학했다.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소녀에게 삼성이라는 기업은 그 꿈을 이뤄줄 디딤돌로 여겨졌으리라.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봄에 삼성반도체에 입사원서를 내고, 그해 12월 온양공장에 입사한 그녀에게 다가온 현실은 소녀가 품었던 꿈과는 거리가 한 참 멀었다.
“첫 월급이 78만원 정도였어요. O/T를 달아야 90~100만원, 12시간 맞교대를 일주일에 4일이나 해도 임금이 130만 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죠. 거의 장시간 막노동과 같은 현실이라 기숙사와 공장만 왔다갔다 하면서 살았어요. 게다가 기숙사에 들어와 있어도 항상 마음이 불안했어요. 처음엔 암기해야 하는 것도 너무 많았고, 시험을 봐야하는 스트레스도 있었죠. 나중에는 ‘내가 불량을 잘못 처리하고 온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편하게 쉴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박지연 씨는 온양공장에서 반제품 상태로 만들어진 반도체를 검사하고, 다음 공정으로 넘기는 일을 해왔다. 그녀가 역한 화학약품 냄새를 참아가며 힘든 노동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돈을 모아서 부모님께 집도 사드리고, 여행도 보내드리면서 효도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5~10년 일하면 돈을 많이 모을 수 있을거란 생각을 가졌던 그녀를 기다린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백혈병이었다.

“한국 최고의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것이 무척 기뻤고, 은근한 자부심도 있었어요. 열심히 일하면 차곡차곡 돈도 많이 모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있었죠. 하지만 삼성에서 일한 대가로 제가 백혈병에 걸릴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지연 씨는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어두운 복도에 '암센터'라는 간판이 너무 무서워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체념한듯 담담하게 그 암센터로 들어간다. [출처: 미디어충청]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극도로 약해진 그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인터뷰 도중 건넨 음료수캔도 소독약으로 입구를 닦아내고 마셔야 했다. 게다가 집 밖으로 나가는 자체가 백혈병 환자에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 거의 집안에서만 생활한다고 했다. [출처: 미디어충청]

“내가 백혈병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무작정 무서워서 울기만 했어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머리카락이 한 주먹씩 빠지기 시작하면서 내가 백혈병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죠.”


‘산재신청만 안 하면, 치료비 모두 책임지겠다’?

삼성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하거나 투병중인 노동자는 현재까지 확인 된 것만 22명이다.(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이미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고인이 된 황유미 씨의 아버지 말에 따르면, 삼성은 최초 이 문제를 제기한 이들에게 거액의 금품으로 회유하여 산재신청 시도를 차단하려 하였고, 현장 동료들의 입을 막고 작업현장을 깨끗이 청소하여 산재를 은폐하려 했다고 한다.
박지연 씨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삼성은 박지연 씨의 언론 인터뷰가 나가기 전까지는 별다른 반응도 없었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호주머니 털어서 모금이나 조금 해주면, 덮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런데 박지연 씨가 다른 피해 노동자와 그 가족, 연대단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파악된 직후부터 삼성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변했다.

“집까지 찾아와서 ‘산업재해 신청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어요. 산업재해 신청만 하지 않으면 치료비 모두 지원하겠다고 했고, 시골집까지 찾아와 ‘집을 깨끗하게 고쳐주겠다’고까지 했었어요.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부모님도 갈등이 심했어요. 하지만, 산업재해인 것이 너무나 명백했고 이것이 확인만 되면, 굳이 불확실한 회사의 말에 기대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박지연 씨가 다른 피해 노동자와 함께 산재신청을 하자 삼성의 태도는 ‘집을 언제 고쳐주겠다고 했냐. 법대로 해라.’로 돌변했다.

