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갑’의 ‘을’에 대한 횡포를 상징하는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사회적 공분이 높아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을’들은 가슴 속에 분노나 좌절 같은 걸 갖고 있다. 그런데 이걸 표현하지 못해왔다. 그랬다간 잘리니까, 피해를 보니까” 한 언론사를 통해서 밝힌 제약회사 영업사원 박씨(34)의 호소는 ‘갑의 횡포’에 너나없이 분노하는 절대다수가 ‘을’인 노동자와 서민들의 마음이 녹아 있다.
갑의 ‘본사’가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비단 남양유업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농심 등 다른 식품업체들도 강제 판매 등으로 문제를 심심찮게 일으켰으며, 또한, 편의점 본사는 기존 편의점 인근에 마구 점포를 허가하고, 계약해지 때 과도한 위약금을 내도록 하는 횡포를 부린 탓에 편의점주들이 잇따라 목숨을 끊기도 했다. 본사가 대리점에 판매 목표를 부과하고 끼워팔기를 강요하는 행태는 제과·치킨·화장품·타이어 등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이에 갑을관계의 부당한 차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여야는 경제민주화 논쟁의 한복판에서 갑을관계 개선을 위한 선명성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갑을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겠다”고 공언하였다. 곧이어 정부와 기업·대학·연구기관의 연구개발(R&D)사업 협약서에서 갑을문구가 사라질 예정이며 현대백화점 등 유통자본도 갑을문구를 삭제하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갑을관계의 문제는 여야가 경제민주화를 두고 논쟁하듯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거나,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와 횡포를 없애는 입법이나, 갑을문구를 삭제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갑을관계의 문제 해결은 형식적이고 도식적인 문제가 아니며, 그렇게 간단한 문제도 아니다.
▲ 남양유업의 횡포에 항의하는 시민 [출처: 뉴스민] |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에 제기 되어야
불평등으로 몸부림치는 ‘을’은 직시해야 한다. 갑을관계는 ‘관계’를 용인하는 사회, 즉 자본과 권력이라는 ‘갑’, 대다수 노동자 서민이 위치한 ‘을’의 관계를 인정하고 심화하는 신자유주의라는 사회구조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이것 없이 몇몇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 그리고 몇 가지의 경제민주화법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예컨대, 갑을관계에 있어 대기업의 경쟁력을 지탱하는 주요한 원천 중 하나가 바로 이 불평등에 기원한다. 갑을관계에 있는 하청업체에 하청부품단가를 최대한 낮추는 것으로부터 대기업의 이윤과 경쟁력이라는 능력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하청단가를 강제적으로 높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결과적으로 ‘슈퍼 갑’인 대기업의 경쟁력은 약화할 것이고, 바로 그만큼 이 대기업과 연결된 또 다른 ‘갑’의 중소기업들의 생존이 불투명해진다. 그것은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을’인 중소기업 노동자의 대량실업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부품단가가 인상되어도,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중소기업 자본‘갑’은 없다. 중소기업 자본 또한 이윤확대가 목적인데, 이 이윤확대는 중소기업 노동자의 생존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을’은 철저히 수탈당한다.
▲ 남양유업의 사과문. 해당 영업사원에 대한 징계를 강조하고 있다. [출처: 뉴스민] |
‘을’과 ‘을’의 자발적 연대의 필요성
또한, 불평등은 당사자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개인의 고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을 용인하는 사회 또한 건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지속적인 불평등관계를 지극히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정작 관심을 둬야 할 정치․경제적 문제의 근본을 잊기 쉽기 때문이다.
그 결과 권리와 인권을 억압하는 세력에 향해야 할 화살은 남양유업의 영업사원과 같은 처지의 어려운 사람들, 또는 자신보다 더 약자인 사람들을 향한다. 가령, 사회에서 불평등으로 차별받고 구석에 몰린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한 약자를 찾아서 증오범죄를 일으키듯. 지배와 착취를 문제 삼아야 하는 곳에서 사회적 약자는 서로 연대하기보다는 서로 꺼리고 미끼처럼 던져주는 조그만 이익을 위해 서로 짓밟는 일은 가장 큰 해악이다.
비단 남양유업의 영업사원뿐만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평등에 서로를 짓밟는 일들은 수다하다. 정작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이용해서 웃는 자는 따로 있다. 남양유업을 비롯한 자본은 ‘을’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지배세력이다. 진짜 문제를 해결하려면 동병상련을 느끼고 서로 의지하고 똘똘 뭉쳐서 저항해야 할 사람들이 이런 저런 편견과 차별의식으로 갈라져 싸우게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지배방식은 없다. 분열시켜 승리하는 것이다.
물론, 불평등한 갑을관계의 깊은 늪을 건너는 길은 쉽지 않다. 해결이 쉽지 않지만 열쇠는 ‘을’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갑을관계에 ‘을’ 스스로의 권리와 인권에 근거한 사회적인 관심, 자각 그리고 행동에 있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남양유업 영업사원 욕설·밀어내기 파문’으로 드러난 ‘갑질’에 분노하였다가 그 후 해당 영업사원 역시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을’이며, 무엇보다도 갑을관계를 유지시키는 대기업이라는 자본의 ‘갑질’에 대한 새삼스러운 자각을 하고 있다. 서민들의 분노와 자각은 자신도 다를 바 없는 을의 처지에 대한 서로에 대한 공감이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삶의 공간 곳곳에 베여 있는 갑을관계, 즉 부당한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라 할 수 있다. 이 불평등에 대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치열하게 호소하고 공감하고 함께하는 가운데 수많은 ‘을’은 자신의 권리와 자존감을 키울 수 있다. 또한 ‘을’과 ‘을’이 만나 서로의 권리와 자존감이 치켜세워질 때 ‘을’은 스스로 불평등한 갑을관계를 뛰어넘는 힘을 키울 수 있다.
문제는 갑을관계에 있어 ‘갑을’이 문제이기보다는 생산관계라는 ‘관계’의 문제, ‘갑을’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다. 을이 권리의식과 인권을 스스로 추적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불평등과 차별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갑을’은 냉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