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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자본>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기고] 강신준 교수의 ‘서문: 유물론과 추상화, <자본>의 구조’의 사실 왜곡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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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천적 유물론을 기계적 유물론으로 둔갑

1) 의식적 실천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기계적 유물론이라는 근거로 <자본>의 다음 문구를 제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운동을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즉 인간의 의지나 의도와는 무관한, 아니 오히려 이들 의지나 의식·의도를 규정하는 그런 법칙이 지배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다음 문장은 인용하지 않고 있다. 불어판의 해당 부분 전부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사회의 운동을 역사적 현상들의 자연적 연쇄로, 인간의 의지, 의식 및 의도와는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의 의지, 그의 의식 및 그의 의도를 결정하는 법칙들에 따르는 연쇄라고 생각한다. (...) 만약 의식이라는 요소가 문명의 역사에서도 역시 이차적인(secondaire) 역할을 한다면, 문명을 대상으로 하는 비판은 어떠한 의식 형태도, 어떠한 의식적 사실도 그 기초로 삼을 수 없음이 자명하다. 문명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점으로 될 수 있는 것은 관념이 아니고 오히려 그 관념의 외부에 있는 현상이다. 오로지 그 현상만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의 의식, 의지나 의도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단지 그것이 일차적이 아니라 이차적인 역할을 할 뿐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문명 비판에서도 의식에 대한 비판은 이차적 또는 부차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의식의 이런 역할을 긍정하지 않는다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실천적 유물론이 아니라 기계적 유물론이 된다1). 그러나 위에서 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인간 실천, 즉 의식적 요소의 역할을 긍정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강신준 교수가 왜곡하는 것과 같은 기계적 유물론이 결코 아니다.

2)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생성과정에 있는 때에도 변혁은 과제가 된다!

마르크스는 또한 “인류는 그가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제기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과제 자체가 그 해결의 물질적 제 조건이 이미 현존하고 있거나 또는 적어도 생성과정에 있다고 간주되는 때에만 출현하기 때문이다.2)”라고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역사를 창조한다. 그러나 선조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일정한 물질적 조건들을 기초로 해서만 자기 시대의 역사를 창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상적 공산주의자들처럼 일정한 물질적 조건이 조성되지 않더라고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공산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주관주의, 주의주의로 일탈하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관점의 요지이다.3)

그런데 이것을 확대하고 왜곡해서 그런 관념적인 요소, 인간의 실천적인 요소들과 무관하게 역사가 숙명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경제결정론이다. 마르크스가 그런 경제결정론자인가? 마르크스는 분명히 의식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변혁의 물질적 제 조건이 현존하고 있는 경우뿐 아니라 “생성과정에 있다고 간주되는 때에도 변혁이 과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만약 의식의 적극적 역할이 없다면, 그래서 사회는 그 발전이 충분히 성숙한 경우 이외에는 변혁이 불가능하다면, 변혁의 물질적 제 조건이 겨우 생성과정에 있다고 간주되는 때에 변혁이 사람들의 과제로 출현될 수 있겠는가?

[출처: 경향신문 캡처]

3) 자본주의의 성숙을 강조하는 진정한 이유는 사회주의 변혁의 포기를 설교하는 것

마르크스는 또 역사가 정해진 발전단계, 예컨대 원시공산제 사회에서부터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부르주아적 등의 사회구성체들을 반드시 거쳐야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한 바도 없다. 다만 “대체로 말해서” 인류역사가 그렇게 발전해 왔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4). 그런데 강신준 교수는 이런 마르크스의 말을 한 부분만 잘라내어 “의지를 지배하는 필연의 자연법칙”운운하며5) 마르크스가 마치 사회구성체의 그 같은 발전단계를 반드시 매 단계가 충실하게 성숙할 때까지 모두 다 거쳐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이런 왜곡 위에서 그는 소련이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다음 사회주의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곧바로 사회주의로 나갔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도 쿠바도 반드시 실패할 거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보나마나다. 그 두 나라 모두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한 다음 사회주의 혁명을 행한 것이 아니므로!

