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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5.18과 빨갱이, 폭도

[기고] 너무 많이 죽인 사회, 진혼의 영화 <지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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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은 정말 음악을 아는 감독이다. 영화를 회화적이라기보다 음악적으로 만드는 감독. 그 점에서 데이빗 린치와 비견될 수 있겠다. 그런데 데이빗 린치의 영화는 음악적이지만 또한 회화적이다. 한국의 영화 <지슬>도 그렇다. 나는 4.3항쟁에 대한 영화라는 점 말고, 이 점에서 이 영화를 주목했다. 영화를 만드는, 혹은 보는 재미란 아무튼 다른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고 이을 수 있다는 점일 게다. 그런데 물론, 그렇게 해낼만한 기예와 교양을 갖춘 감독, 나아가 그를 영화라는 장르 속에서 풀어낼 수 있는 감독은 영화판에서 드물다. 아니, 아주 드물다. 영화이전에 문화적인 축적이 없으면, 아니 문화적 축적보다는 문화적 ‘감’이 없으면 힘들다. 영화든 회화든 음악이든 그 모두를 꿰뚫는 혹은 비슷하게 만들어버리는 독특한 ‘감’. 사람들마다 그 '감'은 조금씩 다르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쩔 수 없다.


이 점에서 영화 <지슬>의 오멸 감독은 일단 그 ‘감’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영화 <지슬>은 한국 영화에서 매우 새로운, 아주 드문 회화적인 영화다. 하지만 그 뿐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음악적이다. 이 말은 역으로 한국의 영화들은 너무 산문적이라는 말이다. 즉 한국 영화들은 너무 말이 많다, 아니 말로 다 말하려한다, 혹은 이야기구조로 모든 것을 끌어간다. 이야기와 플롯이 모두를 지배한다. 하지만 영화는 말만이 아닌 다른 많은 장치들이 있다, 음악, 장면(미장센), 그리고 안무와 회화...

영화 <지슬>은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회화적이다. 근데 그것도 서양화가 아니라 동양의 수묵화 같다. 장점이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크게 평가하고픈 것은 이 영화가 수다스럽지 않다는 점이다. 말을 최대한 아끼고도, 이야기구조(story telling)에 의존하지 않아도, 이 영화는 많은 말을 던진다. 머릿속이 시끄러워서 왕왕거릴 정도로 묵직한 말들을 던진다. 우리는 화면을 보고, 정지된 화면들, 장면들, 자제된 소리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 그 목소리의 정체를 찾아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하게 한다. 브레히트식의 아주 심각한 ‘소격효과’를 자아내는 이 장치를 오멸감독은 만들어냈다, 그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서 세련되게.

그 점에서 영화 <지슬>은 영화로서도 볼 만하다. 단지 4.3항쟁을 그린 점만이 아니라. 외려 4.3항쟁은 이런 방식의 영화적 장치를 통해서 훨씬 우월한 성취를 일궈냈다. 즉 생마르게 그대로 전달해내고 역사를 짜내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그 죽음들이 초혼(招魂)하는 듯한 영화의 억누름 속에서 살아난다. 강하게 각인된다. 이야기보다 더 묵직한 힘으로. 그래서 다시 반대로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룬다. 즉 영화는 단지 영화로서만 볼만한 게 아니라, 4.3항쟁을 우리에게 전달하는데 있어서 어떤 글보다, 논문보다, 심지어 시보다도 효과적이다.

영화 <지슬>은 그렇게 영화로도, 4.3항쟁을 그린 영화로도 수작이다.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단지 볼 뿐만 아니라 듣고 읽기를 바란다, 그 영화 <지슬>.

그리고 스스로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만든 그 소리 없는 아우성을 불러내 이제 그들을 ‘진혼(鎭魂)’하자. 영화는 사실 ‘진혼’제의 구조를 가져왔지만, 영화의 처음에서 이미 모든 것은 말해졌다. 즉 이들의 혼은 아직도 진혼되지 못했노라는 것을. 그들의 제사가 군홧발에 밟히고 찢기는 맨 첫 장면, 그리고 또 마지막의 ‘소지’를 거쳐 보이는 그들의 제사상의 모습. 결국 영화의 끝에서 다시 맨 앞장면을 상기해보면, 그들 제주사람들은 여전히 진혼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첫장면과 맨 끝장면을 이어가면서, 우리에게 일어설 것을 요구한다. 영화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영화를 본 우리가 제주도에서 죽은 이들의 ‘진혼’의 책임자임을.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광주항쟁의 여운이 짙은 지금, 문득 영화 <지슬>이 생각났다. 우리 사회는 ‘진혼’을 원한다. 아니, 너무 많은 생명을 죽였다. 우리 사회는 ‘진혼’을 하기엔 아직 너무 멀었다. 먼저 ‘초혼(招魂)’을 할 일이다. 혼을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