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대학교의 ‘공대생’이었던 나의 친구들은 스스로를 ‘공돌이’라 불렀다. ‘공돌이’가 지칭하는 대상이 어느덧 ‘공장노동자’에서 ‘공학도’로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요즘엔 공장노동자들도 웬만해선 ‘대졸자’라는 것인지... 어쨌거나 대학 진학률이 80%인 시대엔 ‘공돌이’도 ‘고학력자’가 되어가고 있나보다. 내 주위에서 말하는 ‘공돌이’는 기껏해야 이런 정도의 용례를 가졌다. 그리고 영화 속 여성노동자가 말하는 것처럼 나 역시 ‘공순이’는, “나중에 ‘공순이’ 되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하는 어른들의 ‘협박’ 속에서나 간혹 들을 수 있던 말이었다. 혹은 드디어 나도 그 80%의 대열에 끼여 ‘대학물’을 먹고 노동운동사를 학습하면서 접한 하나의 호칭으로 들을 수 있던 말이었다. 그러나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살인적 노동 강도에 죽음으로 저항한 노동자가 있을 만큼, ‘공순이’는 공장노동자에 대한 무시와 사회적 차별을 담고 있었기에, 우리는 ‘공순이’라는 말을 금기시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호칭의 금기가 공장노동자의 ‘존재’까지도 금기시하게 한 것은 아닌가, 자문하게 된다. 노동자, 그냥 노동자가 아니라, ‘여성노동자’의 존재를 전면에 드러내고 그녀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영화가 홍효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무도 꾸지 않은 꿈>이다.
[출처: <아무도 꾸지 않은 꿈> 화면 캡처] |
‘주관적’으로 담아낸 구미의 풍경
통근버스를 타고 공장과 집을 오가는 여성들. 밤이 깊을수록 더욱 화려해지는 유흥가와 간판 속의 여성들. 파헤쳐지는 강. 공장의 파업 농성장. 거리 유세에서 큰절을 올리는 보수 여당의 후보... 1년 동안 경북 구미에서 공장생활을 하면서 만난 여성들을 인터뷰한 이 영화를 두고 감독은 자신의 주관이 깊게 반영되었음을 강조했지만, 나는 오히려 어떤 텍스트이든 순수하게 객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촬영 대상이 무엇이고 누구인지, 엄청난 분량의 촬영 내용 중에서 무엇을 택하고 어떻게 구성하는지는 모두 감독의 몫이기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하여, 나는 하필이면 구미에서, 하필이면 젊은 여성노동자들을 촬영하여, 하필이면 이런 저런 장면을 모아 두 시간 가까이 되는 필름으로 완성한 이 영화를 또 다시 주관적인 나의 해석으로 읽는다.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마치고 혹은 학업 도중에 공장으로 간 여성들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학비를 벌기 위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엇보다 ‘나의 삶’을 위해 그녀들은 공장으로 갔다. 맞벌이 부부라는 이유로 퇴직 일 순위가 되고, 회사의 ‘경영난’이라는 핑계로 해고되고, 생산라인의 외주화 계획과 민주 노조 탄압에 떠밀려 공장에서 쫓겨나는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작업환경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목숨을 내어 놓고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 사람이 죽어 나가도 끄떡하지 않는 기업과 정부. 이미 우리가 97년 외환위기 때부터 봐온 현실이고 이 현실은 쌍용차, 콜트콜텍, 구미 KEC, 유성기업, 삼성반도체 등 여러 사업장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고용의 불안정 바람은 지역과 사업장의 구분 없이 몰아친다.
하지만 그 바람은 ‘여성노동자’에게 보다 혹독하다. 고용의 불안정에 따라 생산 현장에 대한 자본의 통제 역시 증가하고 전자산업의 생산라인은 통제가 쉬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채워진다. 미조직된 노동자들. 그렇기에 대공장의 남성 노동자들과는 다른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 관리자에 의한 통제방식에서 성적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노동자들. 그들이 여성노동자이다. ‘노조’는 애초부터 없던 거고, 부당하게 임금체불이나 해고를 당하게 되면 싸워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에 먼저 빠지며, 조장 같은 놈들이 성희롱을 해도 고용승계를 위해 꾹 참아야만 하는, 그래서 자본의 입장에서는 ‘다루기 쉬운’ 젊은 여성노동자들 말이다.
우리가 배운, 국가와 자본이 그렇게 선전해 대던 ‘전자도시 구미’는 관리자들의 닦달 속에서, 물량에 따라 잔업 특근과 무기한 휴직을 반복하면서 불안정한 일자리에 자신의 삶을 맡긴 여성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진정 전자도시 구미를 상징하는 것은 어떤 ‘훌륭한 기업’이 달성한 수출액과 순익의 크기가 아니라, 바로 이 여성노동자들이어야 함을 이 영화는 보여주는 듯하다.