역학조사? 헉! 할 조사

“제가 일할 당시와 너무도 다른 작업환경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하면 뭐가 나오겠어요? 그즈음에 계속 일하고 있는 언니와 전화통화를 했었는데, 역학조사 할 때는 공장을 깨끗하게 청소한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마스크도 다 쓰고, 화학약품이 스며들던 면장갑과 기타 보호장비도 새로 보강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지난 12월 29일, 한국산업안전공단이 발표한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의 건강실태 역학조사’ 결과 또한 발병 위험을 은폐-왜곡 했다는 의혹이 제기 됐다. 반올림은 이 결과 보고서에 대해, 일명 ‘사고라인’이라고 불린 위험한 생산라인 노동자가 아니라 삼성반도체 전체 노동자에 대비한 발병률로 통계를 뭉뚱그렸다고 밝혔다. 그리고 취업 단계에서부터 좀 더 건강한 이들이 입사하는데다가 근무 중에 건강 문제가 발생하면 퇴사나 이직을 통해 그 현장을 떠나기 때문에 결국 공장에는 건강한 노동자들만이 남게 되는 현상(건강 노동자 효과)을 고려하지 않은 분석을 내놓았고. 림프종과 백혈병이 다른 질환인 것처럼 표현해서 백혈병의 위험이 적어 보이도록 표현하는 등 드러난 위험조차 축소하고 감추기에 급급한 보고서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일부 언론은 이미 ‘반도체 산업에서 백혈병 위험이 높지 않음이 확인되었다’, ‘오히려 일반 인구 집단보다 더 안전하다’라는 등 진실을 왜곡하는 보도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진료를 기다리던 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중계방송이 나왔다. 노무현 정부는 차세대 10대 성장동력 육성사업으로 반도체산업을 하나로 꼽았었다. 지연 씨는 그의 임기 중에 백혈병에 걸렸고, 삼성과 근로복지공단, 그리고 정부는 그녀를 외면했다. [출처: 미디어충청]

“불승인한 이유가 2~3줄밖에 안 돼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요. 너무 억울해요. 삼성도 근로복지공단도 모두 다 원망스럽고 답답해요. 처음 백혈병 진단을 받을 때 받았던 충격과 불승인된 결과를 받은 지금의 충격이 별반 다르지 않아요. 삼성이라는 거대한 권력과의 싸움이라 어려울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래도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근로복지공단이 1년 넘는 시간을 걸려 보내온 불승인 통보서에 쓰인 단 몇 줄의 글이 박지연 씨의 앞으로 남은 인생을 다시 한 번 절망으로 내몰았다. 통보서의 ‘처리결과 및 구체적인 이유’라는 항목에는 “동 질병이 업무상 질병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관련자료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역학조사결과보고서, 우리지사 자문의사회의 결과, 구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 제39조 1항[별표1]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바, 재해자의 백혈병은 업무와 인과관계가 낮다고 판단되어 귀하의 최초요양급여신청에 대하여 불승인함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전부이다. ‘구체적인 이유’가 전혀 구체적이지 않았다.

“불승인함을 알려드립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막막해요. 지금 엄마가 밤낮으로 일해서 생활비, 치료비를 감당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 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밥 먹는 것조차도 부모님께 너무 미안하고 죄송해요……. 집에 하루 종일 혼자 있으면, 자꾸 자책감이 들어요. 나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분하기도 하고……. 백혈병 환자에겐 청결이 최우선이라 부모님이 계시던 시골집에서는 생활할 수가 없어서 아빠 혼자 두고, 엄마랑 읍내에 따로 방을 얻어 살고 있어요. 한 번은 시골집에 아빠를 보러 갔었는데, 아빠 혼자 힘들게 사시는 걸 보니까 죄송해서 눈물이 나오더라구요…….”

지연 씨는 지난해 4월 골수이식 수술을 했지만, 7~8일 꼴로 3번이나 응급실에 실려 갔다.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극도로 약해져 얼굴 안면과 눈에 수포가 생기는 등 대상포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진통제를 사용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고 한다. 그녀는 언제 다시 대상포진이 발생할지 몰라 항상 불안하게 떨면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지연 씨는 자기 몸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상황에서, 스무 한 살에 백혈병에 걸려 하루 아침에 앞으로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잃어버렸다는 충격, 당장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 산업재해로 승인받지 못하고 삼성이라는 자신의 직장과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마음의 상처까지 모두를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과 부모님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며, 인터뷰 내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연 씨는 진료비를 계산하고 나서 그 영수증을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르는 백혈병 치료, 그 비용은 그렇게 그녀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출처: 미디어충청]

