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진짜 사장’을 찾아가는 긴 여정

[간접고용 끝내자](3) 동희오토 노동자들의 투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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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입사한, 어느 동희오토 노동자의 사연

2003년 가을부터 기아차 서산공장(동희오토)에 생산직 채용이 한창이었다. 태안 골짜기에서 살던 누구는 마을 회관 앞에 자랑스런 현수막이 붙었단다. ‘경축, 친목회 회원 **네 아들 ##, 기아자동차 입사’라고 말이다. 누구는 기아차 화성공장에 동시에 합격했는데, 고향을 지키고 초창기 멤버로 임원까지 승진도 해볼 요량으로 서산공장에 눌러 앉았다고 한다. 또 누구는 자동변속기를 만드는 현대파워텍을 과감히 박차고 완성차 공장을 선택했다고도 한다.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도 할 만한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한동안 기아차 서산공장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다들 벼룩시장 취업난을 들여다 봤다. 혹시라도 누가 하루 빠지는 날이 있으면, ‘아, 딴 회사에 면접보러 가는구나’라고 다들 이해하고 있었다.

솔직히 당시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뭔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같은 의장(조립)공장, 바로 옆 라인에서 일하는 동네 형님과 내가 회사(업체)가 다르다.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동희오토라는 회사는 또 뭐여? 동희오토 직원들은 사무직같은데 마치 상전처럼 구는게 짜증 만땅이었다. 보너스는 600%이긴 한데, 시급이 2,600원(2003년 기준)은 너무 한 거 아니여? 그래도 정말 모닝(프로젝트 명, SA)의 시험차를 정성들여 만들고 연습을 했다. 업체 사장님이 말씀하시길, ‘양산만 잘되면 현대기아차 90%는 맞춰준다’라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키퍼나 조장이 되면 지역사회에서 어깨에 힘도 좀 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초창기 회사이니만큼 잘 키워서 평생 직장한번 만들어보자는 야무진 꿈도 있었다.

2004년 1월, 모닝 1호차가 생산되고 곧 주/야 맞교대가 시작되었다. 이건 뭐, 하루에 시험차를 몇 십대 만들면서 연습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콘베이어 벨트에 적응하기도 힘들었고,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뛰어다녀야 했다. 야간하고 나면 잠을 못자서 모두 불면증에 시달렸다. 여유인원이 없어서 몸땡이가 아프고, 급한 일이 있어도 월차한번 제대로 못쓰는 실정이었다. 한 겨울에는 정수기 물이 얼어붙을 정도여서 쉬는 시간에는 다들 벌벌 떨고 있었다. 성질 급한 애들은 벌써 한 두 명씩 때려치우고 있었고, 그해 여름부터 의장공장의 샤시, 트림, 화이날 등에서도 자발적인 잔업거부나 특근거부가 있었다. 물론 주동한 형들은 이런저런 압박으로 회사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005년, 드디어 민주노조가 떴다. 아무리 현장에서 뭐를 해봐도 씨알도 안먹히는 현실, 해답은 노동조합이라는 이야기들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위원장님이 있고 전원이 조합원인 ‘차체’를 회사에서 폐업시켜 버리고 동희오토 직원들이 공장을 돌렸다. 그리고 사장의 사위나 반장, 경리 등이 조합원인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업체 노동조합이 있었단다. 실제로 노동청에서도 우리는 복수노조라고 했다고 하고, 그때부터 ‘불법노조라서 주민등록증에 빨간줄 간다’라고 부모님한테까지 전화를 해댔다. 위원장님과 사무장 등 핵심조합원 60여명은 폐업으로 공장밖에 쫓겨났지, 회사에서는 계약해지하겠다고 난리를 치지. 하나둘씩 기업별 유령노조에 가입하면서 그쪽이 과반을 훌쩍 넘겼고, 제발 그만두라고 부모님의 압박도 심했다. 한 두 명씩 민주노조를 탈퇴하더니 이제 몇명 남지도 않았다. 누구나 ‘여기는 안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진짜 사장’을 찾기 위한 ‘현장’과 ‘지역’에서의 지난한 투쟁

