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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청춘이 김순자 지부장님에게

[칼럼] 다른 사람 아닌 내 이야기 해주는 정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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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간 건강하셨나요. 저를 기억하시기도 어려울 정도로 예전 일이 되었을지 모르겠단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막농성 때, 매일 같이 천막에 놀러 가서 개사한 ‘노조는 아무나 하나’를 들었던 기억, 박노자 씨가 농성장 방문을 한 날에도 옆에서 구경을 했던 기억, 스승의 날 때 카네이션을 들고 찾아뵈었던 기억, 투쟁 승리 뒤에도 이랜드 투쟁 집회 때마다 함께했던 기억, 모습과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날엔 함께 서울을 올라갔던 기억 등 지부장님과는 수많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한 기억이 저에게는 아직도 선합니다.

[출처: 울산노동뉴스]

저는 그 때는 지역에서 나름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며 만날 깨지다 군대를 갔다 온 뒤론 많은 상처와 패배의식에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젠 지쳐 참여하고 있는 조직도 없고, 진보정당도 탈당하고, 집회도 안가고, 이젠 쪼들리는 자금 사정에 가끔 후원금이나 넣으며 대학교에서 이론만 공부하는 비겁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지부장님이 박노자 씨와 함께 출마를 했단 소식을 듣고 뭔가 흥분을 감출 수 없었고, 단순히 후원금을 넣는 것 말고 제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 발로는 도움이 될 수 없었기에 도움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이야기라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늘어놓아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 이젠 더 이상 활동가도 아닌 저에게 발언할 자격을 운운한다면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현대광역시인 울산에 살면서 혹 이력에 남을 만한 ‘찍힐 짓’을 남기지 말라고 언제나 닦달하며 주의를 주지만 저 같은 인간도 말을 해야 정치라는 용기를 가지고 키보드를 조심스레 두들겨 봅니다.

사실 저는 제 가정사 같은 것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유쾌하진 않습니다. 재미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조금은 저의 이야기를 고백하며 ‘이게 사는 건가’하는 하소연을 하고 싶기도 하고, MB심판이니 야권단일화니 하는 구호만 난무하는, 나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들로만 가득찬 절망적인 현실의 진보정치를 보며 뭐라도 한마디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87과 97

저는 다 그렇듯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현대자동차에 다니셨고 저는 그런 가정에서 딱히 큰 부족함은 느끼지 못하는 중산층에 가까운 가정에서 살아왔습니다. 적어도 IMF 이전까지는 외식도 자주 가고, 용돈도 부족하진 않았고, 백화점도 자주 갔습니다. 하지만 제가 초등학생 때 IMF라는 것이 찾아왔고, 그때 상대적으로 노조의 보호에서 약한 사무직이셨던 아버지는 ‘정리해고’라는 폭풍에 많은 공포심을 느꼈었고 결국 몇몇 동료들과 함께 ‘희망퇴직’을 택하셨고, 20년간 일했던 직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아버지가 일이년 동안 실업자가 되어 매일 같이 집에서 TV 시청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아버지는 가장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느꼈을 테고, 나처럼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저에게 매일 같이 공부하라는 잔소리만 하셨습니다. 그 시기부터 저는 아버지는 피해야 할 상대였고, 아버지와는 대화를 기피하게 되고 그 전에 자주 가던 외식도, 여행도, 백화점도 안 가고, 용돈도 없어지면서 전처럼 대화할 시간은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정환경과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시간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퇴직한 사람들 빼고 정리해고당한 ‘남성’동료들은 거의 없었다며 퇴직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후회를 하시지만 그 대신 잘려나간 사람들이 ‘여성’이었고 청소노동자였고, 배식노동자들이었고, 이젠 정규직노조에서 늘 부결되는 1사 1조직을 생각하면서 원망했던 아버지였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저런 정규직이 되지 않은 것에 다행이라고 저 혼자라도 위로를 하곤 합니다. 87 노동자대투쟁의 주역이기도 했던 부모님에게 가끔 그때의 기억을 이야기해달라고 조르면 '마, 모른다!' 하며 애써 대답을 피합니다. 어쩌면 87은 부모님에겐 97년 거대한 신자유주의의 희생자가 되면서 결국 패배한 경험이기 때문일까요.

노동자정당과 지역정치인 조승수

그렇게 가정이 무너져가는 그런 힘든 시기에 부모님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조승수 의원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자신이 직장을 반강제적으로 그만 두고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고, 당시 무작정 구청을 찾아가 당시 구청장이었던 조승수 의원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승수 의원은 청장실 문을 열어줬고 답답한 심정들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준 것이 얼마나 고마웠었는지 몰랐다고 늘 이야기하십니다.