역사적 사회주의 실패의 문제나 현존 사회주의의 미래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므로 넘어가겠다. 역사적 사회주의의 실패를 근거로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으면 사회주의가 인류의 과제가 될 수 없다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당장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으므로, 오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되므로, 섣부르게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떨쳐나서지 말라고 설교하는 것밖에 다른 의미가 없다. 역사적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래 자본주의가 급속히 전 지구적으로 세계화한 오늘날, 사회주의로의 변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제 조건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거나 (제국주의 모국들에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러한 제 조건이 빠르게 생성과정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상의 부분에서 강조는 인용자)

2. 거꾸로 선 마르크스의 연구의 목적과 방법

1) 메커니즘 규명이 아니라 성숙도 측정이 목표라고?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연구와 서술의 목적과 방법을 왜곡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경제구조가 어느 정도 성숙하였는지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마르크스의 방법은 자본주의의 성숙도 측정 방법이 아니라 그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방법이었다6). 다시 말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연구 목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행법칙(가치법칙과 그것의 잉여가치법칙으로의 전환)과 그 발전법칙(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 법칙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법칙)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2) 강신준 교수의 추상화는 마르크스의 추상화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형식적 추상화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해 “개별적인 차이를 사상하고 공통점을 추려내는 것”을 마르크스의 추상화라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땅 위에서 보는 구체적인 차이점들을 현상이라 부르고 하늘 높이에서 보는 공통된 모습을 본질이라고 부릅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추상화는 바로 현상을 넘어서 본질을 찾아내는 과학적 방법입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추상화는 이런 부르주아적, 형식적 추상화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이하에서 『비판』) 서문에서 자신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전에 대충 쓴 일반적 「서설」을 나는 공표하지 않겠는데, 그 까닭은 보다 자세하게 숙고해 볼 때, 앞으로 증명되어야 할 제 결과를 선취하는 것이 혼란을 야기할 것 같고, 또한 나를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독자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상승하기로 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는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상승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인정하고 그 방법을 버릴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식의 추상화 방법은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하에서 『요강』) 「서설」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전형적으로 부르주아 학자들의 방법이다7). 이렇게 표면에 드러나 있는 수많은 개별적인 것들 가운데서 공통적인 것을 추려내는 방법으로는 사물의 내부에 있는 모순을 찾아낼 수 없다.

3) 공통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이라고?

강신준 교수는 또 구체와 일반의 관계를 현상과 본질의 관계와 동일시하고 있다.
일반은 개별 및 특수와 범주적으로 구별된다. 반면 구체는 추상과 범주적으로 구별된다. 그리고 물론 현상은 본질과 범주적으로 구별된다.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구체적인 차이점을 현상이라고 말하고 공통된 모습을 본질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개별적인 것은 현상이고 공통된 것은 본질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개별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이 같은 뜻이 아니고, 공통된 것과 본질적인 것 역시 같은 뜻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찾아내었다고 해서 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공통적인 것은 상품교환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가장 공통된 것은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착취하는 생산관계이다. 후자가 본질에 가깝고(즉 본질적이고) 전자는 현상에 가깝다(즉 현상적이다).

4) 서술의 방법을 추상화로 바꿔치기!

더구나 그의 왜곡은 더욱 나아간다. 너무 심할 정도로! 그는 마르크스가 추상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고 왜곡하고 있다.

“연구는 소재를 자세히 검토하고 그것의 갖가지 발전 형태를 분석해 그 내적 연관을 찾아내야만 한다. (...) 그런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서 이제 소재의 생생한 모습에 관념이 반영된다면 그 생생한 모습은 하나의 선험적 구성과 관련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강신준 교수가 인용한 부분은 마르크스가 추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 부분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방법인 변증법에 대해 말하면서, 둘 다 변증법적 방법이지만, 연구방법과 서술방법이 다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을 강신준 교수는 느닷없이 그 일부를 잘라내어 인용한 다음 추상화에 대한 설명이라고 바꿔치기 하고 있다. 멋대로 일부를 자르지 않은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물론 서술 방법은 형식상으로 연구방법과 달라야 한다.] 연구는 소재를 자세히 검토하고 그것의 갖가지 발전 형태를 분석해 그 내적 연관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 작업을 모두 마친 뒤에야 비로소 현실의 운동이 총체적으로 서술될 수 있다.] 그런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서 이제 소재의 생생한 모습이 관념적 복사물로 반영된다면 그 복사된 환영(幻影)은 (사람들로 하여금/역자) 하나의 선험적인 이론-구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되게 만들 수 있다.”([] 안은 강신준 교수가 임의로 잘라 낸 부분. 불어판에 의거해 번역을 수정했다.)


