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논란 이후 전국적으로 시행된 ‘무상급식’에 대해서, 교육부든 경기도든 ‘무상급식’이란 말은 어떤 식으로든 떼어버리려 애를 써서, 아주 기형적인 예산항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에 무슨 문제만 있으면, 무상급식 멱살잡이를 한다고 한다. 애들 먹는 거 가지고 왜들 이리 찌질하게 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상급식을 계기로 복지의 개념이 바뀌면 어쩌나 하는 그런 불안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정말 ‘복지’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생각하려 한다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수급권이 탈락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얼굴 없는 영정들 [출처: 비마이너] |
그러고 보면, ‘복지’에 대해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상황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복지 개념이나 정책의 근간은 이미 1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니, 그간 여러 변화가 있었다고는 해도, 지난 100년간 사회변화를 생각해보면, 시대착오적인 것이 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복지’라는 개념이 사용되진 않았지만, 그것의 근간이 되는 발상이 탄생한 것은 19세기 도시의 끔찍한 슬럼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수많은 이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기에, 땅값이나 임대료는 폭등했고, 덕분에 살 곳을 얻을 수 없는 이들이 모여 살던 곳이 슬럼이었다.
가난한 이의 삶에 별 관심이 없었던 부르주아들이 슬럼에 눈을 돌리게 했던 것은 전염병이었다. 콜레라, 19세기를 상징하는 전염병이다. 한번 돌면 평균 15~18% 정도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그런데 가령 1832년 파리의 경우 평균 사망률 19.25% 정도였는데, 슬럼가의 사망률은 33.87%라는 놀라운 수치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위생개혁가’들은 슬럼이 전염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대대적인 철거를 개시했다. 그러나 철거를 한들, 노동자나 빈민들이 살 곳이 없는 한, 슬럼은 계속 밀려나며 다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채드윅이 주도해서 만든 공중위생법(1848)이나 위생을 이유로 가정에 대한 검열과 감시를 공식화한 공공주택법(1853) 등이 이런 이유에서 계속 만들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나 빈민의 삶에 애정과 관심이 있는 이른바 ‘코뮨주의자’들이 출현했고, 그들의 주거와 위생, 빈곤문제를 해결하려는 실험들을 시작했다. 특히 푸리에주의자였던 고댕은 자기 공장의 노동자들을 위해 ‘궁전 같은’ 집합주택을 지었고(‘파밀리스테르’라고 한다), 공동육아나 공동교육을 포함한 공동체를 조직했으며, 조합을 만들어 집에 대한 소유권을 조합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까지 견학하러 오는 이들이 줄을 서게 한 이런 ‘코뮨주의적’ 시도와 대결해야 했기에, 부르주아들 역시 빈곤문제에 대해 그저 나 몰라라 할 순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른 한편 스스로 ‘박애주의’라고 자칭했던 그들의 전략은, 이전의 ‘자선(charity)’이라고 부르던 것이 빈민들을 구빈원에 받아서 전적으로 먹여 살리는 것이었기에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계속 의존적이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빈민 스스로의 ‘자조(自助)’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빈곤을 뜻하는 ‘진정한 빈곤’과 대비하여,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지 않아 발생하는 ‘인위적 빈곤’을 구별하며, 도덕적 결함을 감시하면서 최대한 일하려고 시도하게 하는 방식으로 지원해주어야 함을 강조했다.
바로 이것이 경제적 지원을 위해서는 자신의 ‘진정한 무능함’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는 그런 체제의 계보학적 출발점이 되었던 셈이다. ‘선별적 복지’에서 ‘선별’이란 바로 이런 ‘진정한 빈곤’과 ‘인위적 빈곤’을 구별하고 선별하는 것이고, 자신의 진정한 무능을 증명할 수 있는 자들을 선별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지원의 전략을 그들은 자선과 대비하여 ‘박애’라고 불렀다. 자칭 ‘박애주의자’들이 자선 모델의 거점인 구빈원 대신에 선택한 것은 노동자들에게 집이라는 ‘잃을 것’을 마련해주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슬럼의 반복적 재생에 대한 대책이기도 했지만, 형편없는 주거로 인해 집보다는 선술집으로 퇴근하는, 그리곤 ‘술김에’ 걸핏하면 거리로 뛰쳐나가 불온한 대중이 되고 마는 노동자들을 집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대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공짜로 집을 줄리는 만무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출현했다. 돈을 빌려주어 집을 사게 하고, 그것을 평생 갚도록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주거지의 마련을 위해, 이른바 ‘박애협회’라는 곳에서 돈을 대출하여 집을 사게 해주고, 평생 돈을 벌어 그것을 갚는 이른바 ‘분양제도’가 발명된다. 물론 처음엔 돈을 출자하려는 이들이 별로 없었지만, 그게 새로운 ‘이자 산업’으로서, 새로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우후죽순처럼 이런저런 ‘박애협회’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도시마다 수백 개의 이런 단체들이 생겨났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그 벗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었다.”(<사생활의 역사>, 4권) 그들의 ‘박애’는 인간이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읽지 않고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일 게다.
▲ '부양은 가족이 먼저? 사각지대 양산주범 부양의무제!'라고 적힌 선전판 [출처: 비마이너] |
또 노동자들에게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게 하고, 여성들에겐 남편과 아이를 가정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할당하여, 모든 욕망을 가족으로 흡수하는 ‘가족주의 전략’이 ‘코뮨주의’의 집합적인 공동주거에 대한 대항전략으로 출현한다. 이후의 ‘복지’ 개념은 이런 박애주의 전략을 그 계보학적 기원으로 한다. 인위적 빈곤이 아닌가를 끝없이 확인하며, 가족 단위로 부양의 의무와 책임을 묻는 이른바 ‘가족의무부양제’는 이런 계보학적 기원 위에서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가족의 해체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사실이 되었고 그 결과 서류상 ‘가족’이라곤 해도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사는 이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 지금, 가구 단위의 복지 개념이나, 가족에게 부양의무를 묻는 제도는 시대착오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19세기는 하루 평균 15시간의 노동을 시키면서도 노동력의 부족으로 시달리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이들의 비율이 실제로는 ‘경제활동인구’의 20%를 넘고, 노동자 가운데 거의 절반이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는 조건에서, ‘빈곤’이 능력이 있어도 일하지 않는 ‘인위적 빈곤’은 아닌가를 따지고 ‘선별’하는 것 역시 어떻게 보아도 시대착오적임은 분명하다.
아니, 시대착오 이전에, 이런 식의 복지 개념은 어떤 사람과 그 가족의 무능함을 남들(공무원) 앞에서 공식적으로 증명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생존을 위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조’, ‘자립’)로서의 인간적 자존감을 파괴하는 것이란 점에서 웰페어(Welfare)가 아니라 배드페어(Badfare)고, 복지가 모욕이다.
이런 제도에 길든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거지’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인간으로서 자립적으로 살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인간을 ‘거지화’하는 제도에 길드는 것이다. 밥을 굶고 차라리 맹물로 배를 채우는 한이 있어도 그런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 선별급식을 위한 무력함의 증명을 거부하는 아이들의 자존감이 차라리 눈물 나면서도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선별을 전제하는 복지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19세기의 이 '박애주의자'나 위생개혁가들, 부르주아지의 가족주의 전략, 그리고 노동자의 집을 둘러싼 계급투쟁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은 이진경,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그린비, 6장을 참고하시길...^^) (기사제휴=비마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