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에 실린 토머스 프랭크의 <오큐파이 운동이 빠진 함정>은 월가점거운동에 대한 유의미한 비판이라기보다 무정부주의/강단좌파 혐오에 기반한 감정적 비판 또는 원색적 비난에 가깝다. 물론, 토마스 프랭크는 월가점거운동의 부정할 수 없는 성과는 인정하지만, 월가점거운동에서 가장 두르러진 무정부주의적 경향(libertarainism)과 강단좌파에 대한 극단적 혐오에 기반한 비난을 퍼부었고, 이런 감정적 편향은 결국 스스로 감정적 자멸에 빠진 사이비 비판으로 끝냈고, 21세기 가장 위대한 투쟁 중의 하나인 월가점거운동이 아니라 자기 얼굴의 침을 뱉었다. 그리고 토마스 프랭크를 월가점거운동에 대한 건강한 비판으로 착각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도 자멸적 자가당착의 공범이 됐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3년 1월호 |
천편일률적인 과한 고무찬양, 참여를 위한 참여가 운동을 소멸시켰다?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은 그 무엇도 요구하길 거부하면서 크리스토퍼 래시가 1973년 제기한 '참여 예찬론' 속에 갇혀버린다. 반대했다는 사실에만 만족하는 반대운동을 벌인 것이다.”
“구태의연한 대학 세력이 결정적 자리를 차지하면서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은 그 대표주자들이 기존 유명한 이론들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연구실로 둔갑했다. 월스트리트 시위대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만 모여든 게 아니었다. 개인의 입신양명에만 눈이 어두운 일부 출세주의자들 역시 시위판에 끼어들었다.”
토마스 프랭크도 인정하듯이 월가점거운동은 담론적 파괴력, 계급의제의 제기, 급속한 확산 등의 요소를 통해 이성을 가진 좌파라면 누구나 흥분시킬 요소를 갖고 있었다. 월가점거운동은 출발부터 다분히 우연과 의식적 조직화가 맞물려 시작됐지만, 모든 사람의 예상을 넘는 거대한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런 의미에서 월가점거운동에 대한 고무찬양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할 것이다. 월가점거운동에 대한 많은 책들은 시작일 뿐이다. 아직은 참여주체들의 참관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이 거대한 운동을 어떤 틀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으며, 프랭크가 비난한 출세주의자들이나 강단좌파에게 덮어씌우기에 너무나 큰 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더 많은 이론화 작업이 집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월가점거운동의 정신에 반하여 운동을 대변하는 듯 행동한 소수의 지식인과 기회주의자들이 운동을 독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해방구 주코티 공원에 집결한 수많은 젊은 활동가들을 단지 참여를 위한 참여를 즐기는 버릇없고 개념없는 무정부주의 한량으로 매도하는 것은 정신분열증적 발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천리길을 멀다고 투쟁에 참여한 이름모를 사람들, 처음으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데모 한번 없었던 시골 구석에서 처음 피켓을 들고 텐트를 쳤던 사람들, 미국의 제국/자본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 미국이 아니라 지구상 전역에서 해방의 희열에서 연대를 표시한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참여만을 즐겼는가? 프랭크의 감정적 독설은 유의미한 비판이라기보다 월가점거운동에 온몸으로 참여한 미국민중과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한 전세계 민중에 대한 히스테리이자 악질적 모독이다.
공권력과 보수언론에 면죄부를! - 점거운동은 저절로 소멸했다?
“위대한 서사시는 짧게 막을 내렸다. 공원에 진을 치고 있던 시위대는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두 달 뒤 모두 빠져나갔으며, 고참 시위대가 움직이는 잔류 집단 몇몇을 제외하면 월스트리트 시위대는 모두 해산했다.”
토머스 프랭크는 마치 월가점거운동이 반대를 위한 반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운동방식으로 서서히 자멸한 것처럼 기술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월가점거운동은 프랭크가 누군가 한 참여자의 헛소리에서 뭔가 종말의 감을 느껴서 소멸한 것이 아니라, 경찰과 FBI, 연방정부 등 국가폭력의 지속적 폭력과 공격으로 소멸을 강요받았다. 오히려 여성시위자에 대한 경찰폭력, 브루클린 다리에서의 대량체포, 서부 오클랜드 총파업시의 경찰폭력 등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적 폭력이 오히려 월가점거운동의 성장을 자극했다.
