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고 징징대던 고용센터에 또 갔다. 실업자에게 직업훈련을 지원해주는 내일배움카드제를 신청하기 위해서다. 홈페이지에서 설명을 찾아보았으나 절차가 복잡해 좀체 이해되지 않았다. 신청하려면 어차피 한 번은 방문을 해야겠다 싶어 큰맘 먹고 가 해당 창구에서 쭈뼛쭈뼛 문의를 했다. 역시나 신분증을 먼저 요구한 직원은 내게 신청 안내문을 꺼내놓고 신속하게 설명하며 안내문에 형광펜을 죽죽 그어댔다. 아마도, 신청하는데 필요한 것들이 많은 것 같았다.
“네, 네…” 반쯤 동공이 풀린 상태로 기계적인 대답을 했다. 정신이 들어 보니 어느새 내게 서류 한줌이 쥐어져 있었다. 해오라는 게 많았다. 내일배움카드 홍보동영상을 시청한 뒤 확인서도 출력해야 하고, 훈련과정탐색 결과표와 상담 사전 설문지도 작성해야 했다. 훈련과정탐색 결과표를 작성하기 위해선, 훈련 받으려는 학원이나 직업학교를 방문해 상담을 받아야 했다. 상담 사전 설문지는 흡사 가정환경조사서를 연상케 했는데, 가족 관계랄지, 주 수입원, 구체적인 취업 계획과 이 업종을 희망하는 이유 등등을 적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희망하는 직종에 재취업활동(일자리를 구하는 활동)을 2회나 하라는 요구였다. 아직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분야의 직종으로 이력서를 2회나 내고 확인서를 가져오라니… 좀 황당했다. 직원에게 “이력서 받는 입장에서도 참 황당하겠네요” 했더니 “당연히 떨어지겠죠” 한다. 알면서 시킨다는 거다. ‘의지’를 확인하기 위한 거라나. 내가 들으려는 강좌는 1달에 60만 원짜리다. 훈련비의 45%에 달하는 자비부담률 때문에 30만 원을 들여야 하는 거다. 백수에게 적지 않은 돈인데, 이걸로도 의지 확인이 안 되나.
신청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자비부담률은 20%에 불과했다. 올해 2배 넘게 올린 거다. 안내문에는 자비부담률이 25~45%라고 돼 있지만 25% 이하인 경우는 차차상위계층이거나 수강하는 분야가 건설, 기계, 화학, 농림어업, 재료, 섬유 의복, 생산단순직 분야인 경우뿐이다. 사실상 대부분은 45%를 부담해야 한다. 실업자를 대상으로 한 끔찍한 인상률이다.
괘씸한 것은 여전히 “1인당 200만원을 지원한다”는 선전 문구를 사용해 직업훈련제도를 홍보한다는 점이다. 문구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연간 지원하는 총액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사정은 좀 다르다. 1년 동안 동일하게 200만 원을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자비 부담률이 45%에 달해 지원 금액을 모두 소진하기가 쉽지 않다. 한마디로 그림의 떡이다.
가령 웹디자이너로 전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강좌들인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드림위버, 웹 퍼블리싱 강좌를 연속해서 수강한다고 가정해 보자. 강좌 당 80시간 기준 수강료는 50만 원 정도인데, 정부에서는 이중 55%인 27만5천 원을 지원해준다. 심화과정을 비롯해 연관된 강좌 네 개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소진하는 지원금은 110만 원에 불과하다. 작년 80% 기준으로 160만원을 지원해준 것에 비하면 3/2 수준이다.
기존에 수강하던 것과 전혀 다른 분야의 강좌를 듣는 것은 제재가 들어오고, 특정 분야에 대해 수강할 수 있는 강좌의 종류가 한정돼 있으니까. 사실상 2~3개 이상의 강좌를 듣기도 힘들다. 생계 때문에 마냥 배우고 있을 수만도 없으니까. 정부도 이를 간파하고 지원 총액 대신 지원금 비율을 줄였을 거다. 센터 직원 말로는 내년에는 자비 부담률이 더 높아진다고 한다. 아마 그럼에도 총액은 계속 200만 원으로 해둘 거다. 총액을 줄이면 혜택이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테니 말이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이다. 배알이 틀리지만 '이런 거짓 지원따윈 집어쳐!'라고 말하는 대신 성실하게 서류를 작성했다. 줄어든 지원. 이마저도 아쉬운 처지니까.