“치료비 걱정만이라도 안 하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치료비가 1억 가까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치료비가 들지 끝이 보이지 않아요. 특별히 응급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평균 2주일에 한 번 통원 치료를 받는데, 한 번 병원에 올 때마다 30만 원 정도 들고 와요. 상황이 이러다 보니, 제가 바라는 건 당연히 다시 건강해지는 것이지만, 지금 제게는 치료비 걱정만이라도 안 하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지금 아프지만 않다면 무엇이 하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에 지연 씨는 무척이 막연해 했다. ‘이게 어떤 물음이지?’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가정형편을 걱정하던 한 소녀가 중학생일 때 이미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삼성반도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한푼한푼 아끼며 힘든 노동을 참아왔던 그녀에게 ‘하고 싶은 것’이란 따로 있지도 생각할 겨를도 없었으리라.
그런 그녀의 대답이 “하고 싶은 거……요? ……그런 거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박지연 유죄, 이건희 무죄!

  지난 19일, 근로복지공단은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노동자들에게 '전원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리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출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박지연 씨를 비롯해서, 그 피해 숫자조차 확인되지 않는 이름 없이 사라져간 백혈병 피해노동자가 몸 담았던 반도체산업은 90년대부터 'IT 코리아'라는 구호아래 한국 경제의 수출 대표주자로 인정받아왔다.
지난해에는 ‘반도체의 날’이 제정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그 중 80년대 후반부터 반도체로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대표기업이었다. 이명박 정권 역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폰·조선·자동차산업을 그린(Green)화해 글로벌시장 장악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녹색성장기본법을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그 화려한 겉모습 뒤에 감춰진 반도체노동자들의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너무나 소중한 것들을 희생시켜가면서 얻은 기업들의 이윤과 ‘세계 최고의 경쟁력’, ‘반도체시장 전체의 세계시장 점유률 11.3%(2007년)’ 등의 각종 타이틀이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 것일까. 반도체 산업이 한국경제를 먹여 살렸다면, 그것은 바로 반도체노동자들의 생명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친 대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터이다.

병원에서 유난히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던 그날, 지연 씨는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무척이나 피곤해하는 그녀와 인터뷰를 마치고 가는 차안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의 무죄판결 뉴스를 들었다.
단 61억 원으로 16억 원의 증여세만 내고, 200조 원대의 그룹을 아들에게 넘겨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세상에 알려진 삼성의 천문학적 비자금, 국가기관과 개인들에 대한 전방위 금품로비, 법정증거 및 회계자료 조작 등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세상이 말했다. ‘박지연, 당신은 유죄, 이건희는 무죄!’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미 이 세상은 충분히 잔인했다.

  발병하기 전 지연 씨의 모습이다. 열심히 일해서 가난한 가정형편에 도움이 되겠다던 밝고 건강한 소녀가 삼성반도체에서 일한 죄로 그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출처: 미디어충청]

인터뷰 뒤 이야기

인터뷰를 하던 날, 피검사와 암센터, 그리고 안과 진료를 하면서 지칠대로 지친 지연 씨에게 “지금 아프지만 않다면 무엇이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었다. 그때 그녀는 한 동안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생각해 본적이 없다’며, 몸을 의자 깊숙이 파묻었었다.

며칠 뒤에 지연 씨에게 문자가 왔다.
“마지막에 하고 싶은 거 대답을, 보통 사람들처럼 마스크 벗고 자유롭고 평범하게 일하면서, 먹고 싶은 거 맘껏 먹으면서 살고 싶다…대답 좀 추가해주세요.”

며칠을 고민해서 나온 지연 씨의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영영 이뤄지지 못할 수도 있는 스무 세 살 노동자의 너무나 정당하고 소박한 바람을 삼성이 근로복지공단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 싹부터 짓밟고 있다. (박원종 기자)
덧붙이는 말

-박지연 씨 후원하기~ : 국민은행 489701-01-472635(예금주_ 김재천/삼성반도체대책위)
-헌혈증 보내기~ : (우442-847)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2가 40-4 골든프라자5층, 민주노총 경기법률원 이종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