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에 슬퍼하고 연민으로 우는 사람들은 착하다. 그 착함이 자선 봉사로 가는 생도 착하다. 하지만 동정과 자선으로 자기의 부를 자랑하고 부를 만드는 과정을 선의로 은폐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가면을 쓴 착함에 속아 감격한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로 은혜를 입는 입장이 된다. 그래서 동정과 자선은 힘을 갖은 이들의 몫이다. 반면에 피해 당사자들인 민중들은 '약자에 대한 존중과 연대, 억압과 착취에 대한 분노'로 세상을 본다. 주체적 관점과 분노를 품은 열정 없이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단 한치도 풀리지 않을 것이고, 구조적 악에 대한 한 치의 응징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노로 학살과 참사를 대응하지 않는다면, 손과 발이 품을 파는 분노의 실천 없이는, 우리의 슬픈 눈물은 사람을 적대하고 돈을 숭배하는 이들에게는 나약한 무리들의 처량한 탄식에 불과하다. 그들에겐 오히려 참을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더 쥐어짜도 된다는 신호쯤으로 여길 거다. 그래서 영화 <두 개의 문>은 사람들에게 묻는다. 정말 언제까지 참고 있을 것인가를, 정말 언제까지 인내해야 하는 가를, 저들을 더욱 흉폭하고 반인간적으로 만들 것인가를.
영화를 보며 인상 깊게 다가 온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검찰과 경찰이라는 힘이 진실의 규명이 아니라 사태의 조작으로 공권력이 아니라 국가 폭력으로 작동되는 과정이다. 그 증거가 끝내 재판정에도 제출하지 않는, 아직 구체적인 조작이 작동되기 전인 ‘초기 수사 자료’들이다. 그러니 조작과 은폐의 실체는 바로 권력이다. 처음부터 탐욕과 이권으로 출발한 이명박 정권의 민주적 토대는 결코 클 수 없다. 시민들의 촛불 저항에 사죄를 해야 했던 정권은 자신들과 민주주의는 궁합이 맞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민주주의가 불러오는 획일적이지 않고 일사불란하지 않는 과정을 불법과 혼란으로 보고 불관용 원칙을 천명했다.
이제 정부의 힘은 민주주의를 적대하는 폭력으로 돌려진다. 실제 2008년 3월 법무부는 시위진압 경찰의 ‘과감한’ 면책특권 보장과 불법파업에 대한 형사배상 명령을 도입하겠다며 ‘불법에 대한 불관용의 원칙’을 천명했다. 집회 시위라는 헌법적 권리를 불법에 무관용 원칙을 표명한 것은 노무현 정권시절이다. 이후 이명박 정권에 들어와서 군사독재 정권의 무기였던 경찰과 검찰이 민주화 시대 준법론을 내세워 다시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흉기가 됐다. 영화는 수사가 진실 규명이 아니라 정권을 지키기 위한 조작으로 갔는지를 법정에 선 경찰의 말을 통해 증명한다.
‘공무원에겐 군인이나 경찰에겐 영혼이 없다, 오직 명령에 충실하면 된다’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상식을 만든 것은 한국의 불행한 현대사다.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군국주의 유산이, 군사독재의 쿠데타에서 시작된 독재정권의 망령이, 우선 나 먼저 살고 봐야 한다는 이상한 지혜들이 모여 광주학살을 명령해도, 용산학살을 명령해도 그대로 수행해도 어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파시스트적 관점을 고정시켰다. 스스로를 양심과 영혼과 사람됨의 존엄함을 부정하고 기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명령에 따른 업무수행”이니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거다.
불의에 저항하고 저항을 위해 연대하는 것이 민주주의 시민의 제1원리다. 만약 사람들이 저항을 포기했다면 인간은 아직도 노예제에 노예로 살고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저항하지 않아 발생된 국가폭력의 잔인함을 직시하며 더 이상 관용을 보여주어서는 안 됨을 강조한다. 용산에서 눈물이 주먹으로 연결되지 않자 쌍용의 22명의 죽음을 불러 오고 말았다고 고발하고 있다. 그렇다.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지 않으면 불의와 폭력의 공범이 된다. 지금 우리 앞에 저항의 시대가 다시 왔다. 저항하자. 99%의 힘으로. 그래서 공무원에게도 최소한의 인간됨을 위한 양심과 영혼을 돌려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