월가점거운동이 정확히 2011년 9월 17일 주코티 공원점거에서 11월 15일 강제철거까지 주코티 공원을 중심으로 전개됐고, 그저 공원을 점거하고 헛소리를 떠든 것이 아니라, 대안적 미래를 구현하는 점거코뮌과 1퍼센트의 상징 월스트리트에 맞선 가두투쟁 양축으로 전개됐으며, 이 과정에서 수천명이 체포와 구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했다. 이에 대해 언론은 지속적으로 주코티 공원 점거자들의 위험을 강조함으로써 공권력의 주코티 공원 공격을 엄호했고, 점거가 이뤄진 주요도시 시장들의 대책회의는 동시다발적 탄압을 기획했다.
월가점거운동은 한편에서 경제위기에 맞서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많은 요구를 표현했고, 계급의 적을 적시하면서 투쟁을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했다. 주코티의 퇴거조치 이후에서 점거운동을 살리려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월가점거운동은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미국 전역의 수천개 도시, 과거 단 한번의 시위조차 없었던 시골 읍내까지 퍼져나갔고, 동부의 뉴욕에서 서부의 샌프란시스코까지 그야말로 전국적 투쟁이자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언론의 지속적 공격과 공권력의 체계적인 탄압이 필요했다. 월가점거운동은 결코 스스로 소멸하지 않았다!
월가점거운동과의 오도된 비교 - 풀뿌리운동 티파티에 찬사를?
토머스 프랭크는 티파티 운동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전문가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티파티에 비판적 경향이지만, 월가점거운동을 자신의 전공인 티파티운동과 비교하면서 자충수에 빠졌다. 외형상 유사성은 존재한다. 티파티 운동은 사실 풀뿌리 운동으로 포장한 공화당 우파의 정치공작에 가까우며, 반이민 인종주의적 편견을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압력으로 포장하는 (준)극우정치운동이며, 광범한 공화당 우파네트워크로부터 재정적 지지에 의지했으며, 지금은 수십개의 중첩적 네트워크로 존재하지만 실질적 동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프랭크가 말하는 티파티의 성과는 의원당선, 부통령후보 등 공화당 우파의 주장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반면, 월가점거운동에 대해선 치밀하게 냉소적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월가점거운동도 민주당과 오바마에 빌붙어 상하원 의원을 배출하고, 그들에게 로비해서 뭔가 근사한 법률을 제정해야 되는가?
프랭크는 의원당선, 부통령후보 등 티파티의 성과에 대해서 공화당 우파의 주장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는 반면, 월가점거운동에 대해선 치밀하게 냉소적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월가점거운동도 민주당과 오바마에 빌붙어 상하원 의원을 배출하고, 그들에게 로비해서 뭔가 근사한 법률을 제정해야 되는가? 바로 그런 시나리오야말로 월가점거운동의 자살이 아닐까? 월가점거운동은 출발부터 민주당 등 제도정치의 영향력 밖에 존재했고, 어떤 노조나 정당도 독점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월가점거운동은 2011년 가을 동요없이 완강하게 전국적 저항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마치 좌파와 우파의 포퓰리즘으로 몰아가는 프랭크의 논리는 의도와 관계없이 티파티와 월가점거운동이 동일한 차원/심급의 좌우운동으로 묘사하고, 더 나아가 무정부주의/절대자유주의(libertarianism)을 철학적으로 공유한다는 속류적 진단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가 지목하는 일부 무정부의적 경향이나 강단좌파들이 월가점거운동을 독점할 수 없다. 캐나다의 진보잡지 <애드버스터스>가 월가점거운동을 제안하긴 했지만, 그 명성을 독점할 수 없듯이, 월가점거운동은 모든 지식인과 논평가들의 예상과 상식 밖에서 등장했고, 프랭크가 그토록 신뢰하는 ‘좌파에 뿌리를 둔 대중사회운동’(?)이 결코 쟁취할 수 없었던 1퍼센트에 맞선 대중투쟁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사실이다!
월가점거운동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2012년 대선과 총선은 이제 모두 끝났다... 그리고 월스트리트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한다... 그리고 굳건하게 좌파에 뿌리를 내린 대중사회 운동만이 신자유주의 세계의 막을 내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극명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은 그런 과업을 이뤄내지 못했다.”
