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심리 치유하는 정혜신 박사. 2008년 공장에서 농성중인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경찰과 회사가 행한 행위는 방사능 피폭과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방사능에 쏘이면 디엔에이와 세포가 변형이 되듯,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가해진 폭력은 정신과 삶을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 정혜신 박사 |
정혜신은 물었다. “요즘 어떻게 사세요.” 노동자들은 말했다. 나는 노동조합 간부이고, 어떻게 싸우고 있다는 걸. 정혜신은 다시 물었다. “그런 이야기 말고 요즘 어떻게들 사시느냐고요.” 갑자기 노동자의 눈에서 굵고 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홀로 가슴에 품었던 응어리가 정혜신을 만나며 터져 나왔다. 와락을 찾은 이들은 결코 자신이 혼자가 아니고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걸 소통과 공감을 통해 깨우쳤다. 자신의 삶에 어느 날 순간적으로 찾아온 방사능 피폭에서 차츰 차츰 새 살갗이 돋아나고 있다. 상처 입은 가지에도 새순이 움트듯.
“쌍용자동차 공장 안에서 77일간 싸우는 동안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기고, 너무나 날카롭고 극단적인 일이 벌어졌어요. 밤에 자지 못하게 계속 방패를 두들겨 공포를 일으키고,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었죠. 노동자들이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거죠. 하지만 국가 공권력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고 가공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죠. 이 힘이 와장창 깨놓고 싹 빠지면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되냐면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데 피해자만 남아 있는 상황인 거예요.”
공장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는 자신에게 공권력이라는 가해자 대신에 자신과 가족과 동료들을 미워하게 된다. 차츰 주변과 관계가 끊어지고 끝내는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유독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희생자가 많은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바로 국가 공권력이 훑고 지나간 살인적인 진압. 이 경험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한 채 싸워야 했던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경험이라고 정혜신은 말한다.
말기 암 환자보다 에이즈 환자의 자살이 높단다. 에이즈 환자에게는 “관계의 소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관계의 소멸은 “사람에게 죽음과 같다”고 한다.
“관계가 끊기면 사는 게 아니라 죽음인 거니까. 왕따 당하면 사람이 죽잖아요. 고문당해서 목숨을 끊는 사람보다 왕따를 시키면 그 사람이 목숨을 끊을 확률이 더 높아요. 나는 이렇게 처절히 고통스러운데 세상은 내 고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완전히 끈이 끊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렇게 되는 거죠.”
해고는 단순히 일터에서 쫓겨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해고를 겪는 순간 사회관계는 물론 인간관계마저 끊긴다. 지금 서울광장에는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이 죽음이 아닌 삶을 위하여 찬바람에도 비닐 덮인 천막에서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다. 나비가 되어 푸른 하늘을 훨훨 날 그날을 준비하는 누에고치처럼.
정혜신은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만나면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임금투쟁 할 때나 집회를 보면 좀 딱딱하고 고지식하고 투쟁 일변도”라는 느낌을 갖았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노동자의) 최소한의 목소리를 내줄 수 있는 게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의 집회 현장이라고 생각해요. 그 싸움이 있기에 죽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고 보는 거죠. 이 집회가 없었으면 스물한 명이 아니라 더 죽었을 수도 있죠. 그 방식이 딱딱하네, 투쟁일변도네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죠.”
자신의 속마음을 무장해제 하고 내비치고 싶은 상대, 정혜신. 그의 자그맣지만 야무진 입술이 움직이면 가슴속 응어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분노를 공감해주는 눈은 너무도 그윽해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절망의 시절을 버티는 이들에게 건네는 정혜신의 공감의 눈빛이 어두운 광장에 희망의 꽃을 피우고 있다.
정혜신은 ‘희망광장’에 시민들의 눈길이 잠시라도 머물기를 바란다.
“우리가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걸 시민들한테 알려주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