2005년도 가을쯤에 입사를 한 나는, 주위 동료들에게 앞의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패배감과 절망감은 라인의 동료들조차 좀처럼 믿지 않는 정말 삭막한 현장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회사 간첩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술자리는 물론이고 대화조차 없었다. 입사할 때부터 나는 한국노총 기업별노조 조합원이었고, 업체에 2명 남아있던 민주노총 형들을 안쓰럽게 지켜볼 뿐이었다. 물론 두 형은 곧 자의반 타의반 회사를 그만두었고, 우리 업체는 유니온샵으로 전환해서 전원이 한국노총 소속이 되었다. 물론 각 업체별로 조합원에 대한 계약해지가 자행되었고, 2007년 겨울에는 열 명 정도 남아있던 화이날 업체를 폐업시키면서 금속노조의 씨를 말렸다. 100% 비정규직 공장의 현실이 그러했다.

라인에서 의리있고 똘똘한 사람들은 초창기에 자발적인 현장투쟁으로, 다음에는 민주노조를 했다는 이유로 모두 회사를 그만두고 없었다. 서산지역에 동희오토는 그야말로 최악의 공장이라고 소문이 나서 채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점심먹고 나면 신입사원이 사라져서 우왕좌왕하는 그런 실정이었고 중국 이주노동자들이 조금씩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최저임금에 살인적 노동강도, 당시만 해도 비인간적인 노무관리는 또다시 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내가있던 업체부터 어용노조를 민주화 하기 위한 바람이 불었다. 우리 업체만 해도 내가 징계해고 당하고 나서 곧 있다가 민주노조 위원장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 확정공고가 난 다음날 바로, 업체폐업 예고 공고가 나붙었다. 사장이 건강이 나빠져서 회사운영을 못하겠단다.

다른 업체는 위원장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느니, 아니면 연수를 갔다느니 하면서 자취를 감추고 없었고, 이렇게 어용노조 민주화가 쉽지는 않았다. 결국 우리 업체만의 고립된 투쟁을 하면서 폐업으로 21명의 해고자가 생겼다. 당시까지 동희오토를 다녀간 지역 젊은이들이 3,000명이 넘었고, 120여명이 해고되었다. 지금, 해고자 수는 그때와 같지만, 해고란 것이 꼭 공식적인 징계위원회나 계약해지, 업체 폐업을 통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회사의 압박으로 자의반 타의반 그만둔 이들! 지금 2003년이나 2004년도에 입사한 사람은 조장 반장 등 관리직 사원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정말 서산인근 지역의 젊은이들 중에서 동희오토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본인이 다녔었거나, 아니면 형제나 사촌정도는 꼭 한명씩 다녀본 적이 있다고 봐야한다.

초창기 금속노조 조합원들과 2008년도 한국노총 신분으로 해고된 우리들이 함께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로 뭉쳐서 지금까지 투쟁하고 있다. 2008년부터 2009년 여름까지는 몸은 비록 공장밖에 있지만, 현장을 조직하기 위한 지난한 투쟁을 벌여왔다. 거의 매일 통근버스를 타고 선전전을 벌이고, 다시 정문에 모여서 진입투쟁을 벌였다. 차량 트렁크에 숨어서, 그리고 밤에 몰래 담을 넘어서 현장에 진입해서 선전전을 벌였다. 점심시간에 회사 뒷산에 올라가서 스피커 선동도 하고, 유인물만이 아니라 스티커나 장미꽃 등으로 현장의 분노를 모아나가는 투쟁이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도 도장공장 폐업을 통해서 김주원, 박병선 동지 등이 또다시 해고되었고, 그렇게 전원 해고자들만의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해고에 대한 위협은 공장안을 꽝꽝 얼어붙게 했다. 현장을 조직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의 복직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동희오토 문제를 지역으로 확장하기 위해서 서산시청과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2009년 여름부터 ‘동희오토 문제에 대한 지자체의 책임있는 역할’과 ‘지역에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공장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며 시청과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물론 현장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도 병행하면서 이 문제를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다. 보훈단체 할아버지들이 우리 천막을 부수기도 했다. 서산시 관계자는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현대차그룹이 버티고 있는데 시청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다만 지역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책임있는 실태조사 및 방안모색이라는 합의를 하고, 2010년 여름 우리는 현대기아차 본사가 있는 양재동으로 향했다.

