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 고향집 밥상에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밥상머리에 일가친척 대소사 이야기가 끝나면 뭐니 뭐니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오른다. 취업, 비정규직, 치솟는 전세가, 일본산 수산물…. 그러나 이내 침묵이 흐르고 금세 밥상은 정치이야기로 바뀐다.
올해 추석의 정치 이야기는 어느 해보다도 뜨거웠다. 박근혜, 국가정보원, 촛불집회, 통합진보당, 이석기, 채동욱…. 각자 짐을 싸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면 세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벌어진 격렬한 전투도 다음 명절을 기약하고 휴전에 들어가지만 여운은 오래 남는다.
추석 밥상에서 늘 정치가 민생을 압도하지만 이 둘은 한 몸이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헷갈리고 복잡한 올해, 노동자 서민들은 정치와 민생이라는 고도의 ‘퍼즐 맞추기’가 어렵다. 박근혜와 국정원이 만든 퍼즐이 올해는 예전보다 훨씬 교묘하고 단수가 높기 때문이다.
국정원에서 채동욱 검찰총장 사퇴까지 복잡한 퍼즐을 맞춰나가는 일은 어쩌면 생각보다 쉽다. 민주화의 반대말이 독재라면, 경제민주화의 반대말은 경제독재일진데, 우리 사회를 누가 주무르는지 생각하면 퍼즐 맞추기가 조금은 수월해진다.
추석 직전 발행한 한 시사주간지 여론조사에서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박근혜 대통령이 1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2위를 차지했다는 결과는 국정원 발 고난도 ‘퍼즐 맞추기’의 중요한 힌트다.
추석 밥상은 정치와 민생의 ‘퍼즐 맞추기’
채동욱 검찰총장이 ‘날아갔다.’ 8월 26일 불법 대선개입과 연이은 촛불집회로 궁지에 몰린 국정원이 내란죄와 국가보안법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제물로 한국사회를 ‘들었다 놨다’ 했다. 혼비백산한 민주당과 진보정의당까지 이석기 체포동의안에 찬성했고, 이석기 의원은 감옥에 갇혔다.
정확히 열흘 뒤 조선일보는 채동욱 검찰총장을 향해 화살을 쐈고, 박근혜가 확인 사살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해 정권의 정통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청와대가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혼외자식’ 문제로 임기가 보장된 검찰의 수장을 매장하는 위험천만한 일을 벌인 까닭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왜 박근혜는 채동욱을 겨냥했을까? 지난 총선과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퍼즐을 맞춰보자.
이명박 치하 5년은 끔찍했다. 이명박은 법인세 인하, 폐차보조금, 고환율정책에 4대강 사업까지 노동자와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어 재벌과 부자들의 곳간을 가득 채웠고, 빵집, 순대가게, 비빔밥, 자전거 사업 등 동네상권까지 잡아먹던 재벌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패배가 확실하던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비정규직을 전면에 내걸었다. 박근혜 후보는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과제”라며 2015년까지 모든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약속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했다.
박근혜, 경제민주화와 비정규직을 전면에 걸고 총선과 대선 승리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2월 26일 박근혜 당선자는 재벌 회장들을 만나 “경영의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부터 시작할 게 아니라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지혜와 고통 분담에 나서주실 것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는 취임식 날 광화문 광장에서 대형 이벤트를 열어 “임기 내 반드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2013년 1월 16일 이마트 불법사찰 문서가 폭로되자 1월 24일 고용노동부는 이마트에 대해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했다. 3월 4일 이마트는 1만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고용노동부는 홈플러스, 롯데마트 등 유통업 전반으로 조사를 확대하겠다고 밝혔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선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2005년 2월 노동부가 현대차의 불법파견을 처벌하라고 요구했지만 ‘혐의가 없다’며 현대차와 정몽구 회장에게 면죄부를 주고, 불법파견 사내하청이 전 업종과 산업으로 확산되도록 만들었던 검찰도 달라졌다.
수원지검 평택지청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직후인 2월 27일 경기·충청 일대에 20개 지사를 두고 31개 무허가 파견업체를 운영한 혐의로 모 그룹 회장 등 4명을 구속기소하고 바지사장, 지사장, 직원 등 11명을 불구속기소 했다.
검찰은 “직접 생산공정에는 파견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제조업에 ‘도급계약서’를 작성, ‘사내하청’으로 위장하고 노동자를 파견하는 방법을 썼고, 2년 파견 뒤 직접고용하는 의무를 어기며 213개 업체에 1천230명의 노동자를 파견해왔다”고 밝혔다. 현대차를 비롯한 대기업 사내하청과 판박이였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철탑농성과 파업이 계속되고, 이마트 1만 명 정규직 전환을 시작으로 한 대기업들의 정규직 전환 발표가 잇따르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더욱 커져갔다.
