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분노의 시대 분노의 미학, 민중 이야기꾼 “백기완”

[기고] “정치가 질곡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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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 곳곳에서 양극화의 폭압에 짓눌려온 99% 민중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세계금융자본의 중심인 뉴욕 월가까지 점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소위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온 1% 국제독점자본 특권층의 부도덕성과 비윤리성이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그런데 이렇듯 전세계 피해민중을 대변하는 저항운동이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하게 된 배후(?)에는 프랑스의 지성인 스테판에셀의 “분노하라”라는 글이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90세가 넘은 레지스땅스 출신 노 투쟁가가 유언처럼 써낸 짧은 분노의 글이 전세계 지식인과 민중의 마음을 움직여 즉각 행동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였을까, 아니면 역사적 필연이었을까?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들

나는 신문과 방송에 난 뉴욕 월가의 농성 시위 장면을 보면서 지금 여기 우리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훨씬 더 분노할만한 갖가지 사태들을 다시금 돌아보았다. 막무가내로 추진된 4대강 국토파괴, 용산 철거민 참사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분노, 차별받는 비정규직의 양산과 살인적인 정리해고, 매국적이고 불평등한 한미 FTA 협정체결, 무한탐욕의 방조와 정의의 실종, 평화를 폭파해버린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자본 권력의 언론생태 교란과 불공정보도 강요, 무도한 정치검찰의 표적수사와 기소독점, 거기에 눈치보며 널춤 추는 ‘부러진’ 사법판결, 수구세력의 국가권력 사유화, 그리고 선거를 통한 교묘한 정권연장 음모 등등...

그러면서 나는 ‘지금 여기’ 우리 한국에서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민중의 분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분이 누구실까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는 내가 젊은 시절부터 존경하고 따랐던 몇 분이 떠올랐는데, 누구보다도 평생을 통일운동과 반독재 노동민중투쟁에 몸바쳐 오신 백기완 선생님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분이 아니실까 생각되었다.


백기완의 민중미학은 ‘분노의 미학’

그 백기완 선생님이 올해 팔순을 맞으셔서, 얼마 전 선생님을 따르는 후배 제자들이 나서서 ‘팔순맞이 노나메기 한마당 잔치’를 열어드렸다. ‘노나메기’란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벗나래(세상)”란 뜻이란다. 이 날 잔치에 모인 분들과 노나메기재단설립추진위원회 임원들이 결의를 다지면서 내놓은 주요사업은 진보진영의 통합적 활동거점이 될 ‘노나메기 마당집’ 건립에 관한 것이었고, 그 첫 사업으로 ‘노나메기 사상’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백기완의 민중미학 특강’이 마련되었다는 알림이 있었다.

‘백기완’ 하면 ‘민중’을 연결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대체 백기완과 ‘미학’과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생뚱맞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한 것이 아님은 물론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은 선생이 ‘미학’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기완 선생의 강연이나 강좌를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의 ‘이야기판’을 한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대체 대학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학문이 왜 존재하는지 심각한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미학을 정식으로 전공한 인사들, 예를 들어 미학의 천재로 저항시인이요 생명사상으로 일가를 이룬 김지하 시인은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백선생과는 호형호제하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인문학의 새 활로를 연 국민해설사(?) 유홍준 교수나 탈춤 민중문화운동의 교주(?) 대우를 받는 채희완 교수 역시 모두 젊은 날 백기완 선생을 만나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만큼 백기완 선생의 세상을 보는 눈은 상투적 학문 따위 수준을 넘어선, 마치 죽비로 내리치는 듯한 깨침의 경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백기완 선생의 미학은 대체 어떤 미학인가? 흔히 미적 범주를 얘기할 때 장엄이니 비장이니, 숭고미니 우아미니, 골계니 해학이니 풍자니 하는 등의 범주를 말하곤 하는데, 선생의 이야기는 대체 어떤 범주의 미를 관통하고 있는가? 나는 그것이 ‘분노’라고 생각한다. 백기완 선생의 ‘이야기의 미학’은 앞서의 미적 범주들을 다 포괄하면서도 핵심적으로는 ‘부당한 압제로 인해 깨져나간 민중의 삶과 고통에 분노하고 그 삶과 꿈을 다시 불러 일으켜 세우는’ <분노의 미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춤의 근원은 꿈틀거리는 몸부림

