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력으로 신년 연휴가 끝날 무렵 이란 민중들은 흰색 스카프를 흔들면서 거리를 채웠다. 2011년 2월의 반정부 시위 이후 처음으로 거리를 가득 메웠다. 4월 2일 스위스 로잔으로부터 핵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란력은 춘분을 기준으로 이란 ‘테헤란의 정오’를 기준으로 1월 1일이 시작된다. 핵 협상 타결이 봄과 함께 온 것으로 믿었던 이란 민중들은 거리를 누비면서 해방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이 해방감은 현실로 실현될 수 있을까?
이란 핵 협상은 중동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이란 핵 협상 타결은 이란을 테러 지원국가에서 ‘보통국가’로 돌아오는 길을 열게 된다. 경제 봉쇄가 풀리게 되면 오일 수출은 2배로 늘 것이고 제조업도 다시 정상 가동되면서 이란은 중동의 맹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수니와 시아의 갈등이 있는데도 이란이 중동의 맹주로 자리 잡는 것이 가능할까? 또 경제 봉쇄가 풀리면 이란에도 민주주의가 가능해질까? 핵 협상 타결을 보는데 이 두 가지를 중점으로 한번 볼까 한다.
제다이의 귀환? 제국의 역습?
이슬람권에서 수니와 시아의 갈등은 주류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만큼 심각하지 않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을 때 강대국들은 이란 이슬람 혁명의 전파를 두려워하였다. 자, 생각해보자. 수니와 시아가 건널 수 없는 강이라면 왜 이란 이슬람 혁명이 수니파들이 다수인 이슬람 지역으로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수니 이슬람과 시아 이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슬람이라는 공통점이지 수니와 시아의 차이가 아니다. 수니와 시아의 갈등은 국내외 지배자들이 조장한 것이다. 수니파 주도의 반미 정부를 시아파 주도의 친미정부로 갈아치운 후 ISIS라는 괴물을 만난 이라크의 예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국과 중동의 지배계급들이 지배를 위해서 수니와 시아의 갈등을 조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란은 이슬람의 자존심이다. 중동, 페르시아, 터키 지역이 서구의 침입을 받기 시작한 이후 200여 년간 어느 이슬람 국가가 이렇게 서구의 국가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대등하게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는가?
오일 이외에 별 다른 산업이 없는 다른 중동 국가들과 달리 이란은 제조업이 GDP의 40%를 넘게 차지하는 국가로, 식량에서부터 자동차까지 거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한다. 오일을 잇는 2위 산업은 제조업의 꽃인 자동차로 GDP의 10%를 차지한다. 자동차 산업의 수준은 차와 엔진을 디자인할 수 있으며 부품 자급률은 85%에 도달했다는 것을 5-6년 전의 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이란은 사회안전망으로만 보면 한국보다 훨씬 나은 국가이다. 이란인의 73%는 사회안전망 안에 있다. 이란인들은 20년간의 경제 봉쇄 속에서 이렇게 지속시켜온 자신들의 경제를 ‘저항경제(Resistance Economy)’라 부르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베네수엘라 경제 모델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이란 경제 모델이다. 석유에서 제조업으로 산업기반을 옮겨가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자존심만으로 경제 봉쇄를 뚫는 것에 한계가 있다. 2014년 8월, 46명의 사상자를 낸 이란 항공기 추락 사고는 정비부품이 부족하고 신규 항공기 도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생긴 것이다. 생필품 물가도 계속 오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 테헤란은 핵 협상 타결 전후로 투자 기회를 잡기 위해서 밀려드는 외국인들로 미어터지고 있다고 한다. 이란은 이미 수니파 이슬람 국가의 터키에 안정적으로 가스를 공급하고 관광 교류를 하면서 터키를 녹여버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더러운 돈을 받아서 와하비즘을 보급하면서 탈레반의 인큐베이터가 되었던 파키스탄도 녹여버렸다. 이란에서 나오는 오일과 가스를 중국으로 공급하는 경로를 파키스탄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공격에 파키스탄의 참전을 요구했으나 파키스탄은 민주적일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자신들의 의회를 열어 ‘민주적’으로 거절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이란 핵 협상 타결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다. 이들이 이란 핵 협상 타결에 반대하는 전제는 같다. 이란 핵 협상이 성사되고 나면 이란은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는 것이다.