문자 그대로 월가점거운동 시즌 1은 끝났다. 프랭크의 지적대로 월가점거운동이 월가의 금융자본을 폐지하거나 미국의 자본주의/제국주의를 폐지하는 혁명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월가점거운동이 아무 성과 없이, 참여를 즐기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파티로 끝났는가?
참여자든 관찰자든 누구든 월가점거운동을 비판하고 진단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비판의 자유와 사상은 자유는 있으니까.(그것도 오큐파이의 핵심 주제이자 요구였다!) 그러나 그 잘난 좌파에 뿌리내린 대중사회운동이 월가점거운동을 우회해서 해방의 전망을 찾을 수 있을까? 오히려 문제는 그 대중사회운동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월가점거운동에 제대로 결합하지 못하고 그 이후에도 그 성과를 이어받아 제대로 투쟁하고 있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닌가?
월가점거운동의 성과는 비가시적으로 보이더라도, 2011년 아랍의 봄에 이어 월가의 가을이 보여준 바는 제국의 중심부에서 계급투쟁의 현실성과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제국의 중심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 파열구를 내는 투쟁은 지난 세기 동안 30년대의 점거파업, 60년대의 흑인민권투쟁과 베트남 반전투쟁의 정점을 예외로 하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고, 특히 레이건의 집권 이후 상상에서조차 추방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월가점거운동으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반세계화운동/세계사회포럼의 테제/슬로건이 제국/자본의 중심부에서 대중투쟁으로 그 가능성이 확인됐는데, 국가폭력 앞에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지금 당장 숨죽인다고 해서 그 거대한 투쟁의 등뒤에서 비수를 꽂을 것인가? 아니면 월가점거운동 시즌2를 준비할 것인가? 대랍은 프랭크 자신의 몫이다. 그러나 역사는 굳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변덕스런 사이비 비판에 동조한 지식인과 활동가들 또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월가점거운동이 폭발로 모두가 긴장했다. 1퍼센트와 99퍼센트! 1퍼센트는 운동의 폭발력과 체제의 붕괴가능성에 전율했고, 99퍼센트는 해방의 가능성에 전율했다. 지금까지 어떤 운동이, 어떤 투쟁이 제국의 중심부를 이토록 강력하게 타격했던가?
월가점거운동은 경제위기 시대에 위기의 주범을 적시하고 대중투쟁에 계급적 의제를 부여하면서, 미국 전역을 강타한 사상 최대의 운동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주제가 소멸하지 않은 만큼, 이제 투쟁과 운동이 시작된 것이지 종결된 것이 아니다. 다음 투쟁, 그 투쟁의 주체들이 과연 월가점거운동의 성과와 과제를 결코 우회할 수 없다. 외견상 대립적으로 보이는 개인의 자율성과 집단적 토론을 결합시킨 월가점거운동은 역사적으로 68혁명의 소중한 유산을 승계했으며, 이는 미래의 운동 또는 좌파의 프로젝트에 필수적 부분이 될 것이다. 보이지 않은 무대 뒤에서 이뤄지는 자칭 지도부의 결정 아니라, 대중 스스로의 결정과 결의로 투쟁하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월가점거운동은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누가 함정에 빠진 것인지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사족: 번역 혹은 반역? 편집자의 월권?
기본적으로 원문과 번역 사이에는 어떤 견해나 기조상의 차이가 감지되지 않는다. 원래 텍스트의 다른 버전이 있는지 여부를 밝히지 않아 알 길은 없지만, 원문과 번역문은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달라서 곤혹스러웠다. 위의 인용문에서 “나온 좌파에 뿌리내린 대중 사회운동”은 원문에서 발견할 수 없고, 프랭크는 1930년대 플린트 점거파업, 196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을 언급했다. 아마도 미국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배려일 수 있겠지만, 의도하지 않은 심한 왜곡일 수 있다. ‘좌파에 뿌린 대린 대중적 사회운동’이란 외피 없이 20세기의 주요한 투쟁인 30년대의 노동자 대투쟁, 1960년대의 흑인민권운동과 신좌파 반전운동을 적시하면 2011년 월가점거운동의 역사적 맥락은 자명해진다. 바로 그러하기에 무기력한 좌파를 뛰어넘은 월가점거운동이야말로 훨씬 더 좌파적이고 훨씬 더 대중적인 21세기의 거대한 투쟁이자 운동이기에, 이런 식의 번역/반역 또는 편집자의 월권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의 이중적 자살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