내가 백기완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70년대 초반 내가 서울대 문리과대학 연극회장이던 시절, 대학가에 탈춤운동이 막 시작되던 때, ‘아침이슬’의 가수이자 작곡가인 친구 김민기와 함께 명동 어느 건물에 있는 심우성 선생님 민속극연구소를 찾아갔다가 같은 층에 백범사상연구소를 차려놓고 계시던 백기완 선생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백선생을 뵙자마자 첫눈에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그에게서 백두산 범의 기상을 느꼈기 때문이다. 백두산을 가본 적이 없고 범을 본 적이 없는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그 사무실에는 ‘백범사상연구소’가 있었고, 김구 선생의 호 백범(白凡)은 ‘백정처럼 천한 평범한 백성’이란 뜻이었음에도, 나는 백기완 선생이 백범 김구선생의 범의 기상을 이어받은 분이 분명하다는 예감에 빠졌던 것이다.

그 날 백기완 선생이 진한 황해도 사투리로 우리에게 던진 말씀은 뜻밖에도 정치나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민속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탈춤에 관심갖고 운동을 한다고? 거 아주 근사하구나야. 그런데 말이야, 지금 와서 전수합네 하는 탈춤 이거는 관아의 아전들이나 했던 왜곡된 춤이고 진짜 민중의 탈춤, 마당굿은 따로 있디.” 나는 의아해져서 조심스럽게 선생께 질문하였다. “진짜 탈춤, 마당굿은 어떻게 다릅니까?” 그러자 선생은 그 자리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선생의 견해를 포효하듯 꺼내놓으셨는데, 그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참으로 놀랄만한 시각이었다. “탈판에 보면 맨처음 먹중이 나와서 춤추지 않네? 춘정을 못이겨 나왔다고 하면서 드러누워 꿈틀거리는데, 그기 다 가짜야. 그기 원래는 멍석말이춤이야. 멍석말이가 뭐이냐 하면 양반 지주 놈들이 말 안듣는 머슴을 잡아다 멍석에 말아 패 죽이는데, 원한 품고 죽은 머슴이 장단치는 소리를 채찍삼아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는 몸부림이 멍석말이춤이다 이말이디. 그리고 요새 살풀이춤이라고 하는 거, 그것들 다 기생춤으로 변질된 거이야. 살풀이가 뭐가? 흔히 액은 쫒고 살은 푼다고들 하지마는, 살풀이춤은 본래 화살을 뽑아내는 몸짓이디. 적이 쏜 화살이 어깨에 박히면 꿈틀하면서 그 살을 잡아 뽑아내고, 등에 와서 박히면 다시 그 화살을 잡아 뽑아내고... 이렇게 맺힌 건 풀어내고 박힌 건 뽑아내는 동작 그 사위가 진짜 살풀이 춤사위라고.”

이제 막 탈춤을 발견하고 탈춤운동을 처음 시작한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넘치던 우리들에게 민속학자도 아닌 백기완 선생과의 만남은 전혀 예기치 못한 충격이었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해인 1974년 1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영구집권을 꾀하며 유신체제를 획책하던 삼엄한 시기, 칠흑 같은 질곡의 판을 돌연 갈라치며 나선 ‘새뚝이-현상타파의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었다. 장준하와 백기완을 잡아들이려고 군사독재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였다.

자기 둥지를 부수고 싸움에 나서는 장산곶매 이야기

유신의 압제가 계속되던 1977년 무렵, 극심한 탄압을 뚫고 백기완 선생의 책 한권이 어렵게 세상에 나온 바, 책 제목이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였다.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자그만 책을 읽고 받은 감동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졸립기는커녕 가슴은 마구 두근거렸고, 정신은 말짱해오기만 했으니까... 아! 우리 민족에게도 대륙이 있었구나! 우리를 갈라놓은 분단의 높은 벽이 우리의 감수성조차 대륙과 갈라놓은 채 이렇게 왜소하게 만들었구나! 오호, 우리가 업신여기고 낮춰 생각했던 ‘여자’와 ‘딸’ ‘아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장부’라는 여성의 위대함이 있었구나!