PROPAGANDA, 연대의 선전
지금 시청 앞 희망광장에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싸우는 각지의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다. 그곳에 구미 KEC 노동자들도 함께 하고 있다. 2009년부터 경영 적자 운운하면서 노조와의 교섭을 파행으로 몰고 직장폐쇄를 단행하여 금속노조 조합원들을 해고한 KEC. 근속연수가 10년 안팎인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나서서 “당신들은 고임금자”라고 끊임없이 강조했다는 사실은, 전해 듣는 나로서도 민망함과 위협을 느끼게 한다. ‘고임금’ 챙겨줘서 감사하다 해야 할지, ‘고임금자’인 것이 송구스러워서라도 얼른 이 회사를 떠나야 할지... 역시나 회사는 계획적으로 파업을 유도하고 그에 대비하여 미리 물량을 맞춰놓고는 ‘정규직 0%’의 공장을 만들기 위한 수순을 밟는다. 그들이 말하는 경영난과 적자 상황 속에서도 임원들의 보수는 40% 이상, 많게는 300% 이상 인상되었고, 회사는 100억 원의 임금 삭감이 불가피하다면서 3000억 원에 달하는 부동산 개발을 계획하고 있다.
감독이 카메라에 담은 구미의 풍경에는 KEC 노동자들의 농성 현장이 있다. 민주노조 탄압과 생산라인의 외주화(비정규직화)에 맞선 투쟁. 지역 최대의 현안일 수밖에 없고, 갈수록 심각해지는 고용의 불안정화와 민주노조 탄압이라는 전국적인 연쇄 흐름을 끊어내야 하는 곳이 KEC이다.
쟁의 현장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건장한 용역들. 다 같이 검은 옷을 입고 같은 곳에 서서 이제는 구별조차 되지 않는 용역과 전경(경찰)이 우리를(카메라를)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권과 자본은 늘 그렇듯이 한 패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다. 이 세상은 이래저래 건장한 남성은 자본을 비호하는 데에, 여성은 값싼 소모품 쓰듯 이윤을 창출하는 데에 동원하는 그런 세상이다.
묘하게도, 파헤쳐지는 강과 지역 후보들의 선거유세 같은 ‘뜬금없는’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현실의 대의민주주의가 얼마나 우리를 기만하고 무시하는지, 저들이 떠드는 ‘민생’, ‘지역의 이익’과 우리 삶의 간극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포착하게 된다. 때마침 총대선을 앞두고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서민의 정당’을 자임하고 ‘반MB로 헤쳐모인’ 야권연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인 양 선전하지만, 정작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싸움의 현장과 FTA 폐기를 위한 싸움의 광장은 썰렁하기만 한 지금의 모습처럼 말이다.
우리의 삶을 왜곡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만이 아니다. 열심히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통해서도 우리의 삶은 충분히 왜곡되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공장을 경험한 대학생은 생산현장의 비인간성에 고개를 내젓는다. 그녀에겐 사람을 기계처럼 부려 최대한 이윤을 짜내는 곳이 공장이다. 그녀는 다시는 공장에 가고 싶지가 않단다. 그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곳’에 취직하기를 원한단다. 그래서 영어공부와 전공 공부, 자격증 공부에 매진한다. 그런데 어쩌지...?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해도 현실에서 달라지는 것은 얼마 없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가 1년짜리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대학진학률이 80%에 이르고, 수많은 대학생과 그들의 부모가 한 학기에 기백만 원 되는 등록금을 학교에 갖다 바쳐도 그들에겐 사실상 미래가 없다.
