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장발장과 헬렌 켈러

[기고]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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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처자랑 총각이 사랑하는 이야기가 곁들여진, 빵 한 조각도 훔치고, 은 식기도 훔친 전과자가 개과천선을 한 이야기. 아니면 ‘장발의 프랑스 사람이 주인공이라서 제목이 장발장이었나?’ 정도로 기억되는 이야기. 이렇게 유년기에 얼핏 읽은 '동화'로만 기능한 <장발장>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가져다준 충격은 어쩌면 신선하고도 불온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강고한 반공-국가주의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반도 남쪽에서 그것도 소위 ‘보수 대결집’이라는 이벤트를 겪은 직후에 흥행 1위를 이어가고 있는 영화의 주제곡이 무려 “인민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인 현실을. 이거 ‘종북세력’이 대단한 암약을 한 덕에 조선 땅 온 산하가 붉게 물들 지경에 이르렀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다.

<레미제라블>의 주인공들은 제목 그대로 ‘비참한 자들’이다. 장발장이든, 코제트든, 마리우스든, 심지어 자베르든 실패한 혁명 이후 왕정복고 시대를 살아가는 처참한 인민들이다. 이 이야기에서 체제의 배후에 있는 자들은 등장하지 않고, 그 체제 아래에서 신음하거나, 체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들만이 등장한다. 그렇게 비참하게 이름 없이 살아가던 이들이, 역사에 남겨지지도 않을 만큼 미미하게, 하지만 목숨을 걸고 저항한 이야기. 동화 <장발장>을 읽고 자란 이들은 절대 알 수 없었던 이야기가 사실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장발장>과 <레미제라블> 사이에 존재하는 널찍한 간극을 느낀 이들이라면, 지배체제는 그 체제의 필요에 의해 호명된 부분만 편취해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그 체제하의 신민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국가주의 국가관으로 무장한 권위적인 정권이 체제를 인수할 때 거의 예외 없이 언론장악과 역사 개정을 통한 이념공세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장발장>과 <레미제라블>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는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실제 이야기 간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느냐’를 단적으로 보여줄 때 습관적으로 인용하는 이야기였으나, 영화의 갑작스러운 흥행 탓에 썰 풀 거리가 하나 없어졌다는 점은 애석하다. 하지만 그런 예가 무궁무진한 덕에 너무 실망할 이유가 없다는 점은 웃픈 일. 여기 또 하나, 이런 상황에서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가 있다.

여러분은 헬렌 켈러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사진의 헬렌켈러 이미지는 <나의 생애> 이후 헬렌 켈러의 생애를 다룬 책, <Helen Keller : Her Socialist Years>의 표지이다.

삼중고->어릴 때 모범적으로 동화책을 읽은 사람들이다.

설리반 선생님의 노고->유치부 시절 꽤나 칭찬 많이 받은 사람들이다.

뇌수막염(meningitis) 때문에 시청각 모두 잃은 불행한 이->의덕후의 기질이 다분하다.

그런데 뇌수막염 때문에 시각과 청각을 잃은 가녀린 소녀가 삼중고를 겪던 중에 설리반 선생님을 만나 그녀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인해 손바닥으로 언어를 인식하고 말을 하게 된 그 소녀는 그 이후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꽃다운 나이에 순정만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죽었을까?

잘 기억해보면, 헬렌 켈러 이야기 말미에, 그녀가 노년에는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그러면 죽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 소녀가 갑자기 할머니가 되는 타임워프를 겪는 사이의 일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헬렌 켈러는 미국 역사상 사회주의 운동이 가장 거센 물결을 형성했던 20세기 초반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쉽게 비유하면 당대 미국의 김진숙 지도위원과 같은 인물이 바로 헬렌 켈러였다.

하버드대학의 여자대학이었던 래드클리프 대학에서 수학하는 동안 헬렌 켈러는 닥치는 대로 손으로 읽고, 입으로 쓰면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썼다. 이미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그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자신의 유년기를 다룬 자서전 <나의 생애>를 써서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정립한 사상에 기반하여, 사회당에 입당한다. 이후 노동운동, 반인종주의운동, 반전운동, 장애인 인권 신장 운동에 투신한다. 성녀, 기적, 천사로 헬렌 켈러를 호명하던 주류 언론은 심신이 미약한 장애인이 사회주의자들의 준동에 이용당하고 있다며 끊임없이 공격한다. 이에 맞서 헬렌 켈러는 복수의 진보적 매체를 통해 칼럼을 개재한다. 그 중 한 부분.

"내가 사회봉사나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여러 신문들은 나를 두고 '시각장애인들의 성녀'라거나 '기적의 여인'이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우리 주변의 빈곤과 산업 체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그 언론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장애인을 도와주는 것은 갸륵하고 성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인간이 안락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황한 꿈이며 그 실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의해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이 35세가 채 되지 않던, 그중 30%는 25세 이전에 죽던 ‘비참한 이’들, ‘레미제라블’의 시대에 헬렌 켈러는 다시금 더욱 전위적인 노동운동가로서 인생의 행로를 전환한다. 사회당이 노동운동에 있어서 지나치게 온건하고 정치적으로 간을 본다는 이유로 사회주의/무정부주의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래디컬한 노동운동을 전개했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에 일원으로 가입하여 총파업과 쟁투의 대열에 앞장서 참여했으며 연설가로서의 면모도 여기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의 독재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IWW가 와해되고 그녀의 운동은 동력을 잃었지만, 철학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극우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1940년대 후반, IWW 시절 동지이자 미국 공산당 당수였던 엘리자베스 플린을 포함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일거에 수백 명씩 투옥되자 이미 70대를 바라보던 헬렌 켈러는 계속해서 옥중의 동지들에게 면회를 가며 대통령에게 이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폴 발레리의 잠언은 이런 시대에 더욱 큰 울림을 자아낸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오늘 이후, 그러니까 2013년 이후는 어쩌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체제는 그 체제에 유리한 것만 호명한다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하자. 진보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회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그렇기에 우리는, 빵을 훔친 장발장과 자베르 사이의 ‘추적자’급 스릴러와,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연애를 다룬 로맨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큰 비중으로 원전에 쓰인 앙졸라, 에포닌, 그랑테르, 가브로쉬 그리고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이름 없는 혁명이 우리의 유년에서 거세된 채 <장발장>이라는 동화로만 존재하게 된 이유를, 평생을 실천하는 진보주의자로 살았던 헬렌 켈러를 ‘삼중고’와 ‘기적의 성자’로만 기억하게 된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 노동자

    스탈린의 독재?

  • 환자

    IWW는 1917년 결정적으로 와해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애초의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전쟁 개시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압을 받았네요...따라서 그 시기는 '독자재 스탈린'이 출현하기 전이네요. 그리고 본부는 미국입니다. 뭐 이런 건 인터넷 뒤지면 나오는 사실인데, 너무 가볍게 쓰신 건 아닌지...
    미국 공산당 당수에 엘리자베스 플린이라는 이름도 안나오는 뎅...(위키피디아 참고)

  • 보스코프스키

    엘리자베스 플린의 위키 영문 면... http://en.wikipedia.org/wiki/Elizabeth_Gurley_Fly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