무엇보다도 그 책에서 우리를 강타한 것은 황해도에 구전되어온 ‘장산곶매’ 옛이야기였다. 장산곶매 이야기는 그 무렵 작가 황석영 선배가 한국일보에 야심차게 연재하고 있던 대하역사소설 ‘장길산’ 첫머리에 소설 전체의 주제를 상징하는 프롤로그 형식으로 기록되어 이미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바 있는데, 비로소 날것 그대로 원전을 접한 감동은 소설과는 또 달랐다. 날짐승 중 으뜸인 매, 그중에서도 으뜸인 장수매인 장산곶매가 대륙으로 사냥을 나섬에 떠나기 전날 밤새 부리질을 하여 자기 둥지를 부순다는 이야기는 유신독재정권과의 한판 싸움을 위해 자신의 안락과 일상을 버려야만 하는 우리에게 결단의 시간을 재촉하며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그런데 정작 내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잠을 못 이룬 것은 그 다음 이야기 때문이었다. 물 건너 큰 대륙에서 엄청나게 큰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쳐들어왔는데도 마을사람들이 모르고 잠들어있는 동안 장산곶매 혼자서 밤새 그 독수리와 맞서 싸워 겨우 물리친 후 피투성이가 되어 벼랑위 낙락장송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는데 어디서 피냄새를 맡은 구렁이가 나타나 나무를 감고 기어올라가 장산곶매를 공격하거날, 마을사람들이 뒤늦게 알고 장산곶매더러 빨리 날아오르라고 소리를 지르며 꽹가리를 쳐댔으나 웬일인지 날개만 퍼덕일 뿐 날아오르지 못하는지라, 하릴없이 구렁이에게 당하고 말았것다. 알고보니 장산곶매가 어릴 적에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매라고 발목에 끈을 매어 표식을 해놓았었는데 그만 그 끈이 나뭇가지에 걸려, 지친 장산곶매가 그걸 끊어내지 못하고 결국 날아오르지 못했던 것. 그 대목을 읽으면서 내가 밤새 뒤척였던 것은 그 우화에 내재한 은유 때문이었다. 분단정부 수립 후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백범 김구선생이 그만 동족에 의해 피살된 것이 바로 그 운명의 끈 아니던가?

이후 ‘장산곶매’는 전설이 아닌 현실에서 민중의 분노와 결단, 저항과 비상의 표상이 되었다. 젊은 화가 최병수가 그린 장산곶매 걸개그림은 그 방대한 규모와 뛰어난 표현력으로 최고의 걸작품으로 남았으며, 90년대초 결성된 민중영화집단 ‘장산곶매’는 첫 작품으로 당대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파업전야’를 완성하여 독재와 자본에 저항하는 민중예술사의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

그리고 2011년, 국가권력마저 독점자본에 잠식되어버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해고노동자 김진숙은 부산 부둣가 한진중공업 크레인 꼭대기에 올라가 300일동안 초인적인 인내로 고공 농성 사투를 벌였다. 죽음이냐 굴종이냐 갈림길에 선 김진숙에게 백기완 선생님은 ‘일어나자, 일어나 이 밤을 뚫자’는 피끓는 벽시를 띄웠고, 이 캄캄한 어둠을 뚫기 위한 연대 동참운동이 ‘희망버스’라는 이름으로 일어났다. 그리하여 자기 둥지를 부수고 사생결단 저 높은 크레인 위로 올라간 김진숙은 우리 시대의 ‘장산곶매’가 되었다.