‘고액 연봉자’가 되는 것도 요즘 유행하는 말로 “어렵지 않아요~”다. 잔업에 특근까지 ‘빡세게’ 일하면 몇 백만 원 되는 월급을 받을 수 있다. 단, “숨만 쉬고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아프고 병들어도 안 된다. 이후에 들어가는 병원비로 월급의 절반이 날아갈지도 모르니까. 결국 안정적인 기본급과 안정적인 고용형태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고임금자’는, 임금을 희생해서 이윤을 창출하겠다는 악랄한 자본이 더욱 쉽게 싼값에 노동자를 쓰고 버리겠다는 하청, 불법파견, 특수고용, 계약직 등의 온갖 비정규직 옹호 선전에 불과하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아니 자본과 노동이 국경을 넘나드는 이 글로발한 시대, 전 세계적인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정세 속에서 우리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다시 말하면, 지금 투쟁하고 있는 사업장들의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해결 의지, 그리고 연대가 없다면 종국에는 나의 안전마저 보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2012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상영된 이 영화를 보러 왔던 (나를 포함한)많은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학생이거나 노동자(어떤 직종이든 어떤 형태이든)이거나 무직자 혹은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시간만큼은 모두가 ‘관객’이라는 소비자가 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느끼는지는 제각각일 것이고 그 누구도 동일한 입장에 놓여있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달하는 내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분명 무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작게나마 연대감을 갖는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연대라는 말에는 입장의 차이가 전제되어 있다. 각자가 서 있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그 특수한 자기의 위치에서 자신의 의제를 갖고 싸울 때, 그리고 옆에 있는 이의 싸움에 서로가 적극 지지하고 힘을 보태줄 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앞당길 수 있는 게 아닐까.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감히 꿈이 있다는 생각 ; 말하기와 권력
다시 이 영화의 장면에 집중하자면, 내겐 무엇보다 영화가 끝나기 몇 분 전의 한 토막 영상이 가장 인상 깊게 남는다. ―젊은 여성들이 하얀 작업복을 입는다. 머리부터 다리까지 온통 하얀 작업복. 그리고 하얀 모자, 하얀 마스크, 하얀 장갑. 문이 열리고 하얀 작업복의 여성노동자들이 작업실로 들어가 일을 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세상! ; IT강국, 반도체 강국을 이야기하며 현란한 광고로 온갖 탐스러운 상품을 뽐내듯 보여주고 그것이 창출하는 경제규모를 떠들어대지만, 그 상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세상에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그렇게 해서 ‘공순이’ 혹은 ‘여성노동자’의 존재는 은폐되어 왔다. 이 땅의 노동자들이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 그 존재가 ‘들춰지는’ 것은 그들이 단체행동을 할 때뿐이다. 정권과 자본이 합세하여 제도 언론을 수단으로 한 말하기 권력은 정당한 권리를 찾겠다는 노동자들을 몰염치하고 과격한 사람들로 닦아 세운다. 그나마 이런 조직적인 힘마저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학력이 높지 않다는 이유로 불안정한 노동시장에서 겪는 부당함에서도 체념을 먼저 배우도록 강요받는다.
홍효은 감독이 카메라에 담은 건 이런 여성노동자들이다. 공장이라는 작업 현장에서 겪은 일과 그 과정에서 느낀 내용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이들의 말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하찮아서 어떤 주류 영화에서도, 어떤 판타스틱한 TV드라마나 대중가요 속에서도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들의 존재를, 아니, 사실은 우리의 존재를 망각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세상의 모든 물건은 누군가, 어떤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공장을 만든 건 자본일지 모르지만, 공장 안의 라인을 타는 건 ‘사장님’도 ‘이사님’도 아니고 노동자라는 것을 말이다.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 자신의 소설에서 이 말을 쓴 밀란 쿤데라를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이 말만큼은 나의 언어로 전용하는데, 내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유는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상품 시장 속에서 그 이면에 가려진 노동자의 존재와 오늘의 현실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급적 일상과 투쟁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의지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분명 단순히 어떤 사실을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늘 망각하지 말자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이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의 의도는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효은 감독이 전하는 15명의 이야기는 기록과 전달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이들의 인터뷰 내용은 몇몇 여성들의 그저 사소하고 개인적이며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될 수 없다. 누가 ‘주관’과 ‘객관’을 이야기하는가? 누가 ‘다수’와 ‘대표성’, ‘표본’ 따위를 운운하는가? ‘객관’은 힘 있는 자들의 ‘주관’일 뿐이다.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은 말하기 권력을 독점하고 그들 스스로가 ‘다수’이자 ‘대표’를 자임해 왔다. 하지만 정녕 기업의 총수가,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우리를 대표하는 이들이었던가? 구미지역의 정규직 노동자를 찾아내면 그 사람이 구미지역 노동자의 표본이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여기 나온 이 여성들의 모습이 곧 전자산업의 첨단을 달린다는 구미지역의, 나아가 한국의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하찮기만 한 것 같은 그녀들의 이야기가 21세기 한국 노동의 현실이고 역사가 될 것이다. 때문에 그녀들의 목소리를 끄집어내어 그 서사에 힘을 부여한 이 영화는 이미 기록을 시작한 자체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 영화는 요란 맞지 않다. 어쩌면 나의 과도한(?) 해석이 호들갑으로 비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여기서 내가 한 모든 이야기는 직접 간접적으로 이 영화 <아무도 꾸지 않은 꿈>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록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영상매체로 소비하겠지만, 솔직하고 편안하게 일상을 폭로하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허위로 가득 찬 그 어떤 텍스트보다 현실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그리고 그녀들의 꿈이 우리의 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진정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