5) 마르크스의 추상화는 내재하는 모순을 찾아내는 것

마르크스가 <자본> 1판「서문」에서 추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상품의 가치형태 분석과 관련해서이다. 관련 부분을 옮겨보자.

“첫 부분이 항상 어렵다는 것은 어느 과학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제1장, 특히 상품분석이 들어 있는 절을 이해하기가 가장 힘들 것이다. 나는 가치의 실체와 가치량의 분석을 될 수 있는 한 쉽게 하였다. 화폐형태로 완성되는 가치형태는 매우 초보적이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혜는 2,000년 이상이나 이 화폐형태를 해명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한 반면, 훨씬 더 내용이 풍부하고 복잡한 형태들의 분석에는 적어도 거의 성공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발달한 신체는 신체의 세포보다 연구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경제적 세포형태다. 겉만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이 형태의 분석은 아주 사소한 것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작은 것들은 미생물 해부학이 다루고 있는 그런 종류의 작은 것이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가 사용한 추상화의 방법은 미생물의 해부학 같은 치밀한 분석의 방법이지 비행기를 타고 해운대 모래사장을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한가한 관조의 방법이 아니다. 표면을 한 바퀴 둘러보고 공통점을 추출해 내는 방법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 연관, 특히 모순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그렇다고 물리적, 화학적 방법을 사용할 수도 없다. 오직 개념을 도구로 해서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사물이 내적으로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 꿰뚫어 보고 뽑아내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두 요소로,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밝혀내는 것처럼! 이처럼 개별적 차이를 사상(捨象)하는 방법이 아니라 연관과 모순을 찾아내는 정신적 작용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추상이고 그 정신적 작용 능력이 추상력이다.

3. ‘<자본>을 읽는 방법, 주의사항’에 대하여: 연구와 서술의 방법이 하늘(본질)에서 땅(현상)으로 내려오기라고?

마르크스가 <자본>을 쓰면서 1권을 자본의 생산과정, 2권을 자본의 유통과정, 3권을 자본의 총과정으로 저술했다. 그런데 강신준 교수는 1권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제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 1권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 아니라 공장 속으로 들어가서 들여다 본 모습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표층에서는 상품-화폐관계밖에 보이지 않는다. 땅 위에서 보든 하늘에서 내려다보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서는 자본이 어떻게 출현하고 재생산되는지 나아가 그 과정에서 어떤 모순이 발생하고 전개되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1권이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장 속으로 들어가서 자본의 발생과 그 운행법칙 및 발전법칙을 서술한 책이라면, 2권은 자본주의의 표층세계에서 자본이 어떻게 노동생산물로부터 상품과 화폐로 형태를 변경하여 자기를 실현하고 다시 생산과정으로 되돌아오는지를 고찰한 책이다. 그래서 2권의 주요내용은 자본의 순환과 사회적 재생산 표식이다.

그런데 2권이 1권보다 하늘에서 땅으로 관찰의 고도가 더 낮아졌다는 것은 무슨 황당한 이야기인가? 공장이라는 자본주의의 심층부로부터 시장이라는 자본주의의 표층부로 올라왔는데 말이다.

또 3권은 땅으로 더 내려왔다는 데, 3권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자본분파 상호간의 이윤 분배문제이다. 생산자본과 상품거래자본 및 화폐거래자본 사이에, 또 기업가 이윤과 지대 및 이자 사이에 어떻게 분배가 이루어지느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본과 임노동 사이에! 이 부분은 2권의 유통과정과 1권의 생산과정을 연결시키는 부분에 대한 연구이다. 그러므로 굳이 표고를 따지자면 1권과 2권 사이이지 그 위도 그 아래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1, 2, 3권의 구분을 자본의 운동 중에서 어떤 과정을 살펴보았는지가 아니라 어느 높이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내려다보았느냐 하는 문제로 둔갑시키고, 높은 데서 내려다볼수록, 개별적 차이를 사상하고 일반적인 것을 추출해 낼수록,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악한다고 말하는 것은 실로 코미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 강신준식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변증법 비교

