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초 이집트의 시민기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모시린* 집단>의 오마르 로버트 해밀튼은 아랍의 봄 당시의 분위기를 한 마디로 그렇게 표현했다. 그 무렵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한 결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18일간 전국의 광장과 거리를 물결치게 한 혁명의 파도에 맥없이 휩쓸려가고 30년간이나 지속되던 국가 비상사태가 해제됐다. 그러자 공포와 고통과 굴욕이 자리 잡고 있던 시민들의 가슴에도 희망이라는 낯선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했지만, 시민들은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처럼 탁 트인 내일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들의 기대는 광장 위를 덮고 있던 푸른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3년 6개월이란 시간이 흐른 오늘, 독재자를 무너뜨린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위로부터 불어오는 반혁명의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복수의 후보가 출마해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치러진 2012년 6월 대선에서 당선된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은 집권한 지 불과 1년 만에 군부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져 법정에 서게 될 운명에 처했다. 그와 동시에 60년 가까이 불법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온갖 탄압을 겪다가 무르시의 당선 덕분에 집권세력의 지위에까지 오르는 대반전드라마를 연출했던 무슬림 형제단과 그 정치조직인 자유정의당은 하루아침에 테러조직으로 몰려 이리저리 쫓기고, 잡히고, 갇히는 신세가 됐다. 무르시 정부의 퇴진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그의 복귀를 요구하는 지지자들로 나뉘어 거리는 온통 분열과 증오의 언어들로 가득하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심한 혼란과 격변 속에 지난 두 달 간 목숨을 잃은 사람들만 무려 8백 여 명(임시정부의 발표)에서 4천 5백 여 명(무슬림 형제단의 주장)에 이르고, 희생자들 중 압도적인 다수는 무르시와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하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이는 누가 어떤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명백한 쿠데타요,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다. 이유야 어찌됐건 국민들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이 군대의 완력에 못 이겨 강제로 쫓겨났다면 그것이 어떻게 쿠데타가 아닐 수 있을까. 또한 집회와 표현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된 나라에서 대다수가 평화적인 방식을 고수하던 시위대를 광장과 모스크에 가둔 채 마치 사냥하듯 총질을 해대는 행위는 명백히 학살이다.
이집트 위기, 민주주의와 정의를 찾아가는 민중들이 풀어야 하는 난제의 전형
그럼에도 이집트에서 들려오는 갖가지 이야기와 주장들은 우리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쿠데타는 쿠데타지만, 이건 민중들의 민주적인 쿠데타”라고도 하고, “학살은 가슴 아프나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치러야할 대가”라고도 한다. 쿠데타 아닌 쿠데타, 비극적이지만 당연한 학살.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말만큼이나 모순적인 이런 주장은 비단 쿠데타를 주도한 장군들 입에서만 나온 말이 아니다. 불과 몇 년 전 지금 쫓기고 학살당하는 저 사람들과 함께 바로 그곳, 그 광장, 그 거리에서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던 시민들, 자유주의 청년들, 세속주의 지식인, 좌파 활동가, 노동운동가, 심지어 인권단체 활동가들 가운데서도 군부의 행동을 지지하거나 동료 시민들이 겪는 참상을 외면하는 이들이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걸까. 이집트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꽤 복잡하고 어려운 방정식 같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 접하는 방정식은 아니다. 오늘날까지의 세계 역사에서 자유와 인간존엄을 향해 솟구쳐 나온 민중의 혁명 의지가 반혁명 세력의 반발과 폭력, 술수에 막혀 좌절되거나 심각한 어려움에 맞닥뜨리는 경우를 적잖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멀게는 프랑스의 2월 혁명(1848년)에서부터 이란(1953년), 과테말라(1954년), 칠레(1973년), 니카라과(1990년), 베네수엘라(2002년), 동티모르(2006년) 등이 그 예일 것이다. 어쩌면 현재의 이집트 위기는 독재와 탄압, 외세의 지배, 부패의 그늘에서 스스로 벗어나 민주주의와 정의를 찾아가는 민중이라면 거의 필연적으로 풀어야하는 난제의 전형일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이집트 사태를 둘러싼 복잡한 방정식에 감히 도전해볼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물론 정답은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원래부터 방정식은 답을 맞히는 것 보다는 하나하나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배우고 깨달음을 얻는 거라고 했으니, 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다.