작성한 서류 뭉치를 들고 다시 고용센터를 찾았다. 난 이것들만 제출하면 카드가 나올 줄 알았다. 오해였다. 직원은 내가 제출한 서류를, 내가 적어낸 내용까지 아주 꼬치꼬치 확인했다. 전에 했던 일들은 뭔지, 왜 이 교육을 받으려고 하는지, 앞으로 취업할 업종은 뭐고, 그것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나는 해당 업무에 대한 전문성을 더 높이기 위해서라고 답변을 했다. 그는 비슷한 업종으로 취업하려는데 이 교육이 꼭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교육을 안 받아도 취업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이들은 상담이라기보다 면접을 진행하고 있었다.
족히 30분은 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팀장님 면접을 한 번 더 거쳐야 한다고, 그분은 자신보다 훨씬 날카롭고 깐깐하다고 귀띔해줬다. 이들과 상담 아닌 상담을 하며, 실업자인 내게 필요한 걸 찾아서 지원해주려고 한다기보다 부적합한 건수를 찾아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단 느낌을 받는 건 비단 나뿐일까. 그러고 보니 예전엔 센터 이름이 고용지원센터였는데 ‘지원’이 빠졌다. 아하. 그럼 이해가 간다.
이날은, 지난 번 중년 여성의 호소에 이어 한 중년 남성의 ‘꼬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분야 창구에서 문의를 하는 처지였는데 뭐가 맘처럼 잘 안 되는지 여성 직원에게 시종일관 시비조로 해부쳤다. 목소리가 높아지자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정숙을 요구하는 신호를 보냈지만 아랑곳 없었다. 그는 마초 아저씨답게 남자 직원이 와서 같이 대거리를 한 뒤에야 좀 조용해졌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보험회사 다녔는데 사업자등록증이 어딨어!”
“그래도 그렇지,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될 것처럼 그러다 안 된다고 그러니까 그러지!”
팀장과 한 번 더 면접을 봐야 하고, (‘3인 합의제’로 바뀌었다는데 무슨 취업보다 더 힘들겠다) 특히 내가 선택한 분야는 ‘공급과잉훈련’ 분야라 심사 뒤 지원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나는 그 아저씨의 진상에 상당 부분 공감하게 됐다. 나 역시 그 숱한 서류를 작성한 뒤, 취업 희망 분야와 훈련 내용에 대한 탐색이 불충분하다는 지적을 받고 “당신들은 지원 분야에 대해 얼마만큼의 확실성과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취업준비를 했니”라고, 애꿎은 심술을 부리고 싶어지는데. 방법은 틀렸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절박했던 거다. 고용센터가 취업 ‘지원’의 역할을 포기하고 계속 그렇게 심사관의 역할을 자처한다면, 저런 진상을 매일 겪게 되지 않을까?
고용센터가 실업자들을 지원하고 지지하고 격려하는 곳으로 (뭐, 그랬던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혹여 있다면) 돌아가길 바란다. 그건, 재원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줄 수 있는 게 적으면 적은 만큼 더 적극적으로 탐색해줄 수도 있지 않나. 사실상 지금의 고용센터는 직업훈련에 대한 높은 자비부담률, 까다로운 절차와 자격조건으로 실업자들의 재취업을 가로막고 있다. 고용보험 기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존의 지원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지에만 골몰한 결과일 거다.
어찌 보면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해고가 빈번해지는 때에 1차적인 처방을 해줄 수 있는 곳이 고용센터인데. 만약 쌍차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밀려나 생계 때문에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지역의 센터를 찾았을 때, 그곳에서 그들을 위무해주고 지지해주는 누군가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구조조정은 막지 못했더라도,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의 희생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헛된 상상일까.
그래도 난 이 상상을 조금 더 해보고 싶다. 고용센터에서 실업자들을 위해 '성공적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작성법'을 가르쳐주는 대신 왜 실업이 이렇게 난무하는지, 자본주의에 대한 강좌를 해주는 건 어떨까. 재밌을 것 같은데. 실업자들의 소모임을 조직하고 지원해주는 건? 난 기타소모임에 가입해야지. 필요하다면 심리치료도 해주면 좋겠다. 어쨌든 분명한 건, 고용 불안정과 실업으로 심리적, 물질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지금이야 말로 이들을 케어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