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도 선생들은 아이들 얼굴을 손으로 때리고 몽둥이를 팼다. 한 겨울에 손등을 자로 때리기도 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땐 단체 기합이 많았다. 누군가 하나 잘못을 하면 반 아이들 모두가 매를 맞거나 걸상을 들고 서 있었다.
▲ <우리들의 스캔들>, 이현, 창비, 2007 |
그 담임 선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아이들은 교실 맨 뒷자리에 앉게 한다. 그곳에서 마음껏 놀라면서 비꼰다. 그 아이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버리고 싶은 쓰레기 보듯 한다. 공부를 안 해도 좋으니 말썽을 피우지 말고 얌전히 학교만 나왔다가 가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행복을 느끼기를 바란다. 물론 중학생은 공부를 해야 할 때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공부는 못 하지만 축구를 잘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공부는 꼭 지식만을 머리에 집어넣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13살 난 내 아이는 지금 대안초등학교인 삼각산재미난학교에 다닌다. 그곳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배운다. 첫째는 스스로 태어난 것을 기뻐하며 자기 목숨이 귀하면 다른 이 목숨도 귀하다는 것. 둘째는 스스로 먹을거리, 입을거리, 잠잘거리를 만들 수 있도록 배운다.
내 아이는 중고등학교도 대안교육운동을 하는 배움터에 다니려 한다. 이렇게 대안학교를 12년을 나와서 스스로 살아있는 것을 기뻐하고 모든 목숨붙이들을 아끼고 스스로 살아갈 힘을 키운다. 근데 그 아이가 이 사회에서 나와서 행복하게 살 수 없다면 그 동안 배운 것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이 사회가 잘못된 것이다.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면 그 사회를 바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갈수록 자연을 더럽히고 돈에 눈먼 세상을 뒤집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교생으로 나오는 사람은 혼례를 치루지 않고 아이를 낳았고 혼자 키운다. 그 일이 알려지자 수업을 못하게 한다. 하지만 그 교생은 교문 앞에서 ‘수업 참관은 교생의 정당한 권리입니다’라고 쓴 손팻말을 든다. 그 모습에서 얼마 앞서 아이들에게 억지로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했다고 쫓겨난 선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학교가 즐겁고 신나게 놀면서 배우는 곳이 되는 날은 언제 올까. 아이들이 배움에 목이 말라 스스로 공부하는 날은 언제 올까. 배울수록 고개를 숙이고 못 배운 사람들을 떠받들며 살아가는 날은 어떻게 맞을 수 있을까.
지금 교육은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이렇게 공부만 잘하는 아이들을 떠받드는 세상에선 아이들이 미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미치지 않으려고 이 책에 나온 아이들처럼 그들만의 비밀 전자 누리방을 만들기도 한다.
잘못된 교육에 맞서는 아이들과 선생이 있어 세상을 조금씩 맑고 밝아진다. 이 책도 그 길에 들어 참 기쁘다.
2009년 2월 17일 일제고사를 반대해서 쫓겨난 선생들을 생각하며 풀무질 일꾼 은종복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