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넘어 문화제가 끝났다. 경찰은 깃발과 현수막, 피켓을 들지 않으면 행진을 막지 않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다음 날 아침 기자회견과 1인 시위를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와 가장 가까운 청운동 동사무소 앞까지 걸었다. 청와대 입구로 향하는 길은 육중한 차벽으로 막혀 있었다. 동사무소 앞 공터에 도착하자 경찰들이 노동자들을 에워쌌다.
침낭을 준비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깔판이나 종이박스라도 있어야 잠을 청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경찰은 모든 물품의 반입을 막았고, 버스와 병력으로 횡단보도까지 틀어막았다. 곳곳에서 항의가 계속됐지만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모처럼 만난 노동자들과 수다를 떨고 있던 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져 맞은편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자정을 넘긴 시간, 정류장에서 한참동안 버스를 기다리는데 건너편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지나가는 경찰의 무전기에서 연행을 준비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이 되어 신호등을 건너 노동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대통령에게 공약을 지키라고 외친 쌍용차·현대차 노동자들
경찰들이 차량 한 대와 20여 명의 노동자들을 에워싸고 있었고, 쌍용차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간헐적으로 항의를 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안쪽으로 들어가 몇몇에게 인도 쪽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는 했다.
그 순간이었다. 키가 좀 작은 경찰 지휘관 한 명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노동자들에게 반말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있던 노동자들이 왜 반말 하냐며 항의를 했다. 그 때였다. “모두 연행해”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은 경찰들에 의해 고꾸라졌고, 내 머리는 땅바닥에 처박혔다.
6~7명의 경찰들이 땅바닥에 쓰러진 나를 밖에서 보이지 않게 둘러싸더니 발로 밟고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한 경찰관은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땅바닥에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소름이 끼쳐왔다.
본능적으로 안경을 쓴 얼굴을 감쌌다. 발길질과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 아~” 하며 울부짖었다. 소리를 듣고 온 사람들의 항의하는 목소리가 가까이 들려왔고, 폭력이 멈추었다. 잠시 후 항의하는 목소리가 멀어져가더니, 머리카락을 잡은 경찰을 선두로 나는 땅바닥에 질질 끌려 경찰버스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연행자를 가리고 벌어진 경찰관들의 집단 폭력
나는 탈진한 상태로 버스에 던져졌다.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끊어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쥐고 버스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행한 대원이 누구야? 폭행당한 대원은? 야, 니가 여기 앉아. 너 맞았지? 니가 가서 진술해.”
“예.”
“어디 다쳤어?”
“예, 이 사람이 대장님을 때리려고 했고 저도 때렸습니다.”
“알았어.”
녹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찾았다. 땅바닥에 끌려오면서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과 물품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기가 막혔다. 나는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손톱이 깨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거즈를 감고 있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한 젊은 대원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기가 막혀서 있는 힘을 다해 말을 했다.
“내가 경찰 대장을 때렸다고요? 내가 당신도 때렸다고요? 어디 맞았어요? 맞은 곳을 보여주세요. 내가 이 가운데 손가락을 다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사람을 때렸다는 거예요?”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경찰은 말을 더듬으며 팔을 긁혔다고 말했다. 곧바로 고참으로 보이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대꾸하지 말고 경찰서 가서 진술해.”
6월의 첫 날 새벽 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너 맞았지? 니가 가서 진술해”
네 명의 노동자를 태운 경찰버스는 노원경찰서에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무지막지하게 맞으면서 끌려온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두 명도 허리와 목이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한 명은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갈비뼈에 이상이 있는 듯했다. 병원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자다 말고 불려나온 노원경찰서 형사들은 짜증스런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며 요구를 거절했다. 조사를 받으라고 강요했다. 이미 새벽 1시가 지났고, 몸이 너무 아파 병원부터 다녀오겠다는 호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 팔에 시퍼렇게 든 멍 자국을 보여줘도 소용없었다.
노원서 형사들은 데려온 기동대 대원들을 불러 조사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맞았다고 했던 기동대원과 채증반 한 대원이 나를 가리키며 채증한 사진과 비디오를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야간 조사를 받지 않겠다고 했고, 한 시간을 싸우고 나서야 병원을 갈 수 있었다.