이집트 현 위기의 첫 번째 상수(常數): 독선과 무능으로 가득 찼던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 1년
이집트의 현 위기에 관한 방정식에서 변하지 않는 첫 번째 상수가 있다. 바로 집권 1년간 무르시 정부와 무슬림 형제단이 독재자 무바라크를 목숨을 걸고 권력에서 끌어내렸던 민중의 기대와 열망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배신했다는 점이다. 이는 반 무르시 진영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자들까지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다만 그들은 무바라크 30년 독재가 심어놓은 온갖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들을 해결하기엔 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았고, 흔히 ‘펠룰(Felool)’이라 불리는 독재 잔당들의 방해 또한 집요했다고 주장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 뿐이다. 그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측면이 있다. 특히 이집트의 기득권 세력을 대표하는 군과 사법부는 집권 자유정의당이 원내 1당을 구성하고 있던 하원과 제헌의회를 각각 해산시키는 등 수시로 딴죽을 걸어온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생필품을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시민들의 줄이 무르시 대통령이 쫓겨난 뒤 싹 자취를 감췄다는 증언 역시도 무르시 정권을 견제하던 자본가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불과 1년 전만 해도 무르시에게 표를 던졌던 시민들의 상당수가 등을 돌린 현실을 단지 그들의 인내심 부족이나 기득권 세력의 방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적 순진함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무르시 정권과 무슬림 형제단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시민 다수에게 ‘대통령을 저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위기감과 절박함을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에 2천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무르시의 퇴진을 요구하는 서명을 하고 수백 만 명이 반정부 시위에 동참한 것이다.**
60년 간 탄압 속 무슬림형제단, 시골과 빈민지역 구제 활동으로 뿌리내려
그 위기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조직이 걸어온 길과 무르시 대통령의 집권 과정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슬람권에서 ‘이흐완 알 무슬리민’이라고 불리는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그들을 마치 알 카에다나 자마아트 알 이슬라미야*** 같은 급진 이슬람주의 단체의 하나쯤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8년 성직자이자 교사였던 하산 알반나가 창시한 무슬림 형제단은 서구의 식민 지배를 받던 무슬림들의 각성과 도덕적 개혁을 촉구하기 위한 온건 이슬람주의자들의 신앙부흥 운동으로 출발한 조직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급진적이고 불온한 이미지를 덧씌운 것은 세속민족주의를 표방하던 군 출신의 가말 압델 나세르와 안와르 사다트, 호스니 무바라크 같은 역대 정권들이었다. 1952년 나세르가 자유 장교단을 이끌고 파루크 왕조를 무너뜨릴 당시 형제단은 그들의 편에 서서 공화정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2년 뒤 나세르는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의 배후로 형제단을 지목해 지도부와 그 지지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대결이라기보다는 군부가 잠재적인 정치 라이벌로 성장할 수 있는 형제단의 싹을 미리 잘라낸 정치적 숙청의 측면이 강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2011년 2월 무바라크가 축출되기까지 형제단은 60년 가까이 불법조직이란 멍에를 져야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은 시골과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제활동을 하고 자선병원을 운영했으며 학교를 지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형제단을 이끄는 지도부가 대부분 부유한 기업가나 의사, 변호사, 학자, 기술자 등 중상층 계급 출신들이었음에도 선거 때만 되면 시골과 도시 빈민가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끌어 모았던 것도 그런 오랜 노력과 헌신의 결과였다.