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분향소와 관광명소라는 그 차이만큼 분명해 보이는 두 세계가 정말로 다른 세계일까요? 바쁘게 지나가는 한 아저씨는 해고의 경험이 그 근육 속에 새겨져 있을지도 모르고, 리어카를 끌고 가며 분향소를 보고 혀를 차는 노점 아저씨의 아들과 딸 누군가는 비정규직이라는 낙인 속에서 한숨을 쉬고 있을지 모릅니다. 깔깔깔 웃으며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웃음 속에는 취업조차 어려운 미래가 숨어있을 것이고, 바쁘게 걸어가는 직장인들의 넥타이에는 장시간 노동과 경쟁으로 찌든 삶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이들이 분향소를 찾아와 조문을 하고 울고 웃고 갑니다. 그분들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하나의 세상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보다 많은 이들은 분향소를 외면하며 지나갑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세상살이가 너무 바빠서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자기 마음 속의 그림자, 고용불안의 그림자를 직시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죽음이 결국 자신의 불안과 맞닿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서 노동하는 사람 누구 하나 자유롭지 않습니다. 정리해고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어도 기업이 제멋대로 할 수 있고,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된 순간 권리를 잃어버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아등바등해야 합니다. 노동하는 사람의 1/4이 최저임금이거나 최저임금 미만으로 일하고 있고, 권리를 찾겠다고 나서는 순간 해고의 위협을 감수해야 합니다.
작년 한 해 무려 10만 명이 넘게 정리해고 당했습니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들이 줄도산할만큼 경제가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정리해고는 늘어납니다. 정리해고가 일상적인 구조조정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다 짤린 10만명이 넘는 정리해고자들 중에 ‘나는 억울하다’고 외치는 이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대다수는 침묵으로 혹은 어떤 이들은 사회적 약자가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폭력으로 그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22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단은 이런 현실을 잊고 덮어놓고 싶습니다. 그저 침묵으로 현실을 도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차린 이 분향소는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이 분향소는 22명을 추모하기 위한 자리만은 아닙니다. 정리해고라는 법과 제도, 살인진압을 하고서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경찰청장과 정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회사, 동료들 간의 찢겨진 관계, 사회적 냉대와 무관심을 견디던 이들이 분향소를 차린 것은 이제는 자신을 상처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대신 이제는 삶을 망가뜨린 적들과 싸워서 인간다운 삶을 되찾겠다는 결심입니다. 지독한 폭력에 밟혀서 결국 바닥까지 내려갔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세우고 노동하는 이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그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는 의지입니다.
그래서 정부와 경찰은 이 작은 분향소를 그렇게 두려워했고 폭력으로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맞고 연행되고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이 분향소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의지와 결심 덕분에 자신의 그림자를 들여다볼 용기를 갖습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나는 지금 해고자이거나 해고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이 한국 땅에서 노동하면서 사는 이상 언제라도 쓰레기처럼 버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직시하고 이 공간에 연대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지고 권리를 찾기 위해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지금 쌍용자동차 대한문 분향소 앞을 메우고 있는 이 연대의 온기는 그래서 무척 따스하고도 강합니다.
이제 더 많은 이들이 이곳으로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이 공간이 널리널리 확장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의지와 연대와 눈물과 웃음이 모여 흘러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인듯 이 길을 지나던 많은 이들도 흘깃 쳐다보고, 무슨 일인지 관심갖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을 해서야 살아갈 수 있는 그 분들이 이 공간에 관심을 갖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문제를 생각하며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용기를 내어, 매일매일 노동하는 이들의 살과 기운을 갉아먹는 고용불안정과 경쟁, 그리고 차별에 맞서는 힘을 갖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공간은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5월 19일 4시 서울역에 열리는 범국민대회는 이 공간을 확대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추모와 애통을 넘어 눈물과 회한을 넘어 권리를 향한 투쟁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경찰은 서울역에서 대한문까지 행진하는 것을 불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권력의 살인폭력을 견디고 다시 일어선 이들이 앞에 서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어 다시 용기를 내는 이들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두가 용기를 내고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경찰의 차벽과 물대포쯤은 이제 가볍게 뛰어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대한문까지 우리의 의지대로 행진을 하고, 그 대한문에서 한판 대동의 자리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모일 때 우리 모두는 이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