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는 ‘삼성 백혈병 승소’ ‘2심에서도 산재인정’ 이라는 헤드라인으로 법원의 판결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또 하나의 약속’을 함께 했던 스탭들과 지인들이 승소를 반기는 연락을 해왔다. 실제 당사자도 아니고, ‘반올림’ 처럼 피해자들과 늘 함께 해왔던 것도 아닌 내가 이런 연락을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고맙다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편치는 않았다. 아마도 그날 법정에서 판결이 내려지던 순간이 기억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법정에서는 고 황유미, 고 이숙영 님 은 업무상 산재라는 1심판결에 이어 2심 역시 산재로 인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고 황민웅님과 송창호, 김은경 님은 산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문을 읽어가는 판사의 목소리 넘어 작은 탄식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보니 안면이 있는 활동가의 눈시울이 붉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는 1심 판결이 나던 순간, 법정안에서 환호와 기쁨이 뒤덮였지만, 현실의 법정은 2심이었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일부 승소를 하지 않았냐고, 이마저 뒤집혔다면 더 힘들어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1심으로부터 3년이라는 시간동안, 200명이 넘는 피해자가 제보를 했고, 시민들과 사회단체들의 노력으로 더 많은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 1심에서 함께 승소하지 못했던 3명 또한 승소하여 다 함께 웃을 수 있기를 기대했던 사람으로서는 이번 판결을 전적으로 기뻐할 수는 없었다.
기사를 찾아보니 그나마 이번 판결에서 교대제 근무로 인한 과로·스트레스가 질병의 원인 중 하나로 고려될 수 있다는 점, 피해자들이 업무 수행 중 벤젠, 삼염화에틸렌 등 유해요인들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것이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고 하지만, 노출 정도와 수위가 발병과의 인과관계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는 점을 들어 인정하지 않았다. 사측에서는 기밀이라고 자료조차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인 노동자가 어떻게 이를 증명한단 말인가? 여전히 노동자가 산재 입증을 해야 하는 현행 법제도의 문제점이 발목을 잡고 있다. 애꿎은 피해자에게 자꾸만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는 법원에게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최후변론 대사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도 증거 있어요. 여기 있는 노동자들의 몸. 아픈 사람들. 이게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 증거란 말이에요?’
어떤 작업현장이 있었고, 그 현장에 일을 했던 사람들이 병들고 죽었다. 알고 보니 그 작업장에서는 인체에 해로운 유해물질들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런데도 부족한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을. 제대로 입증을 하라니... 아프고 병든 노동자의 몸보다 더 한 증거가 어디 있다고 자꾸만 증거가 부족하다고 하는지 법에 무지한 사람으로서 상식에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법원’ ,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근로복지공단’ 을 상대로 피해자들이 항소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야속하다. 1심 판결이 유지되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여전히 국민과 노동자를 외면하는 국가기관의 일관성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한걸음을 더 나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담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자회견을 끝내고 돌아가는 황상기 아버님의 얼굴에서, 다음 행보를 준비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반올림’ 식구들의 모습에서 희망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는 끝났지만, 현실은 계속 진행중이라는 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고 함께 하기에 언젠가 진정한 한걸음을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날이 온다면, 황상기 아버님을 비롯한 피해자 가족들. 그리고 ‘반올림’ 사람들과 웃으며 멍게 안주에 소주 한잔하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