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교수 편지를 잘못 이해하신 듯.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니면 삐딱하지 않은 시선으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안철수 교수가 로사 파크스를 언급한 것은 투표권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투표를 하고 싶었지만 못한 여성이라는 표현이 어디 있는지?), 변화를 위한 작은 몸짓, 행동... 그리고 그것을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몽고메리 버스 보이콧)가 결국 큰 변화의 흐름을 가져왔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몽고메리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면, 거기 참여했던 흑인들은 체포와 린치, 해고를 각오했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이 아닌, 수많은 흑인들이 1년 넘게 꾸준히 동참했기 때문에 결국 주정부도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었죠.
차라리 안철수 교수는 박원순 씨를 로자 파크스와 비교하며, 그 당시 흑인들이 버스 승차거부에 동참함으로써 그녀를 지지했듯이, 서울시민들도 (변화를 원한다면) 투표로 참여를 하라고 독려하는 메세지라고 보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요?
(사람들에게 물어보시죠, 어느 쪽의 해석이 맞을지... 희망버스 비교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의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교는 이리 하는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자위하는 꼴이 우스워서...)
게다가, 닥치고 투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기득권이며 투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인지? 투표율이 50%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을 향해 투표를 독려하는 저들에게 '모두가 투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달라'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을 잘못 찾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건 당연히 선관위에 가서 이야기해야죠. 정치권에 가서 이야기해야죠. 그들이 그 시스템을 만들었고 가장 쉽게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아니면, 장애인분들이 선관위에 대해 시위한 것을 가지고 괜히 평소에 본인이 맘에 안들었던 나꼼수를 끌어다가 분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형직/ 이 글의 요지를 잘못 파악하신 것 같은데, 로자 파크스는 투표독려를 요구한 사람이 아니라, 투표를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와 권력에 맞서 싸운 사람이라는 거죠. 로자 파크스를 비유하려면 최소한 김진숙과 했어야 하지 않겠냐는 건데.. 이형직님이야말로 편견없이 다시 잘 읽어보시길....
이형직씨/ 이 글의 요지인즉슨, 정치를 도덕론적 당위로밖엔 못다루는 프레임, '작은 몸짓'들이 사실상 불가능한 여러 수준의 조건들부터 건드려야 "변화"란 말도 공허한 공갈빵 수준을 넘어설 거란 얘기 아닌가요. 안철수씨의 파스크 인용은 이런 점을 환기하는 게 아니라 되려 뭉개버렸단 얘기고. 아무리 인용의 맥락과 해석이야 일단 인용자 맘이라지만, 그에 대한 시비마저 님처럼 신경질적으로 반응해도 되는 건 아니죠. 중요한 지적을 했다면 더더욱 그럴 테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시스템"을 바꾸는 사람들이 그걸 만든 사람들, 그래서 그 시스템으로 재미보는 이들이니 닥치고 투표하란 쪽에 뭐라 하는 게 부당하단 주장이야말로 참 어이없는 소리군요. 무늬만 어설프게 바뀌면, 특권화된 상황 자체는 냅두고 그 특권의 확장만 이뤄지면 되고, 그럴 수 있다고 여기시는 모양인데.. 역사적의 의미심장한 변화/사건들 중에 시스템을 만든 이들이 시스템상의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선 적이 있었던 가요? 스피노자 아저씨가 "무지는 주장이 아니다"라고 했던데, 남한테 잘난 척 말라고 하기보다 그런 자격지심 안 들게 스스로 좀 안다는 교양과 상식부터 확실히 점검하는 게 먼저 같네요. 중요한 지적에 님같이 신경질 내면, 정치가 중차대한 변화의 계기들을 여는 게 아닌 볼거리용 자위행위 되는 건 순식간이죠. 최소한 난 이명박들 따위완 달라 정도로 정치적 알리바이를 만드는 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치의 최대치라 여기시는 모양인데, 사실이 이러하다면 적어도 당분간 닥쳐야 할 쪽은 이형직씨 같은 모범[애국?]시민 아니겠냔 겁니다.
그런 줄이나 알고서 좀 짜증을 내고, "객관성"이니 "의도" 운운하셨음 해요. 솔직히 다 필요 없고, 이건 뭐 하자는 삽소리 메들린가 싶은 심정입니다만.
권영숙 씨. 사안의 폐부를 관통하는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기 '정정 필요한 듯 님'의 지적대로 "안철수의 편지가 잘못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칼럼도 그 사건을 잘못 이해하는 듯" 합니다. 글의 종결어, "비교는 이리 하는 것"이라는 오만한 문장은 참 눈살이 찌푸려지는군요.
투표권 없다 .......
투표권은 고엽제 파묻는 유태자본 에게 있다.
이런 편가르는 나쁜투표는 거부한것이 옳은
선택이란다
215만 25.6-7% 에서 진보당 몇개당인데
나경원 지옥에서 잘싸운거다
나경원 내가 그냥 댓글로 뽑아서
각성 [覺醒]해라 하고 지옥 보낸거니까
ㄱ날 당일날 나쁜 투표거부운동했거든
박원순 겨우 이긴거재
안철수 조국 이준구등 폴리페서로 묻어버렸재
내가
경제도 모르는놈이 교수하고
법도 모르는놈이 법대교수하고
여기 신문사 기사댓글이 업다
그저 간혹 게재되기도 하지만
특히 신문사 기사댓글 쓰는 자들은
인터넷이용자률에서 1%-2% 정도 이다
아무도 말들여놓지 않은 이쪽에서
글을 쓰고 있다.