‘진짜 사장이 나서라’, 현대기아차 양재동 본사에서의 투쟁

우리는 그동안의 투쟁을 통해서 절실하게 깨우친 것이 있다. 동희오토 문제는 결국, 원청회사인 현대기아차 그룹에서 풀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7월 12일부터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원청과의 직접교섭’을 요구하며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현대기아차 자본과 경찰들의 대응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150여명의 용역깡패들이 우리 해고자 7명을 시도 때도 없이 침탈하고, 경찰에 연행된 것만 무려 세 차례가 넘는다. 그해 여름, 그렇게나 비가 많이 왔고 본사의 물대포 공격에 몸이 마를 날이 없었다. 손발이 불어터지고, 용역깡패들과의 육탄전에 몇 시간 잠도 못 잤지만 버티어냈다. 본사 앞 집회신고가 막혔을 때, 오히려 서초서 집회신고투쟁으로 돌파해냈다. 오히려 연대는 확장되어 ‘진짜사장이 고용해! 공동농성단’이 만들어져서 서울지역 연대투쟁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결국 현대기아차로 투쟁의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 근거가 있다. 현대기아차그룹(지배기업)은 동희오토(종속기업)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기본적인 경영방침에 관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단순히 법인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원청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이다. 다음은 우리들이 주장하는 몇 가지 근거이다.

(1) 자본 시설의 종속성이다. 자동차산업은 막대한 규모의 자본이 투자되는 '장치산업'이다. 실제로 동희오토의 생산 설비는 현대캐피탈에서 임대한 것이며, 공장부지와 건물은 현대자동차가 소유하고 있다. 기본적인 자본과 시설을 실제로 현대기아차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2) 인적 지배 종속성이다.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동회오토는...공장장과 재무담당 상무 등 책임자는 현대, 기아차 출신이다”라고 하고 있다. 2008년 말, 동희오토 공장장과 기아차 소하리 공장장이 서로 자리만 바꾸었다. 실제로 동희오토 초대 공장장 위00은 현대차 1공장장 출신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전문 기술직이 아닌 공장장이라는 중대한 업무를 행사하는 임원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다.

(3) 영업행위의 지배종속성이다. 동희오토에서 만들어지는 ‘모닝’과 ‘레이’는 연구개발, 설계, 생산설비제공, 부품공급, 주문, 판매, A/S, 출고까지 기아차에서 최종 관리하고 있다. 생산 설비에 대한 유지/보수만이 아니라, 확장 등은 기아자동차 ‘생산기술팀’에서 담당하고 있다. 특히 기아자동차의 각종 사업계획/경영현황 자료에 서산공장, 경차공장, 동희오토 등을 명시하면서 실질적 지배/개입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교섭과 관련한 실질적 영향력의 행사이다. 우리들이 교섭을 요청하는 노숙을 시작하면 몇 차례 교섭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하청업체 사장이 아닌,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에서 나온 어떤 사람이 교섭 요청공문을 전달했다. 동희오토 사내하청지회 역시도 교섭요청 공문을 기아자동차 사장 앞으로, 그것도 현대기아차그룹 경비책임자에게 공문을 전달해왔다. 더구나 교섭을 하는 조건으로 농성장 철수까지를 주장했다. 실제 동희오토 교섭을 주도한 당사자는 기아차 임원이었다.

이런 몇 가지 근거만 보아도, 우리들의 투쟁이 정당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정말 누구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던 우리들의 복직도, 결국 현대기아차그룹 본사와의 한판 싸움을 통해서 이룰 수 있었다. 실제로 농성과정에서 현대기아차 그룹의 명예훼손 등에 관한 소송에서 법원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몽구 회장과 아무 관련이 없는 우리들이 개인과 법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지회에 1억, 각 개인당 1억의 손해배상을 청구당하기까지 했다. 그렇다. 법적으로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실제 우리들의 투쟁이 그 견고한 연관고리를 밝혀낸 것이다.

투쟁을 통해 배운다. 그것이 진실이다

우리들은 투쟁을 하면서 몇 가지 깊이 깨우친 것이 있다.