소리에는 쇳소리가 들어있어야 돼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그의 오른팔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간 뒤, 그 해 12월 어느날 서울 YWCA 강당에서 혼례식을 위장한 민주재야인사들의 집회가 있었다. 이른바 YWCA위장결혼식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고 있던 전두환 군부집단은 이 사건의 주모자로 백기완 등을 지목하였고, 백 선생은 보안사로 끌려가 여러 달 동안 감금되어 갖은 고문과 악행을 당하였다. 12.12사태와 광주에서의 살육기간 내내 감옥에 갇혀있다가 소위 5공화국이 출범되고나서야 겨우 풀려난 선생은 거의 빈사상태였다. 80kg 나가던 몸무게가 40kg으로 줄었으며, 선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식을 잃고 신음하곤 하였다.

나는 그 무렵 동양텔레비젼방송국(TBC-TV) PD로 재직중이면서 스승이신 정권진 명창께 판소리를 전수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백선생의 소식을 듣고 장충동에 있는 낡은 적산가옥 2층집으로 병문안을 갔다가 선생님의 참혹한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 자주 댁에 들르게 되었다. 한번은 의식이 오락가락하시는 선생님 곁에 그냥 오래 앉아있기가 무료하여 그동안 수련한 판소리 심청가 중에서 한 대목을 들려드렸는데, 누워계시던 선생님이 불현듯 의식을 회복하고 벌떡 일어나시는 것 아닌가? 이날부터 선생님의 쾌유를 위한 일종의 ‘소리치료’가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어느 날 의식을 잠시 회복하신 선생님이 내 소리에 대한 평을 이렇게 하셨다. “진택아, 너 소리 실력 많이 늘었구나야. 네 소리를 듣고 내가 정신이 많이 돌아왔어. 기런데말이야, 소리에는 쇳소리가 들어있어야 돼. 쇳소리가 뭐이냐하면 오래도록 노동으로 단련한 사람들, 배고픔과 고통을 수없이 겪어본 사람들 몸에 배여있는 소리야. 진택이 너는 혼자 수련은 했어도 노동으로 단련한 적이 없고 배고픔과 고통을 겪어보질 않아서 쇳소리가 없는 게야.”

놀라우리만치 일관된 민중적 관점이었다. 판소리에서 가장 높이 치는 성음에 수리성, 통성, 철성 등이 있는바 쇳소리란 바로 철성을 말하는 것. 수리성은 목이 칵 쉬어서 나오는 소리요 통성은 뱃심으로 내지르는 소리라. 나는 사실 그때까지도 철성이 어떤 소리인지 잘 모르고 있었던 셈인데, 백 선생은 철성을 노동의 땀과 피와 고통과 눈물이 쌓여 응축된 분노, 그 분노를 삭혀 내지르는 성음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생각을 곧추세우시곤 하던 선생님도 고문의 후유증을 더 이상 견디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내 친구 이호웅을 비롯한 지인들이 앞장서 주선하여 선생님을 강원도 어느 산골마을로 모셔 요양을 시켜드리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그 때의 절절한 심정을 한편의 시로 남겨두었다.

전지 요양의 길목에서

여기는 지금 어데쯤일까?
흙먼지 날리며 한참 달려온 강원도 산비탈 인적없는 나루터
벗들은 살점을 뜯어주며 살아서 돌아오라고
살점을 뜯어주며 살아서 이기고 돌아오라고 몸부림쳤지만
나는 결코 어디에서고 홀로가 아님을 이제사 알았네그려.
저 끝없이 이어진 산줄기마다 파랗게 무르녹는 병사들
소나무병사 오리나무병사
그리고 지난 겨울 깡추위에 상한 참나무병사들까지,
조국을 지키고 민중을 건지려다 쓰러진
이름없는 영웅들의 전설을 깃발처럼 날리며 서있는
저 천만 병사들의 아우성소리.
벗들이여! 살점을 뜯어준 벗들이여!
첩첩산 인적없는 이 골짝에서 내가 만약 살아서 돌아간다면
반드시 내 속의 병마와 싸워서 이기고 돌아가는줄 알라.
그러나 만약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렇게 전해다오
결코 죽어서 못가는 것이 아니라고
저 이름없는 영웅들의 전설에 묻혀서
저 천만 병사들의 아우성 소리에 묻혀서 묻혀서
사랑하는 내 조국땅, 통일을 위한 한줌 거름이 되고 있다고
벗들이여! 이렇게 전해다오.


