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신자유주의 광풍이 온 나라를 들쑤시고 있을 때, 서울지하철노조는 겁도 없이 파업을 했다. 그것도 ‘정부의 정책기조를 바꾸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7일간 ‘불법파업’을 전개했다. 정권과 자본은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해고자들이 차고 넘쳐났다. 명동성당에서 76일간 수배생활을 하면서도 혹시 나만 살아남는 것이 아닐까 봐 괜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해고자 생활을 13년 동안 했다. 그동안 결혼도 하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단 하루도 부끄러운 해고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조직에서 요구하는 크고 작은 역할을 수행했다. 해고 기간 제일 힘들었던 것은 가족들의 걱정도, 주변의 시선도 아니었다. ‘나와의 투쟁’이었다. 기약 없는 복직의 전망 속에서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은 뜻밖의 복직으로 그토록 그리워했던 일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5년 6개월 근무하고 13년 1개월 만에 복직한 현장은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사측의 지속적인 통제와 감시로 현장권력을 빼앗긴지 오래고, 노조에 대한 조합원들의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조합원들의 시선은 여전히 공장 안에 머물고 있다. 빼앗긴 현장권력을 되찾고 다시 신뢰 받는 노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더디고 힘들겠지만 말 없는 조합원들의 지지와 성원을 믿고 다시 시작하고 있다.
해고가 살인인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과 권력의 계획된 살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부당한 징계해고와 정리해고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쫓기고 있다. 자본의 탐욕과 정권의 비호는 지칠 줄 모른다. 이 땅에서 해고자로 산다는 것은 굴욕과 굴종을 이겨내는 것이다. 자본과 정권의 회유와 협박 그리고 벼랑 끝에 내몰린 생존권을 딛고 일어서야만 한다.
하지만 해고자들의 투쟁도 조직의 연대도 예전같지 않다. 해고자들의 투쟁은 갈수록 엷어지고 있으며, 개별화되고 있다. 조직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해고자들이 늘어나면서 ‘복직투쟁’이 끈질기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분열정책으로 정리해고 철폐투쟁은 ‘죽은 자’만의 외로운 투쟁으로 전개되고 있다. 민주노조 진영에서는 여전히 해고문제를 조직의 문제로 껴안고 있지만 현안문제에 밀려 늘 뒷전으로 미뤄지고 있으며,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버스의 경험처럼 해고는 살인이라는 문제의식이 사회적 울림과 참여를 불러 모으고 있다. 더 이상의 폭압적인 정리해고와 부당한 징계해고는 사라져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해고자들의 투쟁과 조직적인 연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3월 29일과 30일에 개최되는 ‘해고자대회’는 해고자들의 자기반성과 성찰 속에서 해고 없는 세상을 위한 주체의 자기 각오와 결의를 다시금 모아내는 자리다. 투쟁이 정의이고 연대가 승리이다. 해고자들의 투쟁이 다시 시작되는 그 자리에 승리를 향한 연대의 손길이 지속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