**** 그리고 지난 7월 3일 쿠데타 이후 군과 경찰의 무력진압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광장과 모스크를 떠나지 않았던 형제단 지지자들의 대부분이 가난한 서민들이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따라서 무바라크 축출 이후 치러진 다섯 차례의 선거*****에서 형제단이 모두 승리하고 집권까지 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동안 이집트는 반세기 넘게 세 번의 군사정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좌파와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온건성향의 중도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까지도 철저하게 와해되거나 거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탄탄한 조직을 갖추고 민중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세력은 형제단 말고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 2011년 아랍의 봄을 처음 제안하고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4월 6일 청년운동’을 비롯한 자유주의 청년 그룹 역시도 무바라크 이후까지 준비할 여력은 없었을 뿐더러 그들 내부의 스펙트럼 또한 너무나 다양했다. 게다가 무바라크 퇴진 이후 국정의 전권을 스스로 가져간 최고군사위원회(SCAF)의 장군들로부터 민간으로의 권력 이양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대선을 치러야 했고, 대선 1차 투표에서 자유주의와 좌파들의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결선투표까지 오른 무바라크 잔당 아흐마드 샤피크 전 총리의 집권을 막기 위해서는 결국 형제단 출신의 모하메드 무르시에게 표를 몰아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집권 1년, 신자유주의 개혁 추종
그렇게 무르시 대통령과 형제단은 집권에 성공했다. 적극적인 지지자였든 마지못해 표를 던졌든 간에 시민들이 그들에게 거는 기대는 한결 같았다. 빵과 자유와 정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르시 정부가 집권 이후 맨 먼저 처리한 일 중 하나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48억 달러의 차관을 받는 대가로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전기, 수도, 석유 같은 공공서비스와 식료품에 대한 국가보조금을 삭감해 당시 11퍼센트인 재정적자를 다음 회계연도까지 8.5퍼센트로 대폭 줄이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유럽의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서 보듯이 그러한 조치는 곧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의 극심한 경제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생필품과 공공요금은 치솟았고, 절대 빈곤율은 20%에서 25%로 상승해 오히려 무바라크 정권 때보다 더 나빠졌으며, 30%에 달하는 청년 실업자들은 여전히 하릴없이 거리를 방황해야 했다.
사실 여기에도 그럴만한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형제단의 지도부는 정치적으로는 군사정권과 기득권세력의 혹독한 탄압을 받아왔지만, 계급적으로는 그들과 상당부분 이해관계를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고 핵심 지도자 그룹에 속하는 카이랏 알 샤테르와 하싼 말렉은 억만장자 사업가들이었다. 이집트 최대의 유제품 회사인 주하이나 그룹의 사프완 타벳 회장, 최대 패스트푸드 체인 모멘 그룹의 모하메드 모아멘 회장, 농수산물 수출회사를 운영하는 압델 라흐만 사우디 같은 재벌들은 소위 지도국(Guidance Bureau)이란 내부기구를 통해 조직의 주요 의사결정과 경제 정책을 좌지우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공공부문 민영화와 자본시장 개방, 노동시장 규제철폐를 통해 IMF와 세계은행의 차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오겠다고 밝혔다. 즉 혁명 이후에도 민중들의 삶은 전혀 나아진 게 없었던 이유가 단지 1년이란 집권 기간이 너무 짧아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밀실 독재, 이슬람주의 헌법, 반대파에 대한 폭력과 탄압
한편, 무르시 정부가 정치나 종교적 의견이 다른 세력을 끌어안는 포용력이 부족하다거나 점점 독재로 치닫고 있다는 우려는 경제 실정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와 관련해서는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만 들어보도록 하겠다. 먼저 의사결정 구조의 문제다. 무르시 대통령은 취임 당시 측근 몇 사람이 나라 전체의 정책 결정을 쥐락펴락하던 무바라크 시대의 관행을 개혁하겠다면서 부통령 한 명과 보좌관 네 명, 자문위원회 열일곱 명, 참모장, 법률 고문, 비서진 등등 대규모 팀을 구성했다. 거기엔 이슬람주의자도 있고 기독교 콥트교도도 있었으며, 좌파, 자유주의자, 활동가, 지식인들이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진짜 중요한 정책에 대한 논의와 결정들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이번에 체포된 모하메드 바디에와 알 샤테르 같은 무슬림 형제단 지도부 모임이었다.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만약 이명박 정권의 주요 의사결정이 소망교회 장로단에서 내려졌다면 그걸 지켜보는 우리들 심정은 어땠을까. 아마 이집트 시민들의 심정이 쉽게 이해될지도 모르겠다.
