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민주연대, 필리핀이주노동자연합 등 단체가 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한국수출입은행 앞에서 한국이 지원하는 필리핀 할라우강 댐사업에서의 인권침해를 규탄하는 국제공동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국제민주연대가 속한 기업인권네트워크는 해외투자 한국기업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국제민주연대에서 활동하는 필자는 작년 여름 실태파악을 위해 필리핀으로 열흘간 현장조사를 다녀왔다. 봉제·섬유, 전자산업 등 사기업이 주로 방문지가 되었으나 이번 방문에는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지어질 할라우강(Jalaur River) 다목적 댐사업 현장도 다녀왔다.
2억 달러 규모의 대외협력기금(EDCF)으로 지원될 할라우강 다목적 댐사업은 국내에는 많이 알려진 이슈가 아니다. 그러나 막상 현장을 가보니 문제가 심각했다. 일로일로주(IloIlo) 할라우강 일대는 고유한 생활방식과 문화를 가진 선주민(Indigenous People)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댐이 지어지면 선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 3개가 완전히 잠기고 10개 마을에 영향을 미치는 등 17,000여 명이 영향을 받게 된다. 이들은 논·밭 과실수 등의 생계기반을 잃은 채 이주를 해야 하는 처지이지만 이에 대한 보상도 막연한 상황이며, 무엇보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땅을 떠나길 원치 않는다.
필리핀 정부에서는 선주민 문제를 다루는 선주민청(NCIP: National Commission on Indigenous Peoples)이 존재하고, 대규모 개발사업을 실시하기 전에 ‘선주민의 사전 동의FPIC(FPIC: Free Prior and Informed Consent)’ 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사업추진과정에서 사전 동의 절차를 포함하여 선주민들의 권리는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할라우강 일대는 활성단층 지진대(active fault-line)가 지나는 지질학적으로 불안한 지역으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면 엄청난 규모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관련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이렇게 사업을 강행할 경우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서 이미 1970년대에 세계은행이 할라우강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중단한 사례가 있는데도 수출입은행은 할라우강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래서 국제민주연대는 현지에서 진행 중인 칼리카산 구제명령(Writ of Kalikasan)이라는 환경권 관련 소송에 한국 시민 사회 의견서를 필리핀 법원으로 보냈다. 또한 수출입은행에도 몇 차례 질의서를 보내고 면담도 가졌다. 수출입은행도 제기된 문제들을 잘 알고 있고, 필리핀 정부의 조치 없이는 건설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아직까지 본격적인 댐건설이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댐건설을 위한 진입로 건설 등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주민들 일부는 이미 이주를 시작했지만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업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현지 주민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는 것이다.
▲ 할라우강 댐 도수로진입로 건설현장. [출처: 국제민주연대] |
한국 정부는 개발원조로 개도국의 경제발전을 돕고 양국 관계의 진전을 도모한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젝트가 지역민들의 삶과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도 과거 개발원조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 영향들을 불가피한 부작용으로 인식했지만, 이제는 이를 최소한도로 줄이고 예방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수출입은행도 자체 세이프가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고 주장하지만, 3년이 지난 현재까지 확정된 세이프가드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할라우강 다목적 댐 공사 입찰을 재촉하는 한국 기업이 많다는 얘기가 들린다. 정부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사업에 참여해 수익을 쉽게 올릴 수 있을 거란 기대만 있을 뿐 명백한 인권침해, 환경침해에 대한 위험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OECD가입국가로서 원조개발사업은 물론이고 OECD의 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에 따라 한국기업들은 기업활동에 있어 인권과 환경을 존중할 의무를 가진다. 현재 상황만 두고 본다면 한국 정부와 기업은 원조개발사업이란 미명하에 인권과 환경침해를 자행했다는 국제적인 비난만 받을 것이 뻔하다. 수출입은행과 한국 정부가 원조개발기금을 쓰고도 욕먹는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인권 및 환경기준에 준하여 사업을 집행해야 할 것이다. 사업성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원조개발사업의 과정에서부터 모범 사례를 만들어 가려는 정부의 인식전환이 시급하다. 4대강 사업의 실패를 원조란 이름으로 필리핀에서 되풀이해선 안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