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서문에만 있지 않다
지난 8월 초,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주관으로 ‘문화노동자’들이 모였다. 만화를 그리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만들고, 기타를 치는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의 ‘말’은 잠깐의 휴식도 없이 3시간 이상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오늘 못다 한 말을 위해 다음 모임 날짜를 잡았다.
작가들, 참 할 말 많은 이들이다. 창작에 관한 것뿐 아니라, 복지에 대한 부분도 저작권과 작가료(인세)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아직까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다. 바로 일러스트레이터(출판 매체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이 1년 전에 집단적으로 제기했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작년 6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성명서(‘누구를 위한 통큰 일러스트인가?’)를 발표했다. 말 많고 탈 많은 출판동네에서 이들의 성명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저 동네 어느 한 집에서 불거진 문제쯤으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는가? 작가들이 왜 그림 그리다 말고 한데 모여서는 성명서라는 걸 내놓고 출판 관련 동료들에게 지지를 요청했는지 말이다. 또한 1년이 지나 지금은 조용해진 (것처럼 보이는) 일인데 왜 다시 들춰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일까? 이들이 하고자 했던 말은 ‘일러스트 학원’에 관한 것이었고, 이들이 더는 말하지 않는 이유는 ‘명예훼손 고소’ 때문이다.
‘교육’이라 쓰고 ‘착취’라 읽는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들이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일러스트 ‘학원’이다. 그런데 학원에서 일러스트 교육만 하는 게 아니라 출판사에서 일을 받아 학원생들에게 그림을 그리게끔 하고 있어서 문제가 되었다.
학원생들로서는 이게 왜 문제인가 할 수도 있다. 그림을 배우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작업한 책이 결과물로 나와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경력이 싸인다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 학원생들은 선배들이 발표한 성명서에 크게 반발을 했다. 이해 못할 건 아니다. 출판계에 입문하기 위해 학원을 찾아갔고,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길을 닦아나가는 데 학원이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어쨌건 논쟁이 깊어지면서 문제의 본질은 가려지고 선배 일러스트레이터와 후배 일러스트레이터의 싸움으로 변질되어버렸다.
불똥이 어디로 튀었건, 여기에는 참으로 구조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출판사와 작가 간의 직접적인 계약이 점차로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중간업체(기획사, 에이전시, 학원 등)를 통한 간접계약 방식이 출판 시스템으로 자리 잡혀가고 있다는 점이다.
2010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를 비롯하여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과 출판노동자들의 커뮤니티인 ‘외주출판인회의’와 ‘출판노동자협의회’에서 <외주출판노동자 실태조사 사업>을 시작하였다. 실태조사 대상으로는 ‘외주편집자, 외주디자이너, 글작가, 그림작가, 번역가, 대필가’ 등이었는데, 작가들을 왜 외주출판노동자의 범주로 넣느냐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출판산업 외주화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는 그럴 수 있다. 출판사가 외주화하는 업무가 편집과 디자인에 한한다고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출판사는 편집과 디자인 업무만 외주화하지 않는다. 이미 기획업무도 작가고용도 외주화 해 왔다. 그저 이러한 외주화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가 없었기에 기획사나 에이전시를 통한 책 작업이 당연한 줄 받아들여져 왔을 뿐이다.
일례로 출판사가 기획사(또는 에이전시)를 통해 작가를 고용했을 시에 작가들은 기획사에 일자리 소개 명목으로 수수료를 지불한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기획사에 수수료로 30%를 지급하는데, 많게는 40%까지도 지급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은 출판사가 작가료로 100만 원을 책정했을 시 작가가 실질적으로 받게 되는 작가료는 70만 원에 불과하다는 소리다. 이것이 정말 정당하다고 보는가?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일러스트 학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이 지점과 맞닿아있다. 일러스트레이터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학원이 일감을 연결해준다며 홍보하면서 미래를 불안해하는 일러스트 지망생들을 모집한다, 그리고 ‘실무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학원생들에게 터무니없이 낮은 작가료를 지불하면서 출판사의 일을 시킨다. 이 과정에서 수수료까지 챙겨간다.
계약관계가 분명치 않아서 학원생들은 수수료로 얼마를 떼이는지 모르는 경우도 발생한다. 양질의 교육을 받아야 할 학원생들이 실무‘일’을 하느라 학습권을 침해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착취가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때문에 작가들은 학원들에 요구했다. 학원 본연의 목적인 교육에만 충실하라고.
일러스트레이터들로서는 작가 공동체의 기반이 훼손당하고 있다는 우려에서 낼 수밖에 없었던, 아니 반드시 내었어야만 했던 말이었다. 그것이 출판산업 외주화 시스템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 아래 시작된 발언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들의 집단적인 목소리가 없었다면 출판계 다단계하도급 문제, 중간착취 문제를 드러내는 건 근거 없는 끼워 맞추기 식의 주장일 뿐이라고 폄하되었을 수도 있다.
당신의 ‘명예’를 위해 작가를 경찰서로 부르지 마라
그런데, 지금, 그림작가들이 조용하다. 아니, 조용할 수밖에 없다. 일러스트 학원장이 그림작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개별 개별로 있다. 하나의 사업장에 모여서 매일 얼굴 맞대며 일하는 이들이 아니다. 불규칙하게 작업하는 이들이라서 마감이라도 닥치면 연락도 어렵다. 이러한 이들이 그나마 한데 모이는 공간이 있다면, 그건 ‘인터넷 게시판’이다.
이들은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올려놓는 방식으로 일감을 찾기도 하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되어 질의응답하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작가들과 교류를 쌓아나간다. 때문에 이들이 자신들의 부당함을 말하고,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해 의견을 나누는 데 있어 인터넷 게시판은 그 어떤 공간보다도 주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내용의 정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행위는 곧 작가들은 그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도 항의조차 해서는 안 된다고 협박하는 것과 같다.
이는 작가들에게서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다. 악질적인 번역회사에 뭣 모르고 당하는 동료들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 카페를 운영했던 번역가도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다. 출판인들의 대표적인 인터넷 공간에 올라온 한 출판사의 구인공고에 사실과 다르니 속지 말라는 댓글을 달았던 디자이너도 명예훼손에 업무방해까지 더해 고소를 당했다.
좁디좁은 출판계에서 익명에 기대 인터넷 게시판에 한 줄 글로 문제제기하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방식, 그리하여 더 이상 그 누구도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 결과적으로 공동의 행동을 모색하는 것조차 원천봉쇄해버리는 방식. 출판계의 악질적인 노동자 탄압의 한 형태가 바로 명예훼손 고소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의 명예를 훼손했기에 작가더러 번역가더러 디자이너더러 경찰서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그림작가가 그런다. “경찰서 가고 싶구나.” 웃자고 한 말이 분명함에도 그저 흘려버릴 수만은 없는 건 이러한 일들이 출판계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데 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문제의식마저 무뎌져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림작가, 힘내시라! 그리고 더더욱 용기 내어 말해주시라! ‘당신의 명예’보다 ‘우리의 권리’가 더 소중하다고 만천하에 알려내 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