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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받지 못한 정규직 ‘사원증’

[현장편지] 현대차 불법파견에 맞선 비정규직의 안타까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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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3월 30일) 아침 현대차 울산공장의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트위터를 통해 보았습니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의 홈페이지에 1공장 김상윤 조합원이 오전 7시30분 경 암투병 끝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비정규직의 삶... 그리고 병마와의 사투... 끝내 정규직화의 꿈도 못 이룬 채 젊은 나이에 운명하시다니 너무 슬픕니다... 고인의 꿈 저희가 꼭 이루겠습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서 편히 잠드소서!!!”

그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울산에 전화를 걸어 그의 소식을 물었습니다. 여러 조합원들에게 그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상윤 조합원(44). 그는 10년 전인 2002년 8월 현대차 울산공장에 입사해 엑센트, 베르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동차의 핸들을 장착하는 일을 했습니다. 여느 사내하청 노동자들처럼 정규직과 함께 일했습니다.

2004년 현대차 울산공장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12월 노동부에서 121개 업체 1만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을 내리면서 그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싸움에 함께 했습니다.

  2010년 12월,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가 울산공장 점거투쟁을 진행했다.

노동조합을 버리지 않은 8년

2005~6년 노동조합의 파업이 실패하고, 많은 노조 간부들이 공장에서 쫓겨나면서 동료들이 하나 둘 노조를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관리자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지켰습니다.

현대차는 매년 수 조원의 순이익을 남기며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로 성장했지만 그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잔업과 특근을 해서 받는 200만원 남짓한 돈으로 장애로 인해 시설에서 생활하는 첫째 아이의 병원비와 둘째 아이의 교육비 등 다섯 가족의 생활비를 대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노사가 맺은 단체협약에 따라 병원비가 매년 2천만원까지 지급되는 정규직과는 달리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단 한 푼의 병원비도 지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현대차 비정규직의 투쟁이 잊혀져가고, 정규직화에 대한 희망이 흐릿해지고, 생계의 어려움이 가중됐지만 그는 끝까지 노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2010년 7월 22일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불법파견이므로 정규직으로 간주된다는 대법원 판결 이후 1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하고, 11월 15일부터 울산1공장 CTS(도어탈착공정) 점거파업이 시작됐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파업에 참여했고, 1공장 농성장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11월 16일 그는 심각한 생계 문제로 인해 집안에 큰 우환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농성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법원 판결에 흥분하고 있을 때 받은 사형 선고

25일 간의 공장점거 파업이 끝나고, 비정규직노조는 교섭 결렬, 조합비 유용과 횡령, 선거 무산 등으로 깊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점거파업에 대한 현대차의 보복은 잔인했습니다. 3개 공장에서 100명이 넘게 해고되고 1천명이 징계를 받았습니다. 회사는 평소 노조활동에 앞장섰던 그에게도 감봉 3개월을 때렸습니다.

현장은 패배감과 좌절감에 휩싸였습니다. 대법원의 판결조차도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법보다 가까운 해고와 탄압, 가족의 생계 앞에서 젊은 동생들조차 노조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해고자들의 출근 선전전, 수요 집회는 초라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노동조합을 지켰습니다. 치아가 고르지 못해 발음이 정확하지 못하지만 그는 현장위원이라는 직책을 맡아 최선을 다해 노조활동을 했습니다.

다시 1년의 세월이 흘렀고, 지난 2월 23일 대법원에서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현장은 다시 흥분으로 들떴고, 고요하던 공장은 북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는 병원에서 급성 간암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의 치료비를 모으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고, 지난 주 현대차 정규직노조에 모금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달 만에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현대차가 대법원 판결에 따라 노사교섭에 나섰더라면

현대차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사간에 교섭을 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그가 1년 만 더 살아있었다면 어쩌면 ‘출입증’을 반납하고 꿈에 그리던 정규직 ‘사원증’을 받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의 첫 번째 판결이 났을 때 현대차가 사내하청 문제를 해결했다면 어쩌면 그는 먼 곳으로 떠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2010년 11월 15일부터 시작된 비정규직 점거파업에 정규직노조가 연대해 싸웠다면 그의 가는 길이 조금은 덜 외로웠을지 모릅니다.

올해 456억의 주식 현금배당을 받은 정몽구 회장, 222억을 챙긴 그의 아들 정의선 부회장, 너도나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국회의원 후보들은 그의 죽음조차 알지 못하겠지요.

현대자동차에 젊음을 바친 한 사내하청 노동자가 비정규직 차별이 없는 곳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인 출입증은 세상에 외로이 남겨진 그의 가족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무게일 것입니다. 작은 힘이나마 함께 했으면 합니다.

[후원계좌] 농협 35604-00-361083 김상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