한 시간을 싸운 후에야 병원으로
병원에서 머리와 허리, 팔과 다리에 난 타박상을 보여주고, 엑스레이를 찍고 진단서를 끊었다. 부은 머리를 만지다가 손을 보니 머리카락 수 십 개가 있었다. 다시 머리를 만졌더니 또 그만큼 빠진 머리카락이 잡혔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머리를 만지는데 쉴 새 없이 머리카락이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숱이 적고 탈모가 시작돼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3~400개가 넘는 머리카락이 경찰의 손에 뽑혀져나가다니... 경찰에게서 찾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약을 받아 노원경찰서로 돌아온 시간은 새벽 4시 무렵이었다. 두 발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몸이 젖은 솜뭉치처럼 가라앉았다. 그러나 노원경찰서에는 유치장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경찰 봉고차를 타고 도봉경찰서로 가야 했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연행되어 경찰서와 병원과 경찰서를 돌고, 유치장에 들어와 이불을 덮고 누운 시간이 새벽 5시였다. 지붕에 달린 창문으로 여명이 밝아왔다.
5시간 동안 경찰서와 병원 유치장을 돌다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아침을 먹으라며 깨웠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다시 밥을 먹으라고 깨웠다. 점심이었다. 기운이 조금 나기 시작했지만 온 몸이 쑤셔왔다. 먹어야 할 것 같아 밥상에 앉아 밥을 입에 쑤셔 넣었다.
지난 새벽 땅바닥에 질질 끌려와 온 몸이 엉망진창이었다. 샤워를 요청했더니, 경찰관이 두 명밖에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런 규정이 어디 있느냐며 거듭 요구했더니 한 명이 샤워장에 가면 나머지 유치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없어서 안 된다느니, 우리도 이제 막 밥 먹었는데 쉬어야 한다느니, 한 시간 후에 샤워를 시켜준다느니 하며 여러 가지 변명들을 늘어놨다.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우리가 요구하기 전에 다른 유치인들이 샤워를 요청했는데 안 된다며 작은 바가지를 하나씩 주면서 유치장 화장실에서 씻으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인 권리이고,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유롭게 씻게 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한 참을 항의한 후에 샤워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참을 싸운 후에야 샤워를 하고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가 다녀가고 난 후에도 조사는 시작되지 않았다. 갑자기 남대문서 한 경찰관이 들어오더니 한 동료에게 2월 23일 집회 건으로 조사할 것이 있으니 나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출석요구서를 받은 바도 없고, 설령 출석요구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무슨 사건인지 알아보고, 조사에 대비해 사전에 준비할 내용도 있는데 여기서 조사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경찰관은 일단 나와서 묵비권을 행사하더라도 조사를 받으라고 강요했다.
법률적 규정과 근거도 없이 조사를 강요하는 것은 위법이라며 강력히 항의하고 조사를 거부하자, 남대문서 경찰관은 잠시 나갔다 오더니 이후에 출석요구서가 나오면 조사를 받겠다는 확인서 한 장만 써달라고 공손히 요구했다.
서초경찰서에서 온 형사들도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와 나를 조사하겠다고 했으나 우리도 같은 이유로 거부해 그냥 돌아갔다. 피고인의 인권은 벽에 걸려있는 구호일 뿐이었고, 일단 잡혀왔으니 잽싸게 조사를 하자는 ‘편의주의’가 경찰의 모습이었다.
잡혀온 김에 다른 건들도 조사하겠다는 경찰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조사가 시작됐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노원경찰서로 가지 않고 유치장 내에 있는 조사실에서 조사가 시작됐다. 한 명씩 조사를 받았고, 나는 저녁을 먹고 나서 7시쯤 조사가 시작됐다.
유치장 시설은 좋아졌다. 4월이 지나면 온수와 히터를 틀 수 없다더니 뜨거운 물을 틀어주고 이불도 두 개씩 주고, 작은 밥상도 생겼다. 수치심과 더러움의 상징이었던 화장실도 약간 깨끗해졌다. 많은 이들이 재소자들의 인권을 위해 싸운 결과였다.