▲ 24일 이란 대표단과 P5+1 그룹(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핵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이란 프레스티비] |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 핵 협상이 타결되면 자신들도 핵을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우디아라비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라. 이란 핵 협상의 전제는 이란이 NPT(핵확산금지조약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에 따라서 핵사찰을 받는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겠다는 것이 확인되면 경제 봉쇄를 푸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핵개발을 하겠다면 이란과 똑같은 사찰을 받아서 핵 개발을 진행하면 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핵무기를 개발하면 핵사찰을 받게 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를 봉쇄하면 된다. 그 뿐이다. 핵개발은 이란과 이북을 제외하고는 지구 상 어느 나라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 핵 협상이 타결되면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니 우리도 핵(무기) 개발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와하비즘으로 똘똘 뭉친 무식하고 야만스러운 왕정국가예요라고 스스로 얼굴에 침 뱉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더 황당하다. 이스라엘은 400개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한 번도 핵사찰을 받은 적이 없다. 이란은 지난 10년간 7,000여 회의 핵사찰을 받았고 현재로서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선거 직전 자기가 당선이 되면 팔레스타인 국가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선거 당일에는 좌파들이 아랍인들을 투표장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는 인종주의적 발언을 하여 4선 총리가 되었다. 이런 선동으로 네타냐후 같은 인간이 4선 총리가 되었다면 이스라엘의 문제는 네타냐후 같은 강경파 정치인의 문제가 아니라 네타냐후를 4번이나 당선시켜준 다수의 이스라엘 국민들이 문제라고 보면 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에게는 이란의 보통국가화는 제국의 역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중동의 민중들에게는 이슬람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제다이의 귀환으로 보일 것이다.
눈먼 부엉이는 거리로 나올 것인가?
이란 내부 상황을 한번 보자. 이란의 경제 봉쇄가 풀리면 해빙모드가 와서 이란에게도 ‘서구식 민주주의’의 물결이 흘러 들어올까?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란 민중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너무나도 처절하고 비극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모든 서구음악은 금지되었다. 이슬람 혁명 이전의 테헤란 거리에는 영미의 팝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한 때 영국 노동당 선거 지원을 하기도 했던 ‘나름 좌파 밴드’인 클래쉬는 1982년 노래 ‘Rock the Casbah’를 발표해서 이에 대해서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마호멧의 후손들이 싫어한다고. 이슬람 도시를 엎어버리자”(The Shareef don't like it. Rock the Casbah)” 그러나 록 음악이 거리에 흘러나오던 샤 치하의 이란은 끔찍한 곳이었다. 시위하는 군중들을 거리에서 총으로 학살하는 나라였다. 이란 혁명을 비판한 대표적인 텍스트인 마르안 샤트라피의 만화 <페르세폴리스>는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고 국내에도 번역이 되었다. 이란 혁명이후 좌파집안이었던 자신의 집안이 어떻게 몰락했으며 자신은 왜 프랑스로 보내질 수밖에 없었던가를 슬프게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절반의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이란 혁명이후 성직자들은 이란 이슬람 혁명을 같이 일으켰던 좌파들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린 후 끔찍할 정도의 신정 체제를 들어서게 한 것은 이 책이 들려주는 절반의 진실이다. 그러나 당시 록 음악을 듣는 것은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다. 샤 치하에서 절대 다수의 민중들은 고통과 공포 속에서 살고 있었다.
클래쉬의 ‘Rock the casbah’는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발표되었다. 이 노래는 아랍군주국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라크와 동맹국 하나 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던 이란 민중의 염원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개망나니 애들 노름이었다.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세운 정권은 독재정권이었지만 자신들이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세운 정권이었고 민중들은 샤 치하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폭탄이 떨어지고 있던 나라를 향해서 이슬람 도시를 엎어버리자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서구의 민주주의인가? 이란 민중들만이 가지고 있는 고통을 믿지 못하고 이슬람 혁명을 정신 나간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이 서구의 민주주의인가?
십년이 넘는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자유주의 정치 세력도 탄압에 의해서 씨가 말라버렸다. 좌파라고 하는 이들 중 살아남아서 해외로 빠져나가 재기를 노린 이들은 미국 편에 서서 이란 핵무기 개발을 폭로했고 이란을 경제 봉쇄에 밀어넣은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란에서 좌파는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지금의 최고 성직자인 하메네이는 전쟁이 끝난 후 이란 대통령을 역임하다가 최고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마호멧의 직계자손인 사이드(Sayyid)만이 두를 수 있는 검은 터번을 하고 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보내준 돈으로 와하비즘을 사육 받고 미국의 지원을 받다가 칼리프 국가를 만들겠다는 외치는 괴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단순한 성직자가 아니다. 실제 정치에서도 최고 통치자 경험을 해본 최고 성직자이다. 그의 권력은 의회보다도 행정부 보다 위에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지만 그는 조금씩 조금씩 이란에게 제한된 자유를 허용하면서 노련하게 국정을 통제한다. 여성대사를 임명했고 경기장에 여성들의 입장을 허가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란은 호메이니의 나라가 아니다. 몇 년 전 호메이니의 손녀가 페이스북에서 우리는 다양한 색채의 혁명을 원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란에는 데스메탈 밴드들이 있다. 정부에 의해 사탄 밴드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활동을 한다. 이란의 성직자들과 정치가들은 통치에서 있어서 중동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아주 유연하다. 현재 테헤란 거리에서는 다시 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이란의 신흥자본가계급들과 중산층에게 주는 보상 같은 것이지 서구식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란의 산업지역은 테헤란에 집중되어 있다. 테헤란에 사는 것만으로도 중산층 분위기를 누릴 수 있다. 테헤란에는 좌파 더 나아가 자유주의자들까지 말살한 후, 노련하게 정치를 운영할 줄 아는 신정정치론자들의 떡밥이 흘러 다니고 있다.