2013년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 대한 높은 기대
전국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케이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무노조 삼성의 역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서비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거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국내 최대 재벌 삼성을 대상으로 위장도급과 불법파견에 대한 증거들을 쏟아냈고, 삼성의 정규직이라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시작했다. 곳곳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는 재벌회장을 ‘국가경제’를 들먹이며 풀어주던 법원도 달라졌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재벌 봐주기 ‘정찰제 판결’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모두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고, CJ그룹 이재현 회장, LIG그룹 구자원 회장도 법정 구속됐다.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현대차와 정몽구 회장에게 면죄부를 줬다가 2010년 7월 22일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므로 정규직”이라는 대법원 판결 이후 궁지에 몰렸던 검찰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법학과 교수, 일반 시민들의 정몽구 회장에 대한 고소고발이 잇따르자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대검찰청 공안부는 이례적으로 9월 10일 대검청사에서 현대차 수사검사와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사내하도급의 법적 쟁점과 과제’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다. 이어 대검찰청 공안부는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사건 수사와 관련해 9월 13일 울산지검에서 수사회의를 열었다. 검찰은 연말까지 수사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노동부도, 검찰도 달라지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선은 최대 재벌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차와 삼성으로 집중됐다. 10년 동안 불법을 저질러온 현대차 정몽구 회장의 처벌과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여부, 노동부의 삼성전자서비스 근로감독 결과는 200만 사내하청 노동자, 나아가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정몽구 회장 처벌, 삼성전자서비스 근로감독 ‘시선집중’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대는 8월 28일을 기점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2013년 8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로 10대 재벌 회장을 불러 만찬을 즐겼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려운데 정부에서 규제를 풀어주는 게 기업에는 큰 힘이 된다”고 말했고,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는 국내 임금과 물류비용이 높아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고 엄살을 떨었다. 박근혜 당선의 주역인 경제민주화와 비정규직 문제는 한 차례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바로 이날 불법 대선 개입으로 궁지에 몰리던 국가정보원은 내란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 10명의 자택과 사무실 18곳을 압수수색했다.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고, 9월 4일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 처리, 9월 5일 수원지법 이석기 의원 구속영장 발부로 이어졌다.
8월 28일 박근혜의 재벌회동과 국정원의 내란 발표 다음날 언론은 국정원의 자료로 신문을 도배했고, 대통령과 재벌 회장의 만남을 단신으로 처리했다. 8월 28일 국가정보원과 함께 박근혜 후보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인 경제민주화와 비정규직 공약은 ‘공안’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곧바로 9월 6일 조선일보는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의혹을 터뜨렸고, 청와대와 법무부는 감찰을 공표하며 검찰총장을 몰아냈다. 채동욱 검찰총장은 9월 13일 사표를 냈다.
채동욱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청와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한 책임자일 뿐만 아니라 16년 만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완납도 이끌어냈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을 비자금 조성으로 구속했고, 이명박의 초대형 범죄이자 아킬레스건인 4대강 사업을 수사하고 있었다.
채동욱은 2006년 대검 수사기획관 시절 현대차 비자금 사건을 맡아 정몽구 회장을 구속시킨 검사였다.
정몽구 회장을 구속시켰던 채동욱
채동욱이 물러난 후 박근혜 정부가 벌인 첫 번째 사건은 삼성전자서비스의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었다. 9월 16일 고용노동부가 6월 24일부터 8월 30일까지 삼성전자서비스와 A/S센터, 하청업체의 노동관계법 위반에 대한 근로감독 결과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고용노동부는 취업, 기술훈련, 수리, 출장 등 모든 업무에 대해 삼성전자서비스가 지휘명령을 하고 전산시스템과 업무 매뉴얼대로 일을 시키고, 수리비도 삼성전자서비스로 입금하고, 노동의 결과까지 삼성이 평가하는데 하청업체가 독립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서비스의 옷을 입고 삼성전자서비스의 지시에 따라 삼성 전자제품을 수리하고 삼성의 감시를 받고 삼성이 주는 임금을 바지사장 통장을 거쳐 받고 삼성을 위해 청춘을 바쳐 일했는데 삼성 직원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불법파견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던 박근혜 정부가 전국의 모든 재벌과 사용자들에게 사내하청이라는 이름으로 불법파견을 마음껏 저질러도 좋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채동욱이 물러난 후 박근혜 정부가 벌인 두 번째 사건은 정리해고의 요건을 강화하라는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거부하고 사용자의 손을 들어준 일이었다. 인권을 1990년대로 회귀시켰다는 비난을 받아온 국가인권위원회조차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로 돼 있는 정리해고 요건이 해고를 양산한다고 보고, ‘경영 악화로 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경우’로 구체화하라고 권고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정리해고 요건을 엄격히 제한하면 경기불황 시 기업의 회생 수단을 제한하게 돼 비정규직을 남용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재벌과 똑같은 논리를 폈고, 해고 대상자 선정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라는 권고에도 “모든 사업장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며 반대했다.
해고요건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던 박근혜 정부가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재벌과 사용자들에게 쌍용차에서 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정리해고를 하라는 선언을 한 것이다.
불법파견 정규직 전환, 해고요건 강화 공약도 폐기
국가정보원은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을 제물로 칼춤을 추고, 정몽구를 구속했던 채동욱 검찰총장은 날아가고, 고용노동부는 삼성과 기업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줬다. 이제 남은 건 10년 동안 불법을 저지른 현대차와 정몽구 회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이다.
8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의 왼쪽에 현대차 정몽구, 오른쪽에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앉아 있었다. 박통과 ‘좌’몽구 ‘우’건희, 복잡한 퍼즐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