사실 백기완 선생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광주민중항쟁 이후 대표적인 투쟁가요로 자리매김한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이라 할 수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항쟁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들불야학 후배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담은 노래굿 ‘넋풀이’ 카세트테이프에 실려있는 노래이다. 이 테이프 제작의 실질적 총기획 및 대본 연출은 당시 광주에 거주하던 작가 황석영 선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하여 ‘산자여 따르라’로 끝나는 그 비장한 가사는 백기완 선생의 미발표시 ‘묏비나리’의 핵심 구절을 노랫말로 차용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내가 이 글에 백선생의 시 ‘전지 요양의 길목에서’를 다시 수록하는 것은 쇳소리가 소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에도 쇳소리가 들어있다는 것을, 쇳소리로 외치는 비장과 분노의 절규야말로 가장 감동적인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정치가 질곡의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법

1987년 남영동 치안본부에서 저질러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전두환 군부독재의 아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신헌법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국민적 항쟁은 6월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고, 그 와중에서 연세대 학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한열군의 장례식이 있던 날 현직 서울대 교수인 춤꾼 이애주는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영결식장에서 이한열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영령을 위로하는 한판 굿춤을 추었는데, 춤의 기세가 우리 민속사나 무용사에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형세였다. 그 춤을 살풀이춤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사위와 모양새가 같지 않고, 해서 일부 언론에서는 그 춤을 일컬어 ‘시국춤’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춤을 현장에서 지켜보셨던 백기완 선생은 얼마 뒤 모인 자리에서 그 춤을 ‘썽풀이춤’이라고 칭하였다. 처음 듣는 용어였다. 그러나 처음 듣는 순간 ‘썽풀이춤’이야말로 이애주 교수가 춘 그 춤을 일컫는 가장 적확한 용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썽풀이춤’은 ‘한풀이춤’이나 ‘살풀이춤’과는 어떻게 다른가? 나는 그것이 ‘분노의 미학’과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분노, 시대에 대한 분노가 솟구쳐서 온 세상 온 시대를 움켜쥐고 잡아 흔들어 질곡을 깨트리는 몸부림, 그것이 ‘썽풀이춤’인 것이다.

백 선생은 그 날 같은 자리에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정치가 질곡의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는 게야!”

1987년 12월의 대선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과제를 남겼다. 6월항쟁의 성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였으나 김대중 김영삼 두 분이 모두 출마함으로써 그동안 생사를 같이하며 투쟁해왔던 재야진영이 대선대응 노선차이로 분열하게 되었다. 한쪽은 김대중 선생이 좀 더 진취적이고 역량이 크신지라 그 분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한쪽은 온건한 김영삼 총재가 먼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안전할 수 있으니 두 분이 어떤 식으로든 단일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선 일자는 점점 다가오고 백척간두! 장대 끝에 올라선 위기라! 일각에서 민중후보를 독자적으로 내세워 후보단일화를 힘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 해 한겨레신문이 창간되던 날, 행사장인 YWCA강당에 ‘백기완 선생을 민중후보로 추대하자’는 긴급전단이 나돌았다. 분위기가 뒤숭숭할제 앞서 축사를 하던 내빈 한 분이 민중후보 추대는 누군가의 공작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우려하였다. 그런데 다음번 축사는 백 선생 차례였다. 연단에 나선 백 선생은 무거운 분위기로 말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방금 어느 인사께서 이 시점에 민중후보를 추대하는 것은 누구의 공작일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공작이 틀림없습니다.” 순순히 비판을 시인하는 듯하던 백 선생이 돌연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여러분, 이 백기완이를 민중후보로 추대한 주체는 바로 민중입니다. 다른 누구의 공작도 아닌 바로 민중 자신의 공작입니다.” 건곤일척! 목숨을 걸고 진검으로 겨뤄야 하는 단판 승부! 일순 장내가 조용해지면서 정적이 잠시 흘렀다.

