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여성 살해는 가부장체제의 유지를 위한 남성 중심적이고 성별 이분법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인 구조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수많은 레즈비언들이나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폭력과 살해로도 이어지고 있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와 <참세상>은 2013년 공동 행동의 날을 통해 전 지구적인 여성살해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자행되고 있는 여성살해의 맥락과 의미들을 함께 분석하고, 의제화하기 위해 <여성살해에 관한 기획 연재>를 진행한다.
(원래 계획되었던 '한국의 여성살해 현황' 중 '가정폭력과 친밀관계에서의 살해'와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해' 기사가 필진 분들의 사정으로 게재가 어렵게 되어 부득이하게 '한국의 여성살해 현황'을 '여성살해의 다양한 맥락들'로 변경하여 추가로 네 편의 기사를 이어서 연재합니다.)
우리는 한국 사회 성매매의 현실을 알지 못한다. 현행법상 성매매가 불법인 탓에 성산업의 지형에 대한 실제적인 조사와 분석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노동자에 대한 복지정책이 ‘성매매 근절’, ‘탈성매매’에 집중되어 있기에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또 어떤 처우 속에서 일하고 있는지에 대한 조사 자료나 실태파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우리는 성노동자의 죽음에 익숙하다. 잊을만 하면 어딘가에서 그녀들의 죽음이 들려 온다. 성매매가 비가시적이고 음성적인 현상으로 인식되기에 이와 관련하여 알 수 있는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며 통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보도되는 성노동자 살해 사건은 연평균 2-3회에 달한다. 언론과 통계로 미처 잡히지 못하는 성노동자의 죽음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화류계에서 아가씨가 손님에 의해, 업주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은 '그 바닥의 공공연한 비밀이자 풍문'인 지 오래다.
우리는 한때 모두를 경악하고 분노케 했던 몇 건의 연쇄살인사건을 기억한다. 가해자들의 타깃은 주로 노인이나 여성이었고, 피해 여성 중 상당수는 성노동자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가해자가 '성적으로 문란한 사이코패스'라는 주장의 근거로 소비되었으며, 가해자의 불운했던 연애사와 치정의 문제로 극화되어 '그들의 연쇄살인은 자신을 무시한 여자들에 대한 오래된 열등감과 분노로 인한 것'이라는 식으로 희화되었다. 유영철 사건과 강호순 사건을 위시한 연쇄살인사건들은 그렇게 '특정하고 잔악무도한 개인이 벌이는 극소수의 일'이라는 양 축소되었다. 무엇보다도, '어째서 성노동자가 그들의 주 타깃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제기 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 특히 '(직업으로서 성노동을 하지 않는) 평범한 여성의 죽음', 그리고 '성노동자의 죽음'을 사람들이 각각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 두 죽음이 얼마나 이분법적이고 서로에게 배타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지를 생각해 보라. 대개 전자의 죽음은 사회의 공분을 자극하고, 이 공분 안팎으로는 '여권 향상'과 '여성 보호'의 문제,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안전망을 짜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할지에 대한 소란스러운 담화와 각계각층의 입장들이 전개된다. 하지만 성노동자의 죽음은 어떠한가? 우리는 어째서 질문조차 않은 채 '몸 파는 일을 했으니 죽을 만도 하다'며 그녀들의 죽음을 수긍하는가?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부도덕하고 문란한 여성에 대한 단죄'라며 그녀들의 죽음을 긍정하고 각자의 혐오를 정당화하는 생각은 과연 소수만의 것인가? 성노동자는 여성이 아닌가?
성노동자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지극히 이중적이다. 사람들은 여타의 죽음보다 성노동자의 죽음에 유난히 무딘 경향이 있다. 성노동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열악한 상황과 상시적인 폭력과 살해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인과의 알고리즘에 묶일 수밖에 없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연결점에 이상하리만치 무관심하다. 각종 미디어에선 '극단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가련하고 비극적인 여성'으로서의 성노동자의 이미지를 매번 선정적으로 재생산하고 있지만, 성노동자의 열악한 상황과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제기하는 이들은 터무니없이 적다.
