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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붕’이 아니라 그야 말로 ‘몸붕’의 시대

[칼럼] 당신의 ‘몸’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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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과 ‘자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자가 삶을 ‘가까스로 이어가기 위함’이라면, 후자는 ‘그만 스스로 중지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숨통 조이는 노동조건에서 노동자들은 파업했고, 숨소리조차 내기 힘든 학교에서 청소년들은 스스로의 몸을 파업상태로 만들고자 했다. 끝내는 모두 살아보고자 한 선택이었으리라.


아직 선택하지 못한 이들, 겨우겨우 살아 버티고 있는 이들, 우리들에게 툭, 하나의 유서가 전해졌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향해 억척같이 살았는지 모르겠다…” 평생을 생활고에 시달리던 60대 노부부가 통장 잔고 3,000원과 더불어 세상에 던진 마지막 하소연이다.

그즈음 하여 정부는 <정신건강증진종합대책>이란 것을 발표했다. 2013년부터 취학 전, 초등생, 중․고등생, 20대, 30대 시기는 물론 이후 전 생애주기별 건강검진을 통해 정신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한다는 것이 요지다. “국민 스스로 자신의 정신건강수준을 확인하게 되고, 위험군을 대상으로 정신건강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조기치료가 가능해질 것으로 전망”한단다.

일종의 정신적 처방을 통해 문제를 예방하고 해결하겠다는 정부 의지의 발로인 셈이다. 직장과 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번 종합대책의 수립배경을 정부는 “개인 삶의 가치를 높이고 경쟁력 있는 미래 인적자원 확보 차원에서 그 중요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다.

지극히, 빈약하다. 정부의 대책은 사람의 ‘몸’을 정신과 육체로 떼어놓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결과 파업의 원인을 노동자에게서, 자살의 원인을 청소년에게서 찾는다. 사실 이런 이성주의는 꽤나 오랜 기간 사람을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로 믿도록 만들었다. 합리와 논증을 중시하면서도 이 분리에 대해서만큼은 명확한 근거없이 과학화했다.

‘몸’을 언급하지 않고 정신과 육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직장에서 노동자를, 교실에서 청소년을 분리시켜 놓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가령, 몸이 독립된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라는 가정에서 바라본다면 사장과 노동자는 항상 같은 요소를 지닌 동일한 존재이다.

그러나 ‘몸’으로 바라본다면, 사장의 몸과 노동자의 몸은 같을 수 없다. 인간존재의 유일한 근거인 ‘몸’은 항상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의 이번 대책은 해결과 회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회피나 회유에 가깝다.

왜, 분리하는가?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존재하지도, 애초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면? 오로지 ‘몸’으로 존재함으로써 행위하고, 사고하고, 세계와 소통하고 있는 것이라면? 정부는 왜 성찰의 계기가 아닌 문제의 원인자체를 ‘내부(또는 정신)’라는 허구에서 찾으려 하는 것일까?

정신적 교정을 통해 (사고 팔리는 것에)자유롭고 건강한 육체를 생산한다는 것은 지금의 노동현장,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의 주요한 원인을 또 다시 만들어내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반면, 분리된 몸 프레임에 갇혀 이를 정신과 육체가 지니고 있는 선후의 문제 혹은 병행해야 할 문제라 비판하는 것 역시 이미 중요한 지점을 지나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지니는 유일한 보편적 근거인 ‘몸’이 그 자체로서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심지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까지도. 그렇다면 완전히 자연스러운 몸이 사회와 소통할 때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장애’라고 불러도 좋을까? 이렇게 된다면 애초 장애의 원인은 무엇일까?

정부는 이번 대책의 끝에 국민에게 안심하라는 친절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상담과 복약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경증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정신질환자의 범위에서 제외되어 불합리한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게 된다”는 말로써.

불안함, 두려움, 불확실함이 우리의 ‘몸’을 둘러싸고 있다. ‘멘붕’이 아니라 그야 말로 ‘몸붕’의 시대이다. 이쯤에서 쉽지 않았을 2012년 상반기를 보내고 있을 당신께, 장애가 만연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당신의 ‘몸’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의 ‘몸’은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