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사태의 핵심적 본질은 통합진보당 노선의 한계에 있다
최근 검찰의 본격적인 통합진보당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통합진보당의 사태는 더욱 꼬여가고 있지만 애초 ‘선거부정’이 통합진보당 사태의 핵심적 본질은 아니다. 이 사건의 본질이 ‘선거부정’이 아니라 ‘선거부정’논란을 현상으로 하는 노동자민중을 대상화시키는 원내정당 중심의 의회주의에 있다. 이는 지난 민주노동당이 원내정당으로 발돋움하면서 의회주의와 수권정당 노선이 강화된 지난 역사로부터 지속되어 왔다. 통합 이후 대의기구 지분 분할과 비례대표 선출을 둘러싸고 지난한 논쟁과 치열한 경쟁이 발생한 것은 의회주의에 기반을 둔 정당운동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 지난 12일 열린 통합진보당 전국운영위원회 |
물론, 현재 비당권파는 강기갑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상대책위 체제로 통합진보당의 정상화를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권파든 비당권파든 사태의 극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 5-6석과 원내 3당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공통의 이해는 변함이 없다. 혁신비대위를 비롯한 비당권파들은 당권파의 패권성과 비민주성을 비난할지언정 국민참여당과의 통합과 민주통합당과 야권연대를 추진한 통합진보당의 노선, 즉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변경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통합진보당이 당면한 사태해결은 가능할 수 있을지언정 진보운동이 걸어가야 할 ‘철학과 역사의식'에는 한참이나 미달되어 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공안탄압, 진보운동은 함께 연대를 모색해야
최근 검찰의 통합진보당의 서버압수 수색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거이자 공안탄압의 신호탄이 되고 있다. 아직 당내 논란이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비례선거 부정의혹에 대해 통합진보당 차원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검찰이 개입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인 정당 활동을 침해하는 행위이다. 특히 당원명부를 압수한 것은 결사의 자유를 공권력으로 파괴하는 용납할 수 없는 반민주적 반인권적 행위이다. 검찰의 당원 신상 털기는 정치 결사의 자유를 봉쇄하는 것이자 공권력에 의해 정치사찰과 정치탄압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누리당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당선자에 대한 국회의원 자격심사를 검토하고 있다며 노골적인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보수언론들도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일제히 종북좌파 척결을 주장하면서 색깔론을 들먹이고 있다. 여기에 검찰까지 가세하니 군사독재정권의 전유물인 이른바 메카시즘적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있다.
결국 공안정국은 이명박 정권의 총체적 비리, 총리실 사찰, 쌍용차 정리해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 파동, 한미FTA, 언론파업, 철도 KTX사유화 등 모든 사회적 쟁점을 일순간에 묻어 버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공안몰이는 직접적으로 정권 연장을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공세는 대선 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때문에 진보운동은 통합진보당에 대한 동의여부와 관계없이 통한진보당에게 가해지고 있는 공안탄압에 맞서 함께 연대해야 한다.
진보운동의 위기, 공세적 투쟁으로 돌파해야
더욱 큰 문제점은 통합진보당 등 정당운동이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중운동을 엄호 지원하기보다는 오히려 대중운동을 대상화시켜 모든 의제를 수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민주노총은 이번 총선에서 정책협약 체결 및 후보지지․지원활동을 통해 야권의 정당, 후보들과 어느 때보다 밀착된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정작 지난 총선에서 민주노총의 노동법 전면재개정, 비정규직, 정리해고, 노동자 투표권 등은 총선 이슈에서 주변으로 밀려났으며 노동정치는 실종되어 총선 활용의 도구가 되었다. 정당운동이 진보운동의 모든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중운동은 선거일정에 맞춰 동원 대상이 되어버렸다.
분명히 해야 한다. 정당운동과 대중운동이 서로를 대상화시켜서는 곤란하다. 대중운동이 제대로 된 투쟁으로 자리 잡았을 때 정당운동도 의회에서 정책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진보운동의 투쟁의 성과, 그 결과를 최종적으로 정당운동을 통해 법과 제도로 확인받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진보운동은 노동자민중 스스로의 투쟁과 요구를 정당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투쟁으로 발현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노동자와 민중 스스로가 자본주의의 본질을 깨닫는 데에는 투쟁이 최고라고 이야기한다. 계급의 힘을 자각하는 출발점도 투쟁이며 조직도 투쟁을 통해야 올곧게 서고 지도자도 투쟁을 거쳐야만 대중을 이끌 수 있다. 아울러 지식인이 그 관념성을 제거하는 데에서도 투쟁만한 약이 없으며 노선과 태도를 확인하는 데에서도 투쟁만한 시금석이 없다라고 한다. 이 정도면 투쟁만능주의 또는 투쟁 지상주의라고 불러도 과도한 표현이 아닐 것 같다.
투쟁을 성찰하는 진보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운동 스스로 투쟁의 의미를 너무 관성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는지 성찰해 볼 일이다. 투쟁은 생리상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즉 투쟁에는 항상 승부의 결과가 뒤따라 다닌다. 이 점에서 투쟁은 한 순간의 빈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만사를 승리와 패배로 가르는 대단히 날카롭고 예민한 칼과 같다. 진정으로 노동자민중이 왜 투쟁에 나서는가를 확고부동한 출발점으로 갖고 있지 못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투쟁의 승패에 결박당한다. 투쟁 동기나 그 뜻은 무의미하고 오직 이길 것인지 쓰러질 것인지에 대한 수단의 강구만이 의미를 갖게 된다. 왜 투쟁하는가를 망각하고 투쟁에만 전념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맹목성이 지배하는 투쟁은 자신의 각성과 성장을 도모하는 주체적 철학이자 방법론이기를 포기하고 오직 수단시 될 뿐이다. 그런 투쟁은 오래가지 못하고 반짝 피어났다가 이내 수그러들고 만다. 이런 투쟁에는 같이 싸우겠다고 동참하는 동지는 줄어들고 대신 볼거리 생겼다고 관람하는 구경꾼들만 늘어난다. 이처럼 왜 투쟁에 나서는가를 잊어버리면 같이 투쟁하는 동지보다 적에 대한 잡념이 앞선다. 그럴수록 투쟁은 더 화려해야 하고 더 장엄해야 하며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 악순환이다.
그래서 진보운동이 투쟁을 통하여 되돌아보며 투쟁을 통해서 조용히 숨죽여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6월을 시작으로 총파업을 비롯하여 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저항을 예비하고 있다. 다시 투쟁의 의미를 다시 소중히 벼릴 때이다. 투쟁을 성찰하는 진보운동이 혁신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때문이다. 투쟁으로 인해서 아름답게 기억하는 그 순간, 잘라내야 할 것들은 어디까지인가를 보게 되고 비로소 현재와 미래의 작고 좁은 아침에 두 눈을 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