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가자 혹은 서안지구에 집중되었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하고 다양한 폭력이 주를 이루었다면, 올 여름 2400여명의 희생자를 낳았던 가자 침공 이후 동예루살렘(서예루살렘은 주로 이스라엘인들이 살고 있다)을 포함한 이스라엘 내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차별적 법제화의 움직임, 공공연한 폭력은 도를 넘었다고 할 만큼 거세어지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금의 상황을 ‘우리(유대국가)의 영원한 수도인 예루살렘을 위한 전쟁’이라고 공표하기도 했다. 새로울 것도 없지만 덧붙여 ‘시오니스트의 역사는 늘 테러리즘이 우리를 뒤따랐다’라는 부끄러움없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시오니즘과 동예루살렘
시오니즘(Zionism)이란 19세기 후반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유대 민족주의 운동이다. 예루살렘의 중심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에 유대인만의 민족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며, 그 목표를 향한 다양한 실천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진행중이다. 이것이 특히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집착하는 큰 표면적 이유이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유대인이라면 시오니즘을 거부해야한다는 움직임도 유대교 내부에 존재한다.
이스라엘은 늘 억울해하며 국제사회에 서운함을 내비친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증명된 핍박받고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역사를 외면하냐고. 당신은 반(反)유대주의자이냐고. 하지만 이는 비겁한 시오니스트의 변명이다. 이스라엘은 종교의 탈을 쓴 식민국가일 뿐이다.
동예루살렘은 1967년 전쟁으로 요르단의 통치 하에 있다 이스라엘에 병합이 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인구조사를 실시하며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영주권을 주었으며,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난민이 되었다. 한결같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영원한 수도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1947년 유엔분할안에서 예루살렘은 국제관리지역으로 결정이 되었다.
2009년 유엔 총회에서 역시 이스라엘의 이같은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 해 채택된 결의안 63/30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과 이스라엘 법의 적용, 재판권과 집행과 같은 이스라엘의 모든 행위가 불법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주장은 무효임과 동시에 법적 효력이 없으며, 불법적이고 일방적인 모든 행동들을 즉각 중단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안전보장이사회를 포함한 유엔은 제 4차 제네바 협약에 의해 동예루살렘을 점령된 지역이라고 지속적으로 재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수많은 유엔의 권고안, 결의안들과 국제사회의 비난은 이스라엘에게는 귀찮은 잔소리일 뿐이다. 지난 한 달 동안만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불법 정착촌 2600채 추가 건설을 발표했다. 작년에 비해 올해는 124%나 정착촌이 증가했다. 수 많은 삶이 또다시 길거리로 친척집으로 커뮤니티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인들과 달리 시민권 대신 영주권을 받게 된다. 또한 예루살렘이 아닌 서안지역에 사는 팔레스타인인과 현실적으로 결혼을 할 수 없으며, 불법 정착촌과 장벽이 계속 지어지고 있어 새로 태어나는 자녀들의 영주권도 받기 어려워 아이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어느 쪽에서도 속하지 못해 학교조차 가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역사를 포장하는 천박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무섭도록 잔인하지만 동시에 천박하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1948년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짧은 역사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신성하고 유구한 역사창조에 집착하게 만든다. 바로 얼마 전 불법 정착촌이 추가 승인된 동예루살렘의 실완(Silwan)의 경우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천박한 금색 글자로 데이비드의 도시(City of David)라고 이스라엘에 의해 새겨진 간판을 볼 수 있는데, 더 오래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지워버리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눈에 보여 애처롭기까지 하다. 성경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이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와 상관이 없듯, 이 정체불명의 이름 역시 허구로 만들어낸 것이다.
참고로 이스라엘이 다윗(데이비드)을 강조하는 까닭 역시 점령의 정당화와 연관이 있다. 잘 알려진 성경의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다윗은 용감한 이스라엘인으로 골리앗은 잔인한 팔레스타인인으로 묘사되어 있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임으로써 이야기가 끝이 나는데 이러한 성경의 내용을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어필하는 까닭은, 팔레스타인은 원주민이 아닌 침략자이며 결국 유대민족의 안보에 위험이 되는 잔인한 적이자 집단적으로 패배당하고 강출되어야 하며 함께 공존해서는 안된다는 시오니즘의 뿌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3차 인티파다는 올 수 있을까
연일 뉴스에서 보도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시위는 이스라엘 내 아랍 커뮤니티 지역과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어 혹자는 3차 인티파다를 점쳐보기도 하지만 사실 조심스럽다. 실제로 지금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화가 나있다. 아니 절박하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하다. 그러나 지금의 시위들을 보면 다발적으로 일어나기는 하지만 산발적이고 우발적인 경향이 크고 구심점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1,2차 인티파다를 거치고 이스라엘의 점령이 더 가혹해지면서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조직뿐만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는 갈기갈기 찢기고 파편화되어 왔기 때문에 그들끼리의 소통이나 단결 역시 과거에 비하면 힘들어진 것이 하나의 원인이다. 바로 얼마 전 이스라엘에 돌을 던지는 셰밥(팔레스타인 소년들)에게 20년을 구형하자는 논의까지 나온 것만 보아도 어느 정도로 팔레스타인을 압박하려 드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집단적 처벌방식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자극하고, 공격을 유도하고, 보복해왔는지 우리는 지난 몇 십 년간의 행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을 모욕해서 미치도록 화나게 만들고, 아들 손자를 모두 잃은 노년의 할머니가 절망에 가득 차 폭탄을 두르고 이스라엘로 걸어가게 만들고, 테러리스트를 용서치 않겠다며 단숨에 몇 천명에게 죽음으로 보복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보아온 이스라엘의 집단적 처벌의 방법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처음의 테이프를 끊는 건 종교를 이용하는 게 빠르다는 것도 이스라엘은 알고 있다.
이스라엘이 원하는 건 그들이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바로 그들만의 유대국가이다. 이스라엘 내 아랍계 인구가 20%이지만 그들에게 이들은 그저 제거하고 싶은 대상일 뿐이다. 공존은 없다. 이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이 딱히 놀랍지는 않다. 헤브론에서 가자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그 다음은 어디가 되어도 이스라엘은 그 곳을 집단처벌할 수많은 근거와 이유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수에 팔레스타인이 넘어갈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수많은 경험으로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이를 알고 있으며 새로운 저항과 투쟁을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을 지피는 데 국제사회도 반드시 동참해야 함은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