그녀들이 '왜'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어째서 이 상황이 왜 반복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부재하는 한,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 따라서 그녀들의 죽음을 '여성살해', 그 중에서도 특히 '성노동자 살해'로 범주화한 뒤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성노동자 살해의 범주화
어째서 성노동자들이 자꾸만 살해당하는지, 그 인과를 명확히 규명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대부분의 성노동자 살해 사건은 가해자의 구체적인 살해 이유가 제시되지 않은 채 보도된다. 사회의 공분을 자극하지 않는 폭력일수록 본질은 잊혀지고 사건은 호도된다. 주류적이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유지재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폭로는 발화되는 순간 목소리를 잃는다. 죽음은 존재하나 죽음의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명백히 존재하는 죽음의 이유에 태연히 덧씌워진 공백이야말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녀들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성노동자의 현실을 정확히 시사하고 있다. 괄호 안으로 이유가 갇히고 은폐된 죽음들은 시야의 바깥에서 몇 번이고 반복된다. 이 연쇄를 끊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이 공백을 걷어내고 그녀들의 죽음을 직시할 책임이 있다.
성노동자 살해는 여성살해의 맥락과 더불어, 성매매 안팎을 구성하는 특정한 지형에 의해서, 성매매 과정에서 자행되는 여러 폭력에 의해서, 심지어는 단지 성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낙인과 혐오에 의해 성노동자가 살해당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이른다. 더불어 성산업 내의 열악하고 착취적인 노동조건으로 의한 성노동자의 죽음, 그리고 사회적 낙인감, 정서적 어려움, 지속적인 폭력, 고리 대금 등의 여러 요인으로 인한 성노동자의 자살 역시 성노동자 살해의 범주에 포함된다. 대표적 사례로 00년의 군산 성매매 집결지 화재 참사, 10년의 경북 포항 성노동자들의 연쇄적 자살 사건을 들 수 있다.
약자 개개인에게 자행되는 사회적 폭력은 무지로 인해 발생한다. 많은 경우 이 무지는 생래적이고 필연적인 사회의 풍토병인 양 여겨지나, 사실은 미처 셀 수 없을 만큼의 촘촘한 맥락과 인과로써 철저하게, 매우 의도적으로 '수행'된다. 이 수행은 중심과 바깥을 겹겹이 구획짓고 분열시킨다. 그리고 중심을 견디지 못하거나 중심에 머무르지 못하는 이들을 끊임없이 저변으로 밀어낸다. 이것이 사회적 소수자가 구성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사회적 죽음을 의제화하는 과정에선 이 방식을 짚어내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성노동자 살해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성노동자들이 성매매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폭력, 그리고 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편견과 낙인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말로 성노동자 살해 사건에서 매번 잘려나가는 인과의 연결고리를 재구성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기 때문이다.
▲ '아무도 모른다'. 지난 2010년 6월 29일 성노동자의 날을 맞아 일본에서 살해당한 한국인 성노동자 여성을 추모하며 진행되었던 <목소리 展> 중 설치작품 '아무도 모른다' |
성노동자 살해의 현황과 폭력의 문제
최근 10여년간 언론에 보도된 성노동자 살해 사건은 아래와 같다. 아래의 자료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발간한 2011년 하반기 「여성과 인권」에 실린 도표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2004.9 서울 강북구 한 여관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성노동자 여성 살해 시도가 미수에 그침
2005.6 서울 종로구 한 여관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06.4.7 서울 종로구 낙원동 한 여관에서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08.11 서울에서 아버지에 의해 2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09.7.10 서울 서초동 오피스텔 업장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20대 성노동자 여성 살해 시도가 미수에 그침
2009.8 제주시 연동 한 원룸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4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09.12 대전 유천동 원룸에서 업주와 마담의 감금 및 구타에 의해 2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09.12.4 태백시 황지동 한 여관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5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10.2 부산 진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구매자에 의해 4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10.4 전남 여수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된 채 암매장됨