강신준 교수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해 “사물의 운동법칙을 성숙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변증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변증법은 그 신비로운 형태로 독일에서 유행하였다. 왜냐하면 변증법이 현존하는 것을 찬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 상태, 운동 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진행이 모순들로 꽉 차 있다는 사실은 산업 활동의 주기적 순환 - 이것의 봉우리가 전반적 공황이다 - 을 통하여 실무적 부르주아지에게 매우 분명히 알려지고 있다. 이 전반적 공황은 비록 아직은 그 초기 단계에 있지만 또다시 박두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그 영향권의 전면성과 그 작용의 강도에 의해 새로운 신성(神聖) 프러시아-독일 제국의 졸부들의 머릿속까지 변증법을 새겨 넣을 것이다.”8)


과연, 인간의 양심을 가지고, 성숙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강신준의 변증법과 모순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5. <자본>이 자본주의 비판보다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전망과 건설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다?

<자본>은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을 비판한 책이며(그래서 부제가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과 운동법칙 그리고 그것의 필연적 붕괴와 그 다음에 도래할 사회에 대해 밝힌 책이다. 그런데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가 아니더라도 쌍용자동차나 한진중공업 같은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본>의 주 내용은 미래사회의 전망과 건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근거로 그는 마르크스가 당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다른 사람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지칭하면서 자신과 구별하려 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만 하고 그 이후에 대한 전망과 건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던 반면, 마르크스는 비판만 하지 않고 전망과 건설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자본>과 마르크스에 대한 황당무계하고 완전한 왜곡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왜 그들에게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딱지를 붙였는가? 그 시대의 많은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철저하게, 발본적으로 비판하지 않으면서 이후 사회의 전망과 건설에 대해 많은 공상적 이야기를 늘어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도 마르크스 연구자라는 사람이 사실을 완전히 뒤집는 이런 황당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6. 자본주의 비판이 쉽다?

강신준 교수는 자본주의 비판은 현장 노동자들이 더 잘 알고 있으므로 마르크스는 그 비판은 간단하게 하고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전망과 건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자 3,000쪽에 걸치는 방대한 책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은 자본주의 사회의 비밀, 즉 자본이란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사회적 관계임을 밝히고자 <자본>을 저술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비밀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물신주의 의식이 자본주의 사회에 지배적임을 폭로했다. 물신주의 의식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도 역시 그런 물신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단지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착취당한다는 것을 아는 문제라면 현장 노동자들이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현장 노동자들도 자연발생적으로는 자본을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자연적 ‘사물’로 이해하는 물신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한계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는 사회주의 변혁의식을 획득하지 못하고 체제 내 개혁 의식에 머무르게 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깨닫고 노동해방, 사회변혁으로 떨쳐나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자본에 대해 표면적으로 보이는 대로 자연적 ‘사물’로 생각하는 자본-물신주의를 떨쳐내고, 과학적 통찰력으로써 사회적 ‘관계’로,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사람들의 의지로 바꿀 수 있음을 각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장 노동자들은 지금이 바로 <자본>을 읽으면서 그러한 각성을 해야 할 때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 주

1) 마르크스의 유물론에서는 인간의 의식적 실천이 세계의 운동에서 결정적 지위와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천이 그것의 외적 조건으로 삼아야 하는 물질적 제 조건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등의 - 또한 인간의 장구한 역사적 실천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보시오.
2)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서문 중에서.
3) “빌리히는 사회발전의 합법칙성과 혁명 과정의 합법칙성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의 창건을 위한 특정한 물질적 조건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공산주의를 소수의 지원을 받아 단숨에 확립하고자 하였다.” 『칼 마르크스 전기』(소나무) 첫 째권 348쪽.
4)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서문.
5) 마르크스는 이와 관련된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정도가 높은가 낮은가는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법칙들 자체에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하여 관철되는 이 경향들 자체에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필연적으로 관철된다는 것이지 봉건제에서 반드시 자본주의가 생겨나는 것이 필연적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 법칙은 기계적인 엄밀성을 갖는 법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경향법칙이다.
6) 『칼 마르크스 전기』 첫 째권 385쪽 「경제학 연구」 절을 보시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 메커니즘을 밝혀내고 이 운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면서 결국 자본주의의 몰락을 낳게 될 법칙을 프롤레타리아에게 분명히 설명한다는 과제를 설정하였다.”
7) 사전에는 ‘추상’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대상으로서의 소여(所與) 전체로부터 특정 성질이나 공통징표를 분리하고 골라내는 정신작용”
8) <자본> 1권 독일어 2판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