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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혐오로 도전받는 인권도시, 사상누각에 불과했나

[기고] 인권에 대한 '행정편의적' 사고, 알맹이 없는 인권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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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각 지방자치단체에 인권조례 제정을 권고한 이후 인권조례는 트렌디한 상품이 되었다. 인권증진이 국가의 책무라고 할 때, 지방자치단체의 인권조례 제정 움직임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반짝 회자하거나, 값 좋은 상품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만 같아 씁쓸한 마음이 동시에 든다.

인권조례가 유명무실하게 방치된 곳도 많아, 인권전문가들은 인권조례를 제정하는 과정부터 주민들과 소통하고 참여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인권조례가 제정된다고 지역 주민들의 인권의식이 자연스럽게 높아지거나,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을 알아가거나, 함께 살아가는 주민으로서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인권조례는 그 결과보다 제정과정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권재단에서 발행한 <2014 한국 인권도시백서 연구>에 따르면 2014년 8월 기준으로 인천, 대구, 세종시를 제외한 모든 광역자치단체에 인권기본조례가 제정되었다. 기초자치단체로는 2001년 부산시 해운대구에서 인권증진조례를 제정한 이후, 약 52개의 자치구에 인권(기본)조례가 제정된 상황이다.

인권조례와 달리 인권헌장은 인권규범으로서 ‘인권도시의 미래 청사진이자 실천규범’ 역할을 하며, 보통 시민의 권리뿐만 아니라 책임 그리고 시 당국의 책무에 관한 내용까지 포함한다. 광역단위로는 광주인권헌장이 2012년 5월 21일 선포되었고, 2014년 10월 충청남도가 도민 인권보호 증진 인권선언을 선포하였다. 서울시민인권헌장이 세 번째다. 기초단위로는 서울시 성북구가 2013년 12월 10일 성북주민인권선언을 선포하려다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반발로 선포식 진행 자체를 하지 못했다.

  지난 11월 20일 서울시민인권헌장 공청회는 동성애 반대단체의 조직적 방해로 난장판이 됐다.

인권헌장이 제정되는 과정은 대개 비슷하다. 충청남도는 2013년 6월부터 선언문 작성위원회와 인권선언 도민참여단을 연령대별로 105명을 구성한 뒤 인권헌장 제정 작업을 진행하였다면, 성북주민인권선언도 2013년 3월 주민참여단 134명을 위촉해 제정 작업을 진행하였다. 주민참여단에는 구의원, 성북구 인권위원회, 일반주민으로 구성되었다. 서울시민인권헌장 추진과정도 비슷하다. 거주 지역별, 연령대별로 150명의 시민위원을 선정하였고, 35명의 전문위원, 서울시의원 3명,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 190명을 위촉했다. 이들의 자발적 참여 속에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과정이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것이다.

<지방자치단체 인권헌장, 선언문에 반영된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

광주인권헌장

제12조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이 존중되는 도시
모든 시민은 피부색, 종교, 언어, 출신지역, 국적, 성적지향 등에 관계없이 자신의 문화를 향유하고 자신의 종교를 표명하고 실천하며 자신의 언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

성북주민인권선언

제1조 평등
성북 주민은 성별, 나이, 외모, 장애, 인종, 종교, 병력(病歷), 사상, 신념, 출신 및 거주지역, 결혼여부, 가족구성, 학력, 재산, 성적지향, 국적, 전과(前科), 임신․출산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제16조 성소수자
성북구는 성소수자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

충남도민인권선언

제1조 차별금지의 원칙
① 충남도민은 성별, 나이, 외모, 장애, 인종, 종교, 병력(病歷), 사상, 신념, 출신 및 거주지역, 결혼여부, 가족구성, 학력, 재산,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국적, 전과(前科), 임신, 출산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첫 번째는 성북주민인권선언 채택과 선포과정이다. 성북주민인권선언은 많은 갈등 속에서 출발했는데, 그 요인이 됐던 문안은 다음과 같다. “성북구는 성소수자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며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개선 등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성북주민인권선언 최종안에는 성소수자 조항을 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선만 다하고 적극적 노력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물론 성소수자 독립조항이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13년 12월 10일 성북주민인권선언 선포일에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방해로 선포식 자체가 어려웠던 그 자리에 있었던 나로서는, 성북주민인권선언이 과연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뒤늦은 논란, 광주인권헌장에 포함된 성적지향 조항이다. 광주기독교교단협의회가 11월 27일 <조선일보>에 "'광주인권헌장'의 동성애 관련 내용을 제외하라"는 광고를 실었다. 광주학생인권조례 20조에 적혀있는 "학생은 성별, 종교, 민족, 언어, 나이, 성적지향, 신체조건, 경제적 여건,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한 대우와 배움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라는 조항도 문제 삼았다. 다행히 광주인권회의가 12월 1일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며 이러한 시도를 규탄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의견수렴과정을 최소화하며 인권헌장을 제정한 광주광역시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세 번째는 서대문구 인권조례 제정과 퀴어문화축제 방해세력에 대한 대처를 볼 필요가 있다. 서대문구는 서울지역에서 주민도 모르게 인권조례를 제정했던 다른 자치구와 달리, 구의원, 인권전문가들이 참여한 조례제정위원회(이하 위원회)를 구성해, 나름대로 절차를 거쳐 인권조례를 제정하였다. 인권중심 사람 박래군 소장이 인권전문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례에 의거 인권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하지만 서대문구는 2014년 6월 연세로에서 개최된 퀴어문화축제를 혐오세력의 압력에 밀려 행사승인 취소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서대문구 인권위원회는 “교통통제 및 행사승인 취소를 철회”하여 “퀴어문화축제의 진행을 보장”하고 “앞으로 성소수자임을 이유로 한 행사불승인 등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할 것”을 권고하였지만, 인권위원회 권고는 수용되지 않았다. 서대문구는 지금까지 묵묵부답이다.