이란 핵 협상 타결이후 이란의 경제 봉쇄가 풀리면 삶의 변화가 오면서 이란의 정치는 바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치지형은 클래쉬 따위가 생각하는 민주주의, 이슬람 도시를 엎어버린 후 이란 민중이 모두 록 음악을 자유로이 들을 수 있는 민주주의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로자데크 헤다야트가 직접 그린 부엉이 |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눈 먼 부엉이>의 작가인 로사데크 헤다야트가 꿈꾸었을지 모르는 이란의 민주주의이다. 로사데크 헤다야트는 이란을 대표하는 현대 소설가로 고대 페르시아 문헌을 현대 페르시아로 옮겼고 카프카를 번역했고, 석유 국유화를 주도했던 이란의 공산당인 투데당에 공명해서 활동했다. 그의 삶은 근대화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이란에서 페르시아인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뇌와 고통의의 과정이었다. <눈 먼 부엉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독실한 이슬람이 받아들이기에는 지금도 힘든 텍스트이다. 거룩한 이슬람 모스크의 아침 찬팅과 링감사원(*링감-힌두 시바신의 성기를 모시는 사원)의 무희들의 춤 사이를 오가면서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한 텍스트이다. 아마도 이 텍스트는 인간이 빛과 어둠 사이에 살고 있다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 문화의 근대적인 표현일수도 있겠다. 근대를 살고 있기에, 자신의 삶이 고통의 바다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이 책에서 위로 아닌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인도에서 1937년-1939년 사이에 쓴 <눈 먼 부엉이>를 내고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그는 1945년 <눈 먼 부엉이>가 프랑스에서 번역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49년 투데당이 샤 암살 사건으로 해체된 후 그는 카프카를 번역하다가 1951년 파리에서 자살했다. (이후 묻혀버릴 수 있었던 그를 다시 발굴한 것은 소련의 페르시아 연구자들이었다.) 그의 작품은 이란에서는 1993년 해금되었다가 다시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란 내에서는 특권층인 이란 학자들은 그에 대한 연구는 자유로이 하고 국제 저널에 글을 싣는다.
근대의 문제, 기존에 내려오는 공동체적인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맨 정신으로 세속적인 삶과 대결해야 하는 문제와 싸우기 위해서 헤다야트는 고대 페르시아 문헌을 현대 이란어로 번역하면서 이슬람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신들의 뿌리를 추적하고자 했고, 완벽하게 세속적인 좌파에 깊이 공감했었다. 투데당 해산 이후에는 카프카를 번역했고 그가 생에 마지막으로 적은 글은 카프카에 대한 것이었다. 헤다야트가 했던 고민들이 이란의 민주주의 발전에 반영이 되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헤다야트의 책들이 해금되어 학자들의 책장이 아닌 거리에서 언제쯤 볼 수 있는가를 기다려보자.
갈등은 진행 중...그러나 봉쇄는 풀려 나갈 것
핵 협상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란은 핵 협상이 타결되는대로 전격적인 경제 봉쇄를 풀 것을 요구하지만 오바마는 “나는 라이플을 두고 협상을 진행한다”고 이미 으름장을 놓고 핵 협상 타결에 들어갔었다. 미국은 이후 핵 사찰 과정과 결과에 따라서 경제 봉쇄를 단계별로 풀겠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은 드디어 무리한 요구를 했다. 이란의 군사 시설 어디라도 사찰하게 해달라고 했다. 이는 국가 주권의 문제이다. 이란혁명수비대는 이에 대해서 즉시 격렬하게 반대를 했다. 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는 공감할 것이 있다. 이란이 지금 서구와 동등하게 테이블에 서서 이런 과장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서구가 이란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란이 원하는대로 경제 봉쇄를 전면적으로 바로 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이란의 경제 봉쇄는 조금씩이라도 계속 풀려나갈 것이다.
p.s.
사족은 절대 아니지만 사족의 형태로 하게 되는 이야기.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하면 글이 꼬일 것 같아 꺼내지 못 했다. 이란은 경제 봉쇄가 풀리고 나면 핵발전소를 꼭 지어야 하나? 핵의 위험을 생각한다면 핵의 평화적 이용 따위는 없다.
* 참고자료
정호영, 2015.1.5, [국제포럼] 이란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 – 이란 핵 협상 결과와 이란-중국-남아시아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