하지만 경찰 조서는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조사내용과 상관이 없는 종교, 재산, 학력, 가족, 병역, 정당 등을 묻고 답하는 질문 내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개인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질문이 수 십 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대답하는 경찰관은 없었다. 그냥 ‘위에서 하라고 해서’ 하는 것뿐이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는 것을 통계로 입증하고 싶어서일까?
경찰관에게 “사건과 상관없는 개인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은 진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으로 답변을 적어달라고 했다. 그는 컴퓨터 자판의 복사하기(Ctrl-V)를 한참동안 눌러댔다.
수십 년 동안 변함없는 개인 사생활 조사
연행된 사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경찰의 주장은 32기동대장이 한 시위대에 멱살이 잡혀서 연행을 한 것이고, 나를 연행한 경찰은 나에게 손으로 가슴과 어깨를 맞았다고 진술해 ‘공무집행방해’로 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이 첨부한 증거는 내가 연행되어 경찰버스에 타고 있는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연행될 당시 수많은 경찰 채증조가 있었지만 기동대원이 진술한, 내가 손으로 경찰의 가슴과 어깨를 때렸다는 사진은 없었다. 나를 조사한 경찰은 아침부터 동영상을 봤는데 관련 장면을 찾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조사가 끝나고 작성된 조서를 보여줬다. 내가 하지 않은 얘기도 있었고, 내가 한 말을 대폭 줄여서 경찰의 질문 의도대로 대답한 것처럼 작성한 내용도 있었다. 컴퓨터의 ‘복사하기’ 기능을 쓰다가 다른 사람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내 조서에 들어가 있기도 했다. 꼼꼼히 보지 않으면 법원에서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경찰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연행된 내용에 대해서는 길고 자세하게 설명했는데 단 두 줄로 줄어 있었다. 다시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겨 조서를 다시 작성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이라는 칸에 수기로 자세한 내용을 적었고, 이후에 관련된 자료와 기록을 제출하겠다고 썼다.
꼼꼼히 보지 않으면 법원에서 유죄로 인정될 조서 내용
연행된 4명의 조사는 9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어차피 늦은 시간, 편안한 마음으로 소설책을 보고 있었는데 경찰이 곧 나갈 것 같다며 이불을 개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서도 나가라는 얘기가 없었다.
10시 전에 나가지 못하면 전철이나 버스가 끊길 상황이었다. 더구나 택시도 잡기 힘든 토요일 저녁이었다. 석방 지휘가 떨어졌으면 10시 전에 내보내주고, 택시비를 줄 게 아니라면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을 먹고 가겠다고 했다.
석방 지휘가 떨어져도 느긋하기만 한 경찰은 우리들의 항의에 조금 바삐 움직였다. 9시 50분쯤 우리는 도봉경찰서에서 풀려났고, 가까이에 있던 동료의 차를 타고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양재동 현대차본사 앞 농성장을 거쳐 집으로 돌아갔다.
석방 지휘가 떨어져도 ‘만만디’인 경찰
대법원은 2002년 5월부터 올해까지 삼성, 기륭전자, 용산 집회와 관련된 사건에서 “미신고집회라도 공공질서에 위험이 없다면 해산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잇따라 판결했다. 그러자 경찰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올해부터 방향을 ‘집시법’에서 ‘공무집행방해’로 옮겼다.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 현대차 양재동 본사 비정규직 농성, 정부종합청사 공무원노조 농성 등 노동자들의 농성장에서 경찰은 150명이 넘는 시민들을 연행했다. 경찰은 대법원 무죄 판결을 피하기 위해 무리하게 연행을 지시하고, 이 과정에서 경찰의 업무를 방해했거나 경찰을 폭행했다는 죄로 처벌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1990년 대 노태우 군사독재정권 시절 이후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연행된 것은 처음이었다. 경찰은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 잘 짜인 각본처럼 행동했다. 평소 훈련받은 것처럼 노동자를 둘러싸 폭행하고, 경찰을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2013년, 선배들의 피로 이룬 민주주의 시대인지 의문이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때려 죽여도 괜찮았던 박정희 시대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32기동대장과 대원들이 벌인 청운동 동사무소 앞 집단폭력 연행 사건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