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 4미터 높이에서 아무 보호 장구 없이 한 여성이 무릎 끓고 팔을 움직인다. 그는 곡예사도 아니고 퍼포먼스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역사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일 뿐이다. 서울 이촌 역사 창틀에서 청소노동자가 위험한 곳에서 혼자 청소 일을 하는 것을 지나는 시민이 보고 SNS에 공유하면서 ‘청소노동자의 위험한 현실’이 세상에 알려졌고, 많은 시민들이 이에 공분하며 아직도 청소노동자들의 현실이 이렇게 열악하냐고 탄식했다. 고용노동부는 서울서부지청 근로감독관과 안전보건공단 직원을 파견해 사실관계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조사한다고 한다.
청소노동자에게 곡예를 강요하는 사회
그녀가 왜 그 높은 곳에서 일을 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아니 그녀에게 저 높은 곳을 닦으라고 직접적인 지시가 있었느냐와 상관없이 그곳의 노동현실을 말해주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이유는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2010년 ‘따뜻한 밥 한 끼의 권리’라는 청소노동자 권리 찾기 캠페인을 하면서 여러 대학에서 실제 일하는 노동자들과 청소장구를 보았다. 너무나 하얗게 빨린 대걸레는 얼마나 해당 학교의 노동 강도가 센지를 말해주었다. 어떤 학교에서는 하얀 것을 좋아하는 이사장님 덕에 청소노동자는 더러운 곳을 닦는 걸레가 새하얗게 될 때까지 몸에 해로운 락스에 오랜 시간 손을 담그며 일할 수밖에 없었다.
청소노동자들이 무리한 작업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사용자가 직접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용역업체를 통해서 해마다 재계약을 하는 방식으로 고용되기 때문이다. 일을 계속하려면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강하게 일할 권리는 보장되는가? 그렇지도 않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직접고용이 아닌 도급업체(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건강권을 온전히 보장하고 있지 않다. 더구나 최근 고용노동부가 위험도와 재해발생도 등을 고려해서 안전보건의무를 차등화 하겠다며 내놓은 방안은 더욱 후퇴됐다. 교육서비스업, 행정 및 사회보장 등의 사업은 산업안전보건법 29조(도급사업 시의 안전·보건조치)의 적용을 제외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같은 청소 일을 하더라도 교육서비스업으로 분류되는 대학 청소노동자의 경우 산안법 29조의 적용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침묵의 생존방식에서 벗어나게 사회적 힘을 모아야
그러니 그녀가 곡예를 하도록 만든 것은 비정규직 간접고용을 계속 용인하는 구조이고, 정부정책이며, 권리를 제한하는 부당한 법들인 게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 우리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우리의 권리를 내 놓아라’는 외침이고 행진이다. 그래서 이번 4회 청소노동자행진의 모토는 ‘행복할 권리를 찾아서’이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 힘이 없는 한 침묵이 생존방식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함께 비를 맞고 함께 요구를 걸고 용역업체와 사용주와 맞설 손들이, 발들이, 말들이 필요하다. 그러한 경험만이 익숙했던 침묵을 깰 내재한 힘이라는 것을 청소노동자들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6월 14일 열리는 4회 청소노동자행진의 장소도 거대한 빌딩들이 모여 있는 여의도로 정했다. 크고 화려한 빌딩 속에 열악한 노동조건과 임금을 받는 미조직 청소노동자들을 이미 노조로 조직되고 투쟁으로 스스로의 힘과 권리를 경험한 청소노동자들이 직접 만나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여의도 정규직 노동조합을 통해서 청소노동자들을 만나려고 했지만 용역업체 소장의 난리로 무산된 곳도 있다. 아직 청소노동자가 근무 외 시간에 누군가를 만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 2013년 청소노동자의 현실이다.
최근 이촌역 청소노동자 사건으로 일어난 공분이 청소노동자 현실을 바꾸는 근본적 힘으로 모아지려면 실천이 필요하다. 먼저 자기가 있는 사업장, 건물에서 청소노동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지 관심을 갖는 것, 노동조합을 만들어 권리를 찾도록 조력하는 것, 6월 14일 청소노동자행진에 함께 하도록 알리는 것 등등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청소노동자가 행복해지는 것이 나의 행복과도 연결되고 나의 권리와도 연결되었음을 머리와 온몸으로 깨닫는 것일 게다.
청소노동자를 ‘특별한’ 지위로 바라보며 동정심으로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존엄한 삶을 이루기 위해 타인의 권리와 타인의 존엄함을 지키려는 동등함으로 만나야 한다. 청소노동자가 행복해지는 권리는 우리 모두가 행복해지는 권리이기도 하다는 사실로부터 청소노동을, 청소노동자들을 바라본다면, 쉽지 않지만 비정규직이 판치고 부당한 노동지시가 판치는 사회에 조그마한 파문하나 일으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