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으면서도 노동자는 남이고 노동 운동은 남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살던 저에게 한 노동자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유서 속의 그 노동자는 ‘아빠’였고, ‘학부모’였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아빠들이 바로 노동자였고, 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노동운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주익이라는 노동자가, 아빠가,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농성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던졌을 때 저는 근처에 있는 도시의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교실의 아이들을 보면서 ‘이 아이들의 또 다른 아빠들이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일까’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휠리슨지 뭔지를 대신 사 주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휠리스가 있어도 아빠를 잃은 슬픔은 가시지 않을 겁니다. 그 보다는 다시는 스스로 목숨을 던져야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이 아이들의 슬픔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고, 교사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왜 스스로 목숨을 던질까? 절망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쇠덩어리 크레인에서 100일 넘게 지냈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노동자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무도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고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죽음을 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주익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자기들의 무관심이었다며 다른 노동자들이 가슴을 치기도 했고 급기야 죄책감에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교사인 저는 아이들의 아빠가 겪는 외로움과 절망에 무관심해도 될까.
그런데 그 크레인에 또 한 사람의 노동자가 농성을 한다고 했습니다. 한 달이 넘고 두 달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하루하루 농성 날짜가 길어질수록 저는 초조해졌습니다. 일반 언론에는 나오지도 않는데 저렇게 100일이 넘어가다가는 또 외로움과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졌습니다. 한 사람이 죽음을 향해 가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기력감도 들었습니다.
그때 이 노동자에게 “죽지 마!” “희망은 있어!” “당신은 외롭지 않아!”라고 외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이른 바 ‘희망버스’라는 게 간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옛 제자가 결혼하여 주례를 서느라 서울에 가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주례를 서면서, 노동자로, 아빠로 살아갈 옛 제자를 보면서 ‘너는 크레인에 올라가는 아빠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고, 주례 복장 그대로 희망버스를 탔습니다.
한진중공업 앞에는 가족들이 큰 피켓을 들고 서서 우리를 맞았습니다. “당신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꽃이다.” “절대 죽지 마!” 크레인 가까이 가서 소리치고 싶었지만 문이 닫혀있어서 멀리서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이 가는 길을 안내한다고 했습니다. 가까이서 더 크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희망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꼭 살아서 내려오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안내를 따라 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갔습니다. 가면서 베를린에 있었던 분단의 콘크리트 장벽을 부수는 상상을 했습니다. 느닷없이 올림픽 주제가 가운데 한 구절이 떠오르기도 해서 웃으며 크레인 아래에 갔습니다.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크레인 아래에서는 축제 판이 벌어졌습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고 삶의 희망을 노래하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감동적인 노래와 춤이 이어졌습니다. 평화롭게 신나게.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죽지 마세요!” “살아서 내려오세요!” “희망은 있어요.” 농성하던 노동자는 대답했습니다. “...저녁이면 땀 냄새 풍기고 집에 돌아가 새끼들 끼고 저녁 먹고 여러분들이 오늘까지 누려왔던 소박한 일상들을 지켜내고 싶은 것뿐입니다...”
소박한 일상의 꿈과 ‘사람이 꽃’이라는 소리가 만나 웃음과 울음이 어우러지는 밤을 보냈습니다. 가족들이 다시 피켓을 들었습니다. “당신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당신’은 희망버스를 타고 간 우리들이 아니라, 노동자들이었고, 그들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힘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내가 겪어 봤는데, 절망은 없더라 희망은 있더라.”라고 말입니다.
그 희망으로 ‘희망버스’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고 언론이 관심을 가졌고 국회에서도 논의가 되었으며 마침내 노사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올림픽 노래대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서로 양보하고 대화하고 타협하는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무시무시한 죄가 씌어졌습니다. 제가 한 행동이 ‘폭력행위’랍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죽지 말라고 소리 친 게 폭력이랍니다. 떼강도에게 적용하는 ‘공동주거침입’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미리 신고한 살인도 막지 못하는 경찰이 개인의 블로그를 뒤지고 인터넷 카페를 뒤져서, 전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날의 일을 올린 사람들에게 폭력 행위를 했다고 벌을 주겠다고 합니다. 교사로서 품위를 손상했다고 징계를 하겠다고 합니다. 희망을 일구는데 한몫했는데 절망을 안겨주려고 합니다.
죽음을 막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공을 세운 희망버스 기획자에게는 국가에서 표창을 하고, 희망버스를 탔던 사람에게는 수고했다며 높은 분이 손이라도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에게 ‘당신에게서 희망을 봅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덧말]
• 후원 계좌 / 국민은행 702102-04-052110 문정현(희망버스)
• 문의
- http://cafe.daum.net/happylaborworld
- 070-7168-9194 / hopebus@jinbo.net / 트윗 @hopebus85
희망버스 참가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반사회적, 비윤리적인 탄압으로 현재 100여분의 탑승객들이 벌금형 등을 받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탑승객들이 이런 탄압에 맞서 정식 재판을 청구하고 있습니다.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에게 그러했듯 외롭게 법정투쟁에 나선 희망버스 승객들을 함께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희망버스 운동을 지지해주셨던 많은 이들의 공동 대응이 필요합니다. 먼저 기소된 분들이 자신의 의지와 희망버스 운동의 사회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기고활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인권단체연석회의에서는 지금껏 공동변호인단과 대책모임을 구성해서 함께 해주시고 있습니다.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조만간 법률비용 마련을 위한 각종 기금 마련 등 모금 운동도 계획 중입니다. 작년에 함께 나누었던 연대의 마음 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