87년 대선 시기에 나는 민중 대통령후보 백기완의 특별보좌관을 맡았다. 요즘 대선처럼 수백명 명함 찍어 돌리는 특보단이 아니라 단 한명 밖에 없는 진짜 특별보좌관이었다. 다만 나는 거기에 백기완 후보의 운전기사이자 수행비서를 겸해야 했다. 민중후보 진영에 자동차라곤 내가 가진 포니엑셀 한 대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바로 그 해 9월에 늦은 외동딸을 낳기 위해 맘먹고 운전면허 따놓고 누나가 쓰던 중고차를 받아놨던 것이었다. 다행히 화가 김정헌 선배가 뒤늦게 자신의 낡은 차를 빌려줘서 민중대통령 후보 진영의 자동차는 선거 끝날 때까지 겨우 두 대를 유지했다.

당시 군부독재 집권세력은 민중후보 진영을 ‘좌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선거본부로 쓰고 있는 진관동 기자촌 선생댁에 협박전화들이 걸려오곤 해서 백 선생도 그런 일들이 적잖이 신경에 거슬리는 듯했다. 물론 후보 조직 안에는 진보적 노동단체 일부가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좌경으로 몰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후보 자신이 좌니 우니 하는 따위에 개의치 않는 분이기도 했고, 선생 자신의 언표를 빌면 좌우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 하는 싸움만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이 싸움은 옳고 그름의 싸움이지 오른쪽과 왼쪽의 싸움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군부독재세력의 이념 시비를 적절히 방어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던 중 대학로 대규모 집회에 무려 10만여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자칭 광대인 나는 단상에서 사회를 맡았고, 일단 분노의 감정보다는 풍자의 묘수가 먼저 필요하다고 직감했다.

“여러분, 저 군부독재세력이 우리 민중후보를 좌경이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좌경이 대체 뭡니까? 운전사가 핸들을 갑자기 우측으로 꺾으면 승객들은 모두 좌로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극우 세력에게 운전을 맡기면 우리 국민은 모두 좌경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똑바로 서있으려면 저 극우 독재 운전사를 갈아쳐야 합니다.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군중들의 반응은 열화와 같았고, 그 후로 민중후보를 좌경으로 모는 언동은 수그러들었다.

87년 대선정국에서 민주진영 양김후보의 분열을 막지못한 백 선생은 선거 이틀전 피눈물을 머금고 사퇴하였으며, 선거 결과는 예측한 그대로 참담한 패배였다. 87년 대선 패배는 우리 정치사에 엄청난 피해와 좌절을 남긴바, 하나는 영호남간 배타적 지역감정의 심화요, 다른 하나는 수구부패세력을 잔존시킴으로써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이 지금도 권력을 쥐고 기승을 부리는 정치판 구도가 고착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해인 88년 총선이 다가와 모두들 국회의원 출마를 하느니마느니 바삐 돌아다니던 시기, 나는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예술가로서 정치판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백 선생이 나를 앉혀놓고 내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듯 이리 말씀 하셨다. “진택아, 너는 마당굿을 해야 돼. 너는 천상 굿쟁이야. 정치가 질곡의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 서는 법! 너는 우리 마당굿을 다시 살려내서 그걸로 질곡의 늪에 빠진 정치판의 새뚝이가 돼야 돼.”

나는 비로소 부담을 덜고 제 자리로 돌아와, 선후배들과 함께 민예총을 출범시키고 예술창작과 문화예술운동을 동시에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민중적 이야기꾼의 표상, 백기완

백기완 선생은 통일꾼이자 혁명가이고 사상가이며, 시인이자 이야기꾼이다. 사실은 노래도 정말 잘 부르신다. 작년 서울대 문화관에서 있은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이라는 공연에서는 흘러간 노래들을 정치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유행가가 아닌 ‘시대의 노래’로 들어올리는 빼어난 시각을 보여줌으로써 2천명이 넘는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바 있다. 백선생의 흘러간 노래솜씨는 분노의 감정을 삭히고삭혀 끝내 비애와 연민과 그리움의 정서로 치환해내는 ‘연금술’의 경지이다.