2010.7.30 서울 청량리집결지 한 업소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3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10.12.11 전주시 덕진구 한 여관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3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11.10 경남 창원시 성산구 한 여관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11.11.2 부산 해운대구 한 여관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4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12.7.4 의정부시 한 여관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3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2013.3.17 화성시 향남읍 한 여관에서 성구매자에 의해 40대 성노동자 여성이 살해됨
성노동자들은 여러 조건으로 인해 폭력에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다. 우선 성노동자들은 성매매 행위자라는 ‘불법적 위치’ 때문에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따라서 성매매의 과정에서 업주나 구매자로부터 신고 협박, 금품 갈취, 성폭력, 구타, 살해 위협 등의 폭력을 당해도 성노동자들은 단속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경찰에 위험을 호소하지 못한다. 성매매의 불법화, 성노동자 처벌은 성노동자들의 당장의 삶을 실질적으로 열악하게 한다. 단속은 수시로 이루어지고, 단속 과정에서 여러 언어적, 신체적 폭력들이 자행되기도 한다. 단속에 적발되면 전과가 기록되고, 벌금을 물거나 심하게는 징역을 살기까지 한다. 또한 성매매와 성노동을 향한 사회의 깊은 낙인으로 인해 성노동자들이 겪는 친밀한 관계의 단절, 지속적인 자존감 하락의 문제, 단속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상시적인 불안 등의 문제도 성노동자들이 겪는 폭력의 문제에 포괄된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과 낙인의 결합으로 인해 폭력은 성산업의 현장에서 만성화되며, 바로 이 폭력들이 극단으로 치닫는 지점에서 성노동자들은 살해당한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 언론보도를 추린 자료에서 알 수 있는 사례는 극히 한정적이므로, 미처 알려지지 못한 죽음들은 보도된 죽음의 횟수를 훨씬 상회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성노동자들은 구매자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매자에게 짜증을 냈다는 이유로, 구매자가 단속을 두려워해서, 페이를 지급하고 싶지 않아서, 콘돔을 빼고 섹스하자는 구매자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성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심지어는 성노동을 그만두라는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성노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애인이나 가족으로부터, 단속을 피하기 위해 무리한 시도를 하다가, 드물게는 자신의 배우자와 성매매를 했다는 이유로 같은 여성으로부터 살해당한다.
성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 - 낙인이 폭력을 구성한다
성노동자를 향한 다양한 폭력의 기저에는 성노동을 향한 낙인과 편견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성노동자 낙인의 문제는 한 사회의 성관념, 즉 성정체성, 성도덕, 성별 권력관계 등의 다양한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 여성이 돈을 받고 섹스를 하면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며 소중하고 신성한 성을 더럽힌다', '(남들은 땀 흘려 성실하게 일하면서 돈을 버는데) 성기를 대주고 편하게 돈을 번다', '남자들을 뜯어먹을 생각이나 한다', '허영에 가득 차 있다', '가정을 위협하고 파괴한다', '성병을 옮기고 다닌다'는 등의 비난을 받는다. 낙인과 편견이 야기하는 성노동자 혐오는 성노동자를 향한 직간접적인 폭력으로 외화되며, 그녀들과 그녀들의 노동을 향한 적대적인 시선은 성노동자가 살해되었을 때 문제를 축소하고 은폐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성매매의 과정에서 성노동자가 수행하는 일련의 행위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역시 궁극적으로 폭력의 문제와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체제 안에서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라면 누구든 노동자라 할 수 있고, 성노동자도 이 범주에서 별개가 아니다. 그러나 성을 매개로 한 서비스의 거래가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 한, 성매매의 실제적 양상은 인신매매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성노동자의 노동을 흔히 '몸을 판다'고 표현하는 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성적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하는 노동을 한다는 자각이 성노동자에게 있다 하더라도, 구매자는 정해진 시간만큼 이 여성의 몸을 산 것이라고 생각하며 돈을 지불한 일정 시간만큼 성노동자의 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의 실현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녀들이 예상하지 못한 성적 요구를 강요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이 과정에서 성노동자는 몸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잃게 된다.