그런 지역정치인에 대한 신뢰의 기억이, 노동운동에 관심도 없는 부모님이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노동자정당에 투표하게 됐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 후 그런 희망과 열망들이 모여 민주노동당은 10석이나 얻으며 원내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다들 의회로 가고, 사무실이 생기더니 똑같이 폼만 재면서 힘이 부족했다고, 표를 더 달라는 핑계만 댄다고 욕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조위원장이 되더니 자기 조카를 회사에 꽂아주는 게 가장 먼저 했던 일이었다며, 그런 사람들이 국회의원 되더니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제 부모님에게 진보정당은 찍고 싶어서 찍는 곳이 아니라 비판적 지지처럼 대안이 없어 억지로 찍는 곳이라고 얘기합니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집권과 민주노동당의 비약적인 성장에도 살림살이는 더욱 힘들어졌고 아버지는 다시 직장을 다니게 됐지만 휴일 없이 일을 나가도 예전에 다니던 대기업 노동자 시절 임금의 반이었고, 복지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저의 학비를 벌기 위해 청소노동, 배식노동을 해야 했고 지금은 골다공증만 얻어 약을 드십니다.

알바 청춘

그리고 저는 과거엔 활동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했었고, 요즘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방학이 되면 여느 또래들과 같이 다양한 알바를 해왔습니다.

언제는 주유소 알바를 하다 잔고가 부족하다며 40만원을 체불했고 같이 일하던 고등학생과 노동청에 신고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동청에서는 일단 사장과 만나서 면담을 해보라는 말이나 늘어놓았습니다. 결국 북구비정규직센터의 도움을 받아서야 두 달이 지나서 체불임금을 받으면서 자괴감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당연한 내 권리를 행사했지만 주유소 직원들에게 ‘선동자’라며 다른 알바생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공장알바는 일급제여서 임금을 체불당할 일은 없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어떻게 나눠져 있는지 알게 되고 그 폭력적인 구조를 내면화하는 일이 싫었습니다. 공장 내 청소노동도 모두 비정규직의 담당이었고, 기계가 고장 나지 않도록 구석구석 가득 찬 먼지와 기름을 닦아내는 일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여성들의 몫이었습니다. 얼굴이 까맣게 되어가지고는 휴식시간에 아줌마들은 ‘노조를 만들어 임금이라도 올리고 싶다’고 푸념하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비정규직의 현실을 경험한 대학생 또래와 공장에 현장실습을 나온 고등학생들 입에서는 ‘망할 놈의 하청’이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비정규직인데, 그렇게 자신을 부정하면서요.

지부장님, 이제 20 중반이 된 제가 느끼는 감정은 청춘의 희망과 설렘이 아닌 공포와 불안감입니다. 곧 아버지께선 퇴직을 하실 것 같아 불안하고, 어머니도 갑자기 아프시진 않을까 불안합니다. 그리고 나는 비정규직을 벗어나더라도 저임금 노동자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란 생각에 불안합니다. 하지만 책에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하고, CF에서는 ‘젊음은 알바다’라고 했던가요. 근데 몇 년만에 만난 학교 동창들은 대다수가 고시준비생, 간호사, 유치원 선생님, 미용사, 백화점 비정규직 사원 등이 되어 있었고 다들 불안정한 고용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그 말들이 저와 친구들에겐 그 말이 왜 그렇게 잔인하게 들릴까요.

세상을 바꿔주는 것이 아닌 바꿀 수 있도록 함께하는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형태”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힘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치인은 착하고, 위대하고, 영웅적인 존재가 아니란 생각을 합니다. 좋은 지도자를 넘어서 나의 절절한 호소와 투쟁에 확성기가 되어줄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길 포기할 것을 강요를 당하는 4천원 인생이 우리 삶의 도처에 마치 투명인간처럼 존재합니다. 편의점과 주유소에서 어리다고 임금체불과 성희롱, 폭언에도 견디며 일해야만 하는 청소년과 대학생 알바, 종일 서서 일하길 강요당하는 마트와 백화점의 노동자, 현장실습이란 명목으로 로봇이 되어야하는 실습생들, 정작 자신의 복지는 생각할 수도 없는 간병노동자, 그리고 장애를 이유로 노동에서조차 배제당하는 사람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얘기하며 노동자 서민 정치란 이름으로 금배지 나눠먹기 하는 정치에 짜증이 납니다. 어디 노조위원장이 하는 정치도 질렸고, 진보정당이란 곳에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쟁쟁한 청년들 모아놓고 청년 국회의원 뽑겠단 것을 보면 그놈의 경쟁을 진보정당에서도 해야 하는지 진절머리가 났고, 노동자를 이야기하면서 이젠 적당히 현실도 봐야 한다며, 타협하는 모습도 역겹게 느껴집니다.

지부장님, 분명 아직 당선된 것도 아니고, 당선이 되더라도 갈 길은 너무나 멀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기대되고 궁금했습니다. 저 사람이 국회에 가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말입니다. 정치인이라는 기존의 무거운 이미지를 깨고 지부장님의 전매특허인 위트 넘치던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선명함이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분명 지지해줄 거란 확신이 듭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신당이 원외정당이 되고, 정당지지율 부족으로 해체된다면 그것은 한국정치사에서 비극적인 일이 아닐까 합니다. 지부장님, 꼭 당선되시길 바라며 미약하지만 멀리서나마 지지하고 홍보하겠습니다. 남은 선거기간 무사히 마치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