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쌍용차, 명복을 빌 수 있는 방법

[연속기고](1) 이제는 미안하지 않게 행동해봅시다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가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중 하나입니다.

전 아직 어떤 관념적 절대자의 존재를 믿지 못합니다. 하기에 그에게 무언가를 빌 수도 없습니다. 혹 어딘가 있을 지도 모른다 치고 빌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도, 전 명복을 비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 보다, 그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때 대개 제 정신 상태는 그리 곱지 못합니다. 너무 화가 나서, 도저히 그 죽음을 못 받아들이겠어서, 그 죽음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어야 하는 스스로가 밉고 답답해서... 그래서 도저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만큼 정돈된 마음 상태도 아니기에, 그럴 자격도 없기에...


오랜 기간 함께 해 온 한 사업장 동지들에게만 전 최근 이 거짓말을 스물두 번 했습니다. 아직은 그 죽음을 위로할 다른 말을 찾지 못해서이지요. 사람 마음 다 비슷하다고들 하더니 저만 그런 게 아닌가 봅디다. 아주 잠깐 쌍용자동차 스물두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대한문 분향소에 앉아 있을 때면 그곳을 찾는 분들 대부분이 “미안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죠. 비슷한 마음이겠지요.

몸뚱아리가 가진 노동할 수 있는 능력 말고는 이 처절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어떤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은 노동자들로부터 그 유일한 생존 수단을 빼앗아 버리는 해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그래서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쳤지요. 그 노동자 당사자 뿐 아니라 그의 노동력에 의지해 생존을 영위하던 가족들에게까지 이르는 살인이니까요. 그래요. 당신도 지켜보셨죠? 벌건 대낮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심지어 온 사회 구성원이 편히 앉아 보시라고 TV를 통해 생중계 되던 그 살인 행각을. 그 잔악무도한 살인범이 다름 아닌 당신과 내가 구성원으로 있는 이 사회체제이기에, 그래서 그렇게 분향소를 찾을 때마다 “미안하다”고들 하셨겠지요.

허나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적어도 그들 스물두 명 동지의 영정을 온 몸뚱이로 지키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는요. 그들은 불쌍한 분들도 안쓰러운 이웃도 아닐 겁니다. 그들은 그 살인행각에 결코 동조하지 않고 있으며 여전히 그 살인범에 맞서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들의 투쟁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살인범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그 살인범과 살인행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그러니 미안하려거든 그 살인행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이렇다 할 행동을 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게 그래야 하겠지요.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만 미안해집시다. 아니 적어도 미안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이젠 행동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라는 말을 한자 그대로 풀어보면 ‘돈이 근본’이라는 의미라지요. 밑도 끝도 없이 오로지 팽창하고자 하는 생리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이윤’에 영혼과 인간성을 온전히 팔아넘겨버린 살인마 집단인 자본가와 국가권력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 노동자 민중의 곁에 향내는 더욱 짙어져 갈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향내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기에 더 이상의 죽음을 막을 희망도 있습니다. 우린 대한문 분향소에서, 수많은 이들에 의해 포위당했던 평택의 공장에서 그 희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끝내 그 향내를 인식할 수도 없을 만큼 무감각해지기 전에, 더 이상은 늦기 전에 이제 저들 살인마들과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살 길이기에. 진정으로 우리 곁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목숨들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이기에.

그 때 비로소 명복을 빌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로소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말
5월 18일은 22번째 돌아가신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49재가 있는 날입니다. 그리고 5월 19일에는 범국민대회가 있습니다. 이제 추모를 넘어 이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투쟁의 날입니다. 5월 19일 토요일 4시 서울역에 모두 모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