둘째로는 헌법의 문제가 있다. 전 세계 모든 혁명 과정에서 보면, 근본적 변화와 새로운 질서를 바라는 민중들의 바람은 새로운 헌법 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2년 전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국민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헌법은 사회의 소수자도 아우르는 헌법,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 여성과 노동자를 보호하는 헌법, 민간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게끔 하는 헌법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검토하고 토론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헌법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우선 이슬람법(샤리아)의 원리가 모든 입법의 주요한 원천이라는 헌법 2조가 그대로 유지됐다. 물론 이 조항은 과거의 헌법에도 있었지만 단지 선언적인 의미만 지닐 뿐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새 헌법은 이슬람법이 곧 “증거이자 규칙이며 법제, 원천”이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향후 절도나 간통, 신성모독 등이 이슬람법에 따라 처벌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그 밖에도 “가족을 향한 여성의 의무”라는 문구를 헌법에 직접 명시함으로써 여성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공장 소유주와 기업 경영진의 이익은 보호하면서도 노동권은 완전히 외면했으며, 국회의원 가운데 노동자와 농민 대표를 의무적으로 두는 조항도 없애 버렸다. 이런 까닭에 헌법 초안이 국민들의 의견과 열망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며 100명의 헌법제정위원 가운데 22명이 사퇴하고 대대적인 국민투표 거부 운동이 전개돼 투표율이 30퍼센트에 불과했으나, 무르시 정부는 끝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반대파에 대한 폭력과 탄압이 있었다. 최근 두 달 사이에 일어난 대량 학살에서는 대체로 무르시 대통령을 쫓아낸 군대와 경찰이 가해자이고 무르시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피해자였지만, 사실 무르시 정부 하에서도 반대파 시민들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은 수시로 자행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작년 11월, 대통령의 결정과 상원이 제정한 법률은 사법부의 심사대상이 될 수 없다는 대통령 포고령에 대해 반대하던 카이로 시민들을 향해 보안군이 실탄을 발사해 40여 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그 때는 보안군이 무르시 정권을 위해 시민들을 죽였고 지금은 무르시 정권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죽인다는 게 차이일 뿐이다. 이 같은 반대파에 대한 폭력에는 무슬림 형제단도 빠지지 않았다. 형제단의 자경단들은 반 무르시 시위대 공격에 적극 가담하고 수시로 기독교 콥트 교회와 소수 시아파 주민들에게 폭력을 저질렀다. 심지어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인구의 1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는 기독교 주민들더러 오스만 제국 시절 비 무슬림 주민들에게 부과되던 ‘지즈야(Jizya)’란 세금을 납부하라고 협박을 일삼기도 했다.
[주]
*“우리는 결심했다”는 뜻으로, 2011년 민중항쟁 이후의 과정들을 취재해 기록하는 한편 평범한 시민들을 역사의 증인이자 기록자로 양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 서명한 시민들의 숫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시작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서명을 받는다는 건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6월 30일부터 쿠데타가 일어난 7월 3일까지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수도 마찬가지이다. 반 무르시 진영에서는 최대 3천 3백만 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하나, 이 역시 상당히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무르시 퇴진 시위가 많은 시민들의 폭발적인 지지와 참여 속에 이뤄졌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집트의 수니파 이슬람주의 조직으로,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들을 테러조직으로 지정해놓고 있다.
****최재훈, “무바라크 축출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이유”, <참세상>, 2013년 1월 22일.
*****의회 선거 세 차례와 대선 1차 투표와 결선 투표.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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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보평론 57호(2013년 가을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