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법(?)”, 이 말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습니다. 2011년 부산에서 노동운동의 한 선배께서 남몰래 85호 크레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 때 그 불안이 다시 엄습해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나 가끔 앉을 법한 그런 곳에 노동자들이 올라가야 호소가 되는 시대가 새삼 참담합니다. 아무리 법과 정치 위에 자본이 군림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라지만, ‘당신은 정규직’이라는 대법원의 판결까지 받고도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고 판결을 인정해달라고 회사와 싸워야 하는 노동자, 그가 이 지상에는 더 이상 호소할 곳이 없다고 말하기까지 무엇을 했나 싶습니다. 한국사회의 거대 집단 가운데 그래도 민주노총만큼 비정규직 투쟁과 함께한 집단이 없지 않냐 항변하면서도, 자부할 것도 딱히 없다는 자책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한 개인의 무력감은 위로와 격려로 감싸야 할 일이지만, 민주노총의 무기력은 한편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가장 먼저 펼친 나라는 쿠데타 정권, 자유와는 가장 거리가 먼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독재 정권이라고 합니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특징은 못 가진 계층에서 가진 계층으로 소득을 이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용 없이도 재벌은 성장하고 노동자와 민중의 삶은 불안정하고 불평등합니다. 이 특징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 비정규직 노동자가 1천만에 육박한 시대. 1천만의 불안과 절망에 누구보다 먼저 응답해야 할 이들은 누구입니까? 내가 대통령감이라고 나서는 이들 모두가 비정규직 대책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정치로부터 버림받았던 쌍용차의 어떤 해고노동자의 말처럼, 그 약속들은 허공을 떠다니다가 선거 후엔 쓰레기통에 처박힐지도 모릅니다. 특히, 노동 없는 허울뿐인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표나 끌어 모으려는 그녀의 수첩엔 비정규직의 한숨 한 자락도 적혀있지 않을 것이 빤합니다. 또한 수첩의 비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사람이 먼저인지 표가 먼저인지 끝내 두고 봐야 할 이와 ‘진심의 정치’를 하겠다면서 노동에 대한 진심은 도무지 읽을 수 없는 색각에 무슨 기대를 해야 할 지 난감합니다.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응답할 이들은 우리 국민들이고 노동자들이고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들이지 싶습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러 시민사회단체들과 ‘공동행동’을 다짐하고 비정규직 없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연대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경제적 차별과 불안으로도 모자라 정치기본권인 투표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이들의 목소리와 요구가 실현되는 것이야말로 경제민주화의 초석이며 복지의 출발입니다. 노동자인 부모 밑에 자라 역시 노동자로 살아야 할 우리와 노동시장에서 정리되고 대기업의 등살에 창업과 폐업을 전전해야 하는 영세자영업자, 이 모든 우리의 노동이 존중받고 차별받지 않도록 서로의 호소에 희망으로 응답할 때입니다.
집단은 항상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합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집단은 사실, 문제 자체를 인식조차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진정 문제로서 인식하는 집단은 이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뜻을 내포한 말입니다. 우리 사회는 비정규직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물론 공감하는 흉내를 내는 일부 정치집단을 제외한 말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분명합니다.
10월 27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바라는 10만개의 촛불을 밝히자는 간절한 희망과 서글픈 기대로 매일 대한문 앞에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저 또한 매일 나갈 수 없지만, 나오는 사람들이 매일 생기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고 그 희망을 누구라도 함께 키워주시길 바랍니다. 27일 서울역에서 출발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를 향하는 ‘희망촛불행진’, 27일 이전에라도 대한문 앞에서 ‘희망촛불행진’을 서둘러 예매하셔도 좋고, 27일 단 하루라도 서울역 현장에서 ‘희망촛불행진’에 탑승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