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투병 때문이었는지 울음소리보다는 고요한 정적이 조문하는 내내 고여 있었다. 유가족만이 지키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의 삶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했던 장례풍경에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참았다. 선해 보이던 고인의 아들은 돌아가실 때까지 병원비를 해결하느라,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용인 어딘가에서 일한다고 했다. 유산이라곤 빚밖에 없는, 오롯이 가난만 물려받은 젊은 상주의 어깨가 내내 무거워 보였다. 오열도, 떠들썩함도 없이 생전에 과묵했던 고인의 성정처럼, 물기가 바싹 마른 공기 같은 며칠이었다.
고인의 발인이 있던 날, 쌍용차 김정우 지부장은 스스로 곡기를 끊었다. 곡기를 끊어서라도 이어지는 죽음을 멈출 수 있다면, 희망 한 움큼 들지 않는 골방의 동료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스스로를 희생하겠다는 마지막 결의의 마음이었다. 끝장단식을 알리는 기자회견 내내 김정우 지부장을 쳐다볼 수가 없어 나는 시청광장이 보이는 방향으로 돌아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심히 지나치는 발걸음들, 간혹 멈춰 서서 관심을 갖는 듯하다. 자신의 목적지로 이내 걸음을 내딛는 수많은 발걸음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는 웃으면서 배가 고프다고 했다. 난 그럴 때마다 심통이 난 사람처럼 툴툴거리고, 잔소리를 해댔다. 새벽공기에 찬바람이 박힌 무거운 몸뚱어리로 아침을 맞을 때 느끼는 공복감이 너무 싫었다. 밥을 먹으러 갈 때마다 누가 뒤에서 당기는 느낌이 들어 먹고 나면 꼭 체한 듯 답답해지는 느낌, 몰래 도둑 밥을 먹고 올 때면 냄새가 풍기지는 않을까 신경 쓰는 게 너무 힘들었다. 김정우 지부장의 얼굴은 조금씩 야위어가고 눈빛은 형형해져갔다.
그의 옆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란 신문사회면 한 귀퉁이에 쓰여 있는 활자로만 인식하던 평범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화들짝 놀란 사람들, 이제는 누구보다도 해고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가 평범한 일상을 찾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없는 돈에, 밥과 반찬을 해서 해고자들에게 집 밥을 먹이던 사람들,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그 늦은 시간 대한문을 꼭 들리던 사람들, ‘정리해고는 원래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던 사장님에서 해고자들의 친근한 형, 누이가 되어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음료수를 슬며시 놓아두기도, 허겁지겁 모금함에 지폐 몇 장을 쑤셔 넣으며 연신 미안하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이제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쌍용차 문제를 해결하라며 함께 하루, 이틀, 사흘씩 동조 단식을 자발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쌍용차 해고자들과 함께 싸워준 또 다른 해고자들도 있었다. 단식할 때는 방부제가 들어간 치약을 쓰면 안 된다며 일요일 서울 시내를 돌아다녀 한군데 열려있는 생협 치약을 사오던 재능교육 해고자, 그냥 죽염은 안 된다고 9번 구운 죽염을 멀리서 부탁해서 가져오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직은 괜찮지 너스레를 떨지만 안색을 살피는 노동자들, 누구보다도 지부장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들. 그들이 또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근 1년을 따뜻한 아랫목 구경을 못해본 노숙투쟁으로 하루하루가 견디기 어려운 조건이지만, 그가 아직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건 아마도 그의 옆을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오는 10월 20일 토요일 단순히 그의 옆을 지키고자 함이 아닌, 이 땅에서 정리해고를 철폐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함께하는 마음으로 동조단식에 들어간다. 77명의 동조단식, 우리가 쌍용차 해고자다!
밥 먹고 산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세상, 이명박 정부 기간 발생한 정리해고자 10만 명 중 소리 없는 죽음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본다. 그 소리 없는 죽음은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의 죽음과 다른 것일까? 이 땅에서 해고 없는 세상을 염원하는 모두가 함께했으면 좋겠다. 참 밥 먹고 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