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에이즈 감염인들, 23년 만에 거리에 서다

세계에이즈의 날, HIV/AIDS 감염인들 첫 거리 시위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이정원 기자

"23년 동안 우리는 낙인과 차별로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HIV/AIDS(에이즈)가 발견된 지 23년 만에 감염인들이 처음으로 거리 집회를 열었다. 1일 세계에이즈의날을 맞아 감염인과 인권단체 회원들은 서울 종로 새문안길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치료접근권 보장 등을 촉구했다.

  이정원 기자


  이정원 기자

"23년 전엔 약이 없어 죽고, 지금은 있어도 죽고"

이날 거리로 나선 감염인들은 비록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면을 썼지만, 에이즈가 세상에 알려진지 27년, 한국에서 감염인이 발생한 지 23년 만에 첫 외출이었다.

윤 가브리엘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대표는 "항상 '언제쯤 감염인들이 거리에서 집회를 열 수 있을까'했는데, 23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 집회를 한다"며 "에이즈 환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순간이 너무 감동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윤 가브리엘 대표는 "23년 동안 한국 사회는 많이 변했지만, 에이즈 환자들은 달라진 게 없다"며 "23년 전에는 약이 개발이 안 돼 죽어갔지만, 지금은 약이 있어도 비싸서 사먹을 수 없어 죽어간다"고 감염인들이 처한 현실을 지적했다.

감염인들은 집회를 마친 뒤 정부 주최 세계에이즈의날 공식 기념행사가 열리는 광화문 프레스센터까지 거리 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행진 후 프레스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한때 죽음과 공포의 상징이었던 에이즈는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제때 꾸준히 치료받으면 일상생활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는 만성질환처럼 되었다"며 "그러나 감염인들의 건강권 확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치료제가 제때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감염인 및 인권단체 회원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이정원 기자


  '환자 생명 잡아먹는 복지부는 각성하라', 감염인들이 거리행진을 진행하며 의약품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정원 기자

"강제실시로 감염인 치료접근권 보장하라"

감염인들은 다국적제약회사 로슈가 개발한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의 사례를 언급하며, 제약회사와 한국정부의 행태를 비판했다. 지난 2004년 건강보험에 등재된 푸제온에 대해 로슈는 '약값이 낮다'며 4년 째 국내 시판을 거부하고 있다. 로슈는 현재 푸제온 한 병 당 3만970원을 요구하고 있고, 이를 그대로 수용할 시 에이즈 환자 1인당 연간 약값은 2천200만원에 달한다.

감염인들은 "특허라는 독점을 무기로 제약회사는 근거 없이 비싼 약값을 주장하고 환자들의 의약품 접근권을 막아버려도 한국정부는 속수무책"이라고 지적한 뒤 "감염인들이 복지부에 강제실시를 요구했지만, 복지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며 환자의 건강권을 내팽개치고 있다"고 정부와 로슈를 싸잡아 비판했다.

이들은 "공급거부를 무기로 자신들의 원하는 약값을 챙기는 제약회사를 통제할 수 있도록 강제실시를 통해 치료제의 안정적 공급을 확보해야 한다"고 푸제온 등 제약회사가 공급을 거부하고 있는 필수의약품에 대한 정부의 강제실시를 재차 촉구했다.

한편, 이날 감염인들은 정부 측 공식 기념행사에 참석해 기념식이 열리는 동안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복지부가 주최한 세계에이즈의날 공식 기념행사 도중 감염인들이 단상에 올라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삼권 기자


  에이즈의날 공식 기념행사에서 이종구 질병관리본부장이 전재희 복지부장관을 대신해 축사를 하고 있는 동안 한 감염인이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삼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