하지만 백기완 선생의 진면목은 민중적 ‘이야기꾼’이라는 점에 있다. 이야기의 내용도 탁월하거니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 또한 탁월하다. 어떤 이는 “그 분의 연설을 듣고 넋을 잃은 것같은 느낌이었다... 강약, 완급, 고저, 냉온... 상상할 수 있는 수법은 모조리 동원되어 청중의 마음을 쥐락펴락 하였다”고 소감을 피력할 정도였다. 만약 우리나라가 판소리 아닌 ‘판이야기’에도 예능보유자를 인정한다면 백기완 선생이야말로 이 부문에서 첫 번째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야 마땅하다.

백기완 선생의 이야기 내용은 주로 민중적 전형성을 지닌 인물 또는 동물에 관한 소재들과 민중이 염원하는 이상향에 관한 주제들로 되어있다. 영웅설화의 민중판이라고나 할까? 질곡의 늪에 빠진 캄캄한 세상에 샛별처럼 나타나 현상 타파의 계기를 일구는 전형적 인물 ‘새뚝이’, 자기를 옥죄고 있던 쇠사슬을 끊고 스스로 해방을 일구는 사내 ‘쇠뿔이’, 부당한 상대에 고개 숙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워 앞만 보고 가는 사내 ‘곧은목지’ 등은 분노의 현실을 투쟁을 통해 타개하되 이를 자기자신의 완성으로 승화시키는 ‘민중적 전형성’을 지닌 대표적 인물들로,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 에 나오는 인물들보다 훨씬 더 우렁차고 역동적이다.

그런가하면 ‘장산곶매’ 이야기는 생사를 결단하고 싸움터에 나서는 전사, 의사, 열사의 전형상을 은유한 설화이며, ‘이심이’ 이야기는 착하고 힘없는 민중들이 힘을 합치면 무지막지한 지배계층의 폭력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예언적 설화라 할 수 있다. 또한 ‘골굿떼 이야기’는 고깃국에 이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새세상을 염원하는 민중의 꿈을 대변한 설화일 터이며, ‘찬우물 이야기’는 아무리 마셔도마셔도 마르지 않고 샘이 솟는 땅, 모두가 평등하게 생명과 평화를 누리는 그런 이상향을 그린 설화로 읽힌다.

이러한 옛이야기들의 바탕에는 ‘부당한 압제로 인해 깨져나간 민중의 삶과 고통에 분노하고 그 삶과 꿈을 다시 불러 일으켜 세우는’ <분노의 미학>이 두텁게 깔려있음을 눈여겨 볼 일이다.

우리시대 민중적 이야기꾼의 표상인 백기완 선생이 올해 팔순을 맞으시어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벗나래(세상)”인 ‘노나메기 세상’을 만들고자 첫 사업으로 민중미학특강을 계획하셨다고 한다. 안내서를 살펴보니 민중설화 위주로 짜여있어 모처럼 선생님의 폭포같고 천둥소리같은 이야기판을 제때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선생이 생각하시는 노나메기 정신은 무엇이며 노나메기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지, 독점자본주의가 극도로 활개치는 이때 어쩌자고 노나메기를 들고 나왔는지 한번 속 시원히 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한번 돌아보자. 우리는 지금 이 시대 분노할 것에 대해 제대로 분노하고 있는가? 분노의 대상, 분노의 실체, 분노의 표적은 진실로 명확한가? 다시 한번 돌아보자.

백기완 선생 이야기판의 특징은 ‘댓거리’에 있다.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꾼과 볼꾼이 서로 댓거리를 주고받으며 왁자지껄 떠들어야 진정한 ‘판’이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백기완 선생 이야기판에 너도나도 함께 하여 마음껏 댓거리를 주고받아보자. 아직도 새벽이 오지 않은 분노의 시대! 백기완 선생의 민중미학, 분노의 미학에 한번 흠뻑 빠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