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대립의 초점은 ‘올바른 선거가 진행되었느냐’가 아니다. ‘올바르지 못한 선거 절차’가 진행된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 되었고, 논란은 부정 선거냐 부실 선거냐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부실 선거가 부정 선거의 온상이 된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경험이다. 진보 정당이 의회에 진출한 지 이미 10년이 가까워 온다. 과학기술 발전이 저조한 시대에도 강산이 한 번 변하는 세월 동안 부실 선거조차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 구차한 변명이다. 부실 선거가 부정 선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의식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부실을 변명으로 하는 부정 선거일지라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한다는 설익은 정치세력화 의식이 근저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 12일 심상정 대표가 당원들에게 둘러싸여 아수라장이 된 중앙위원회 의장석을 벗어나고 있다. |
더 나아가 이번 사태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제도권에 진입하는 의회 정치세력화에 한정함으로써 제도권의 전통적 부정 선거를 배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간다.’는 오랜 담론이 상기된다. 노동자와 민중은 정치세력화의 주체이므로 그들 각자의 의사가 엄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객체화하여 동원의 대상으로 만든 결과다. 부실이든 부정이든 이번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특정 후보 혹은 정파를 당선시키기 위해 당의 주인인 당원 개개인의 의사를 왜곡했다. 백번 양보해 왜곡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러한 왜곡의 가능성을 알고도 묵인했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관행이 있어 왔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적어도 노동자 민중을 대변하는 진보 정당은 득표를 최고 목표로 하여 정책만을 제시하는 정책 정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 민중의 장기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이념 정당의 전통을 쌓아가야 한다. 이를 토대로 그 이념적 전망과 정치 행위가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은 이미 예측 가능한 정당이 아니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와는 거리가 먼 국민참여당과 통합했을 때 이념적 전망의 예측 가능성이 사라졌고, 이번 부정 투표 사건으로 정치 행위의 예측 가능성도 사라졌다.
그 책임 소재는 일차적으로 부정 선거를 주도한 사람들에게 있지만, 선거 승리를 목표로 선거가 끝날 때까지 혹은 관행으로 치부하며 지금까지 묵과해온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부실이든 부정이든 총체적이라고 인정되는 만큼 책임도 당 전체가 총체적으로 져야 한다. 10년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중대한 기로다. 그러나 기초가 잘못되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무너뜨리고 새로 쌓아가야 한다. 위태위태한 탑을 보며 석공들이 하나둘 모두 떠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