네 번째는 2013년 성북구 주민참여예산으로 선정된 ‘청소년 무지개와함께 지원센터’ 예산의 불용위기다. 이 사업은 위기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상담과 인식개선을 위한 활동으로, 총 5900만 원이라는 예산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2014년 주민참여예산위원으로 참여한 분은 이 사업을 불용시키기 위해 위원으로 참여했다고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성소수자 혐오세력은 성북구에 동성애 상담소가 들어온다며, 구청 항의, 구정협의 철회 등으로 성북구를 압박해왔다. 담당 팀인 청소년여가팀과 인권팀, 구청장 면담 등을 수차례 진행해왔고 예산이 불용되지 않기 위해 사업변경을 협의하고 논의해왔지만, 2014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도 이 사업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언급했지만,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온 인권도시 흐름이 성소수자 혐오세력에 의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주민참여예산으로 배정된 사업조차 ‘예산낭비’로 취급하는 등 이들의 막무가내 행동은 도를 지나쳤다. 이미 제정된 광주인권헌장이나 충남도민인권헌장이 이후 어떤 공격을 받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12월 1일 6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기자회견을 통해 인권헌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서울시를 규탄하고, 인권헌장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출처: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그렇기에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좌초위기가 서울시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미치게 되는 영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혐오를 정면 돌파하지 못한 인권행정은 인권조례, 헌장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눈치 보기, 타협과 협상의 대상이 되는 인권이란 결국 선거 때 반짝 등장하는 ‘사람 중심’이라는 구호의 포장지 역할만 할 뿐이다. 포장지를 뜯으면 알맹이가 없다. 앞다투어 최초의 인권도시를 만들어보겠다는 지방자치단체의 포부는, 보편적 가치의 인권을 ‘행정편의적’으로 사고해 인권 그 자체를 훼손시키고 있다. 기둥이 튼튼하지 않은 인권도시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2014년 한국 인권도시백서에서는 <인권도시의 도전과 과제>로 네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 아래로부터 시민적 참여를 통한 민주적 인권 거버넌스의 중요성, 둘째 인권도시 실현을 위한 법적 근거와 정당성 확보, 셋째 인권교육을 통한 인권문화 확산 정착, 넷째 인권도시 사업의 지속가능성 보장 등이다.

하지만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과정에서 드러난 서울시의 태도는 네 가지 도전과 과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구성된 시민위원회의 결정을 서울시가 비민주적인 판단으로 뒤엎었다. 또한 인권도시 실현 과정에서 법을 제대로 만들어서 불필요한 긴장과 갈등이 없어졌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권을 합의와 타협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그 법들조차 쓸모없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항문성교 알려주는 인권교육 폐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굴복한 지금의 상황에선 인권문화가 과연 확산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인권도시를 추진하는 정치세력들은 마치 보수정권이 집권하면 인권헌장이 폐기될 거라며 지속가능성의 위기를 말하지만, 이번 제정과정은 지속가능성의 위기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드러냈다.

따라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자치행정 중심으로 추진해왔던 인권도시 추진계획이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에게 도전받고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서울특별시, 서울시 성북구, 광주광역시, 충청남도 등은 인권을 위협하는 세력과 그 어떤 내용도 협의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선언을 해야 한다. 적어도 인권도시를 추진하겠다면 말이다.

혐오는 성소수자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서울시민인권헌장에 성소수자 권리를 명시하는 데 반대한 혐오세력들은 이제 마포구와 대학가 일대를 동성애자들의 도시로 계획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며 서울도시계획헌장을 반대할 준비를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라는 구호 아래 다문화와 차별금지법을 연결하면서,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행동으로 이어가고 있다. 이렇듯 혐오가 인종, 성별, 나이, 장애 등으로 확대되리라는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고, 이는 사사건건 인권도시 추진에 발목을 잡을 것이다.

인권도시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혐오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서 빠져 있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시민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만들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인권조례나 인권헌장 제정과정이 지역주민, 시민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권도시는 과연 누구의 힘으로 만들어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