먼저,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이놈의 ‘파견법’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장사를 하는 업체장도 마찬가지거니와 그를 앞세워서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원청의 작태는 참을 수가 없다. 우리가 투쟁할 때 업체장은 ‘모든 게 위에서 내려오는데 나한테 왜 이러냐’라고 하고, 동희오토는 ‘남의 회사에서 무슨 행패냐, 너네 사장한테 가서 따져라’라고 한다. 더구나 이런 동희오토와 하청업체의 틈바구니에서 진짜 사장인 현대기아차그룹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또 다른 동희오토를 기획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 때 파견법이 만들어지면서 이게 무슨 ‘합법적’인 것인 것 마냥 대대적으로 간접고용이 확대되었다. 개별화되고 힘없는 비정규직노동자에게 합법이니 불법, 차별시정이니 구제니 하는 것은 딴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아니, 최소한의 단결권마저 보장이 안 되는 상황에서 누가 무지막지한 회사의 탄압을 뚫고 합법과 불법을 따지고 노동청에 제소를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냥 떠나면 그만이고, 1년 퇴직금정도 받고 회사를 옮기는 ‘날품팔이들’이 되고 말았다.

둘째,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비정규직을 보호하기위한 이런저런 법적 장치를 하겠다는 것은 우리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 평소에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말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 통과된 비정규직 보호법안이라는 것이 결국 3개월, 6개월짜리 단기간 노동을 대대적으로 확산시킨 것은 사실이다. 이번 최병승 동지의 판결의 맹점, 즉 그놈의 ‘2005년 7월 이전 입사, 2년 이상 근무, 그리고 직접생산 공정’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솔직히 비정규직으로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노동자들은 전체적으로 따지면 소수라고 봐야한다. 번듯한 대공장, 그것도 그나마 비정규직 노조가 버티고 있는 몇몇 사업장의 절반도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평균 근속이 1년이 조금 넘는 것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다. 더구나 동희오토는 전원이 비정규직이라서 정규직과의 ‘혼재작업’이 없다. 중요한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고, 이번 금속노조 불법파견 소송을 진행하지도 못했다. 법적으로 질것을 뻔히 알면서, 소송을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제 동희오토와 같은 100% 비정규직 공장이 자본측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대대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셋째, 지금 제기되는 파견법개정이니, 사내하청법의 도입이니 하는 논의들은 순수하게 제도적 법적 차원에서만 제기되는 것 같다. 이런 논의들의 펴시는 분들의 선의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의 노-자 힘관계가 핵심이다. 따지고 보면, 최근 비정규직 관련한 고무적인 대법원의 판단들도 결국 지난한 비정규 주체들의 투쟁이 만들어낸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이다. 무수히 많은 해고와 구속들 버티면서 투쟁해온 동지들이 결국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내고 결국 대법원의 판단을 이끌어 냈다. 더구나 법적 장치들도 최소한의 단결권이라는 현장의 힘이 없으면 결국 사측의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서 무력화되고 오히려 자본에게 활용되고 만다. 경총 등 자본가단체부터 대기업 법무팀, 자본측 법률가들, 그리고 노동부까지 법적 장치들을 피해가는 다양한 방안들을 쏟아내고 있다. 결국은 현장의 단결된 힘이 있어야 최소한의 ‘입법 취지’조차 살릴 수가 있다. 내 생각에는 현실적인 법적 보호장치에 대한 고민보다는 비정규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이 실질적으로 노동3권을 보장을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

넷째, 강조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노동3권은 헌법 조항에만 있다는 것이다. 계약해지나 조합원들을 솎아내기 위한 업체 위장폐업이 자행되어도 아무런 법적 장치가 없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런 협박때문에 비굴과 굴욕을 감내해야 되는 인간성의 상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법적 보호장치를 논의한다는 것은 오히려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괴는 미봉책일 뿐이다. 고용에 대한 보장이 없는, 실질적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파견법이 있는 한, 헌법에 있는 노동3권은 아무런 권리조항이 되지 못한다. 나는 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 위에 다양한 법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권리와 관련된 사항은 ‘노동3권’을 근간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투쟁을 하면서 절망 좌절할 때는 우리들의 정당성이 민법의 몇몇 조항으로 훼손될 때이다. 노동자들이 노동3권이 아니라 민법의 조항들로 판단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노동3권을 보장받고 그것을 오히려 확장해내는 방향으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것이 진실이고 오히려 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