성매매를 둘러싼 국가와 사회의 법(法) 감정 또한 성노동자를 향한 낙인과 폭력의 문제에 연관된다. 국가는 언제나 성매매를 '필요악' 내지는 '절대악'으로 인식해 왔다. 전자의 인식은 '합법화' 정책으로, 후자의 인식은 '근절/금지' 정책으로 실현되었다. 성매매란 현상과 성노동자란 존재가 '통제하거나 폐절시켜야 할 골칫거리'라는 인식은 여러 국가의 성매매 관련 정책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성매매를 '악'으로 적대시하는 법제들은, 그것이 합법화이든 불법화이든, 사람들이 성매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지시키는 성 엄숙주의와 도덕주의와 깊이 유착되어 작동한다. 낙인과 타자화로 얼룩진 법망 아래에서 성노동자들이 국민으로서의 주권과 시민권을 여타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온전히 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비범죄화를 실현한 뉴질랜드와 호주의 몇몇 주를 제외하면, 성노동자들은 언제나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특별관리의 대상이거나 처벌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성매매를 근절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저에는 성매매 자체에 여성에 대한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생각이 깃들어 있는데,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라도, 앞서 언급한 구도에서 성매매특별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성매매와 성노동에 대한 법의 인식과 그 실천의 방식이 어떠한가의 여부는 사람들의 심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대다수가 동의하는 '성매매는 옳지 못하며 자발적 성노동자들은 범죄자'라는 주장의 상당수는 '법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조야한 근거에 기반한다. 성매매특별법의 취지가 '성노동자는 사회구조의 피해자'라는 인식에 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제는 '성매매로 인한 피해사실을 증명하지 않으면 범죄자가 되는' 자발-강제 이분법의 방식으로 작동되었다. 이는 일련의 문제의식들을 사회적 안전망 확충 등의 담론으로 발전시키지 않은 채 '피해자' 혹은 '범죄자'라는 한정된 위치에 성노동자를 고착시키는 결과로 나타났으며, 이 과정에서 여전히 성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인정받지 못한 채 인권의 사각지대로 내몰리게 되었다.
▲ "성노동자의 권리는 인권이다!" 세계 성노동자의 날에서 행진 중인 성노동자들 |
여성주의적 실천으로서의 '성노동자 살해' 의제 확장
흔히 많은 사람들은 성매매에서 벌어지는 폭력들이 마치 성매매의 본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매매의 문제는 모두의 문제다. 각 사회에 현존하는 어떤 의제와 정체성도 성매매의 문제를 비껴가지 못한다. 성매매의 현장이야말로 당대의 지배 권력과 그로 인한 억압, 폭력, 차별의 지형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지표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인지하고 억압하는지의 극단적인 형태가 성거래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점을 분명히 짚어야 한다.
오랫동안 남성중심사회를 운영, 유지시켜 온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집단 사이에서 '교환'되는 위치에 놓여 왔다. 여성의 욕망은 오직 남성권력 유지와 재생산에만 복무하도록 재단되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전유하는 주체가 오직 남성이어야만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는 여성이 스스로의 몸의 권리를 함부로 발화하거나 실현할 수 없게 하였으며, 오직 결혼, 혹은 그것을 전제한 연애 등의 성적 거래만을 승인해 왔다.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 자본주의의 긴밀한 결합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이 사회는 모든 여성이 창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창녀'는 여성을 지배하고 단죄하기 위해 구성된 위치이자 낙인 그 자체다. 그래서 이 체제는 교묘한 방식으로 여성들에게 자기검열을 요구하고, '창녀'로 보이지 말 것을 명령한다. 자신이 지닌 순결함과 정숙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일련의 행위를 수행적으로 반복하게 하고, 이 수행에 불성실하거나 비껴나 있는 여성들을 서로 비난하고 배척하게 한다. 오랜 시간 여성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 들어맞기를 강요당했고, 생존 수단으로써의 자기억압을 내면화해 왔다. 이러한 기제들이 어떻게 여성의 삶과 권리를 실질적으로 제한하고 옥죄어 왔는가를 폭로하고 투쟁하는 과정이 바로 여성운동의 역사였고,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성노동자 살해는 성노동의 당사자에게만 한정되는 특정한 사건이 아니다. '여성들이 신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기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한다'는 흔한 말들, 성적 자유를 주장하고 실천하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문란하다', '더럽다'는 비난들, 독점적-배타적-이성애적 관계를 수행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던져지는 따가운 시선들, 이 모든 것들이 성노동자 억압의 양상과 얼마나 밀접히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 연속적인 폭력의 사슬을 끊기 위해,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와 젠더-섹슈얼리티 위계 구도가 성노동 안팎의 문제에서 어떤 방식으로 극대화되는지를 질문하고, 이를 보다 정교하게 담론화하는 실천으로써 '성노동자 살해' 문제를 여성 공동의 의제로 확장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성노동자의 모든 죽음 앞에서, 겹겹이 덧씌워진 공백을 걷어내고 죽음의 이유를 물어야 한다. 성노동자의 사회적 죽음은 곧 사회가 여성에게 어떠한 여성성을 요구해 왔으며, 이를 이탈한 여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단죄해 왔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