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들과 똑같은 질환을 앓던 어떤 노동자는 자신의 질환과 오롯이 홀로 맞서야 했다. 독거노인과 저소득층 가정에 도배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성정의 그 노동자는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운동과 산악회 활동도 하고 휴직을 하고 병원 치료도 받았다. 그러나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업무로 돌아온 그 노동자는 보호받지 못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를 두려운 병증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의 전직요구도 묵살되었다. 결국 교대근무를 마친 아침, 자신이 수도 없이 몰았던 지하철 기관차에 몸을 던져 그 지긋지긋한 불안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와 같은 일을 했던 노동자들 중에 똑같은 질환으로 이런 비극적 선택을 한 것은 그 만이 아니었다. 2003년, 그리고 2012년 모두 3명의 지하철 기관사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공황장애라는 똑같은 질환의 경과는 이렇게 극명하게 갈라진다.
공황장애를 임상적으로 진단하는 기준은 이렇다. 먼저 공황 증상이 있어야 한다. 이 증상은 죽음의 공포를 일으킬 만큼 격심하기도 하여 공황발작이라고도 한다.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난다. 심장박동 증가, 식은땀, 손발이나 전신 떨림, 숨 가쁜 느낌과 질식감, 가슴 통증이나 불쾌감, 비현실감, 오한이나 화끈거림, 메스꺼움, 현기증, 감각이상 등이 올 수 있다. 이로 인해 자제력을 상실하거나 미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증상의 재발 자체 혹은 그 결과에 대하여 1개월 이상 지속적인 불안을 느끼거나 공황발작으로 인해서 사회 활동이나 행동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를 공황장애라고 진단한다. 공황발작과 유사한 증상을 유발할 수 있는 갑상선 질환이나 심장질환과 같은 신체적 질병이 없는지도 확인이 필요하다.
살다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특정한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상황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쳐 교감신경을 활성화 시켜 앞서 말한 공황장애에서 오는 것과 같은 다양한 증상을 유발하게 되지만 대부분 이런 경험은 스스로 제어가능하고 특정 상황이 지나면 사라진다. 공황장애 환자들은 이러한 신체증상이 급작스럽고 격렬하게 나타나며 이것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늘 불안해한다. 이것을 예기불안이라고 하며 이 예기불안이 일상을 무너뜨리게 된다. 한번 증상이 발생했던 공간이나 불안을 느끼게 되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게 되며, 일상생활이나 직장생활에서 위축되거나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공황장애가 일어나는 원인은 아직 명백히 밝혀진 바 없다. 다만 많은 질환들이 개개인의 면역체계나 건강상태 유전적 소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듯 개인의 생물학적 소인차이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경험과 심리적 정신적 사건들에 대한 스트레스들이 과도한 신체반응을 초래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공황장애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이 죽을 것 같은 심한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주기는 하지만 실제로 생명에 위협을 주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약물 치료와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하게 되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한 병이다. 공황장애는 개인적 병리현상일 수 있으나 이를 악화시키고 이번 지하철 기관사의 경우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사회적 병리현상인 셈이다. 치유할 수 있고 건강하게 일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과학과 의학의 발달에 걸맞는 노동조건의 개선, 노동자 건강권에 대한 인식전환, 혹은 그것을 가져올 노동자들의 힘이 뒤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철도 기관사의 예처럼 두 사람이 감당해야할 일을 1인 승무체계로 바꾸어 버리고 한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 버리는 한, 뻔히 알고 있는 치료 방법이 있음에도 신체적 질병이든 정신적 질병이든 아프고 힘든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는 노동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비극은 재현될 것이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숨 막히는 일터로 돌아가 겪게 되는 노동자들의 예기불안을 오히려, 천년만년 지속될 것만 같던 세상을 누려오던 이들에게 어느 날 세상이 확 바뀔지도 모른다는 예기불안으로 안겨주는 것을 꿈꿔보자. (출처=금속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