안철수 교수 편지를 잘못 이해하신 듯.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니면 삐딱하지 않은 시선으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안철수 교수가 로사 파크스를 언급한 것은 투표권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투표를 하고 싶었지만 못한 여성이라는 표현이 어디 있는지?), 변화를 위한 작은 몸짓, 행동... 그리고 그것을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몽고메리 버스 보이콧)가 결국 큰 변화의 흐름을 가져왔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몽고메리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면, 거기 참여했던 흑인들은 체포와 린치, 해고를 각오했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이 아닌, 수많은 흑인들이 1년 넘게 꾸준히 동참했기 때문에 결국 주정부도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었죠.
차라리 안철수 교수는 박원순 씨를 로자 파크스와 비교하며, 그 당시 흑인들이 버스 승차거부에 동참함으로써 그녀를 지지했듯이, 서울시민들도 (변화를 원한다면) 투표로 참여를 하라고 독려하는 메세지라고 보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요?
(사람들에게 물어보시죠, 어느 쪽의 해석이 맞을지... 희망버스 비교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의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교는 이리 하는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자위하는 꼴이 우스워서...)
게다가, 닥치고 투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기득권이며 투표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자들인지? 투표율이 50%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을 향해 투표를 독려하는 저들에게 '모두가 투표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달라'고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을 잘못 찾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건 당연히 선관위에 가서 이야기해야죠. 정치권에 가서 이야기해야죠. 그들이 그 시스템을 만들었고 가장 쉽게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아니면, 장애인분들이 선관위에 대해 시위한 것을 가지고 괜히 평소에 본인이 맘에 안들었던 나꼼수를 끌어다가 분풀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암튼, 생각은 자유라지만, 적어도 객관적 사실하에 글을 썼으면 좋겠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런글이 많이 실렸으면 좋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런글이 많이 실렸으면 좋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런글이 많이 실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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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직/ 이 글의 요지를 잘못 파악하신 것 같은데, 로자 파크스는 투표독려를 요구한 사람이 아니라, 투표를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와 권력에 맞서 싸운 사람이라는 거죠. 로자 파크스를 비유하려면 최소한 김진숙과 했어야 하지 않겠냐는 건데.. 이형직님이야말로 편견없이 다시 잘 읽어보시길....
이형직씨/ 이 글의 요지인즉슨, 정치를 도덕론적 당위로밖엔 못다루는 프레임, '작은 몸짓'들이 사실상 불가능한 여러 수준의 조건들부터 건드려야 "변화"란 말도 공허한 공갈빵 수준을 넘어설 거란 얘기 아닌가요. 안철수씨의 파스크 인용은 이런 점을 환기하는 게 아니라 되려 뭉개버렸단 얘기고. 아무리 인용의 맥락과 해석이야 일단 인용자 맘이라지만, 그에 대한 시비마저 님처럼 신경질적으로 반응해도 되는 건 아니죠. 중요한 지적을 했다면 더더욱 그럴 테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시스템"을 바꾸는 사람들이 그걸 만든 사람들, 그래서 그 시스템으로 재미보는 이들이니 닥치고 투표하란 쪽에 뭐라 하는 게 부당하단 주장이야말로 참 어이없는 소리군요. 무늬만 어설프게 바뀌면, 특권화된 상황 자체는 냅두고 그 특권의 확장만 이뤄지면 되고, 그럴 수 있다고 여기시는 모양인데.. 역사적의 의미심장한 변화/사건들 중에 시스템을 만든 이들이 시스템상의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선 적이 있었던 가요? 스피노자 아저씨가 "무지는 주장이 아니다"라고 했던데, 남한테 잘난 척 말라고 하기보다 그런 자격지심 안 들게 스스로 좀 안다는 교양과 상식부터 확실히 점검하는 게 먼저 같네요. 중요한 지적에 님같이 신경질 내면, 정치가 중차대한 변화의 계기들을 여는 게 아닌 볼거리용 자위행위 되는 건 순식간이죠. 최소한 난 이명박들 따위완 달라 정도로 정치적 알리바이를 만드는 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치의 최대치라 여기시는 모양인데, 사실이 이러하다면 적어도 당분간 닥쳐야 할 쪽은 이형직씨 같은 모범[애국?]시민 아니겠냔 겁니다.
그런 줄이나 알고서 좀 짜증을 내고, "객관성"이니 "의도" 운운하셨음 해요. 솔직히 다 필요 없고, 이건 뭐 하자는 삽소리 메들린가 싶은 심정입니다만.
로자 파크스 사건은 단순히 선거권에 대한 흑인의 배제가 아니라, 흑인과 백인을 전 사회체계가 차별화하는 것에 대한 저항운동. 안철수의 편지가 잘못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칼럼도 그 사건을 잘 못 이해하는 듯.
골방에 않아 있는 우물안개구리가
천하의 앞날을 내다보는
안선생의 지략을 따라올수 있겠느냐 ?
참 안타까운 사람이로고....
권영숙 씨. 사안의 폐부를 관통하는 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기 '정정 필요한 듯 님'의 지적대로 "안철수의 편지가 잘못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칼럼도 그 사건을 잘못 이해하는 듯" 합니다. 글의 종결어, "비교는 이리 하는 것"이라는 오만한 문장은 참 눈살이 찌푸려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