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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메기 세상을 위하여

[칼럼] 백기완 선생 팔순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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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병원에서 퇴원하고는 백기완 선생님께 인사를 갔다. 진즉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늦었다. 마침 노나메기학술문화재단(추) 회의가 있어 겸사겸사 인사를 드렸다. 꼭 이맘때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를 들잠자리마냥 자주 들랑거렸다. 선생님이라는 큰 그늘이 있어서인지 그곳에만 가면 천둥벌거숭이처럼 버릇없어도 좋았다. 삼장법사의 손바닥 안에서 온갖 꼼수와 재주를 부리는 손오공처럼 철없어도 좋았다. 내가 다시 선생님으로 부르는 분들도 모두들 아직도 활화산 같은 선생님 앞에만 서면 쩔쩔매는 청년이었고 소년이었다. 그 모습이 재밌어 나는 어떻게 하면 악동처럼 굴 수 있을까 매번 장난끼가 동하는 어린아이였다. 그럴 때면 늘 어릴적 놀던 큰 산이 생각났다. 아무리 짓까불고 놀아도 말없던 큰 산, 그 등성이에 오르면 따뜻했고, 계곡에 들면 한없이 선선했던 그 산. 아무리 첨벙거려도 그 기슭의 파도 하나만도 간지럽히지 못할 바다. 그런 세월이 그늘져 있는 통일문제연구소가 좋았다.

‘희망의 버스’도 그 마당에서 힘을 얻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검찰의 기소 내용대로 하자면 ‘희망의 버스’의 첫 사전 모의 및 현장 답사였던 파견미술팀들의 출정식(?)도 선생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했다. 작년 4월 85호 크레인 농성 100일째를 맞아 연대 문화행동을 위해 파견미술팀과 함께 거제도 대우조선비정규직 강병재 씨의 송전탑 농성 현장과, 부산 한진중공업 김진숙 동지의 크레인 농성 현장으로 떠나던 곳이 선생님의 연구소였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문화예술인들의 시대적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짧고 간명하게 말씀해 주셨고, ‘잘 다녀오라고’ 마음 하나 들고 먼 길 떠나는 우리에게 힘을 주셨다.

구체적으로 ‘희망의 버스’라는 것을 제안하려 할 때, 약간은 막막했다. 누군가 먼저 제안해주는 단위가 있어야 하는데 마땅하지 않았다. 불경스럽게도 선생님을 다시 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과 노나메기학술문화재단(추)의 김세균 선생, 오세철 선생, 이수호 선생, 그리고 양규헌, 이종회, 양기환, 이은, 한석호 선배 등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추진해 보라고 허락해 주었다. 그렇게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사회운동 네트워크 등 세 단위가 말하자면 희망의 버스의 공개적인 제안 단위가 되어 주셨다. 박래군 선배는 통장을 빌려준 죄로 지금까지 함께 재판을 받는 중이고, 백기완 선생님과 함께 희망의 버스의 든든한 어른이 되어주셨던 문정현 신부님은 오늘도 강정을 지키고 계신다.


1차 희망의 버스 당시 저 강고한 자본의 담장을, 공권력의 무자비한 벽을 맨 먼저 훌쩍 넘어준 것도 어른들이셨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다리가 넘어 왔을 때 맨 먼저 그 담을 넘는 노구의 어른들을 보며 모두의 가슴에 눈물이 어렸고, 모두의 두 눈에 이 역사에 대한 분노의 빛이 서렸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님과 박창수 열사의 아버님도 그곳에 있었다.

용역깡패들을 몰아내고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 모두의 깃발이 되어 한진중공업 정문 옆 콘테이너 박스 위엘 올라가 주신 것도 선생님들이셨다. 모든 여는 자리의 발언은 백기완 선생님이, 닫으며 다시 약속하는 발언은 문정현 신부님이 맡아주셨다. 우리는 그 불퇴전의 그늘 아래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렇게 백기완 선생님은 희망의 버스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함께 달려주셨다. 잘 안 알려졌지만, 재능교육 특수고용비정규직 투쟁의 현장에서 출발하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의 버스’의 제1호차는 늘 백기완 선생님과 노나메기(추), 그리고 유가협과 추모연대의 선생님들의 자리였다. 수많은 희망의 승객들 틈에서 늘 어른들도 함께 뛰고, 함께 걸었다. 무대는 늘 평범한 노동자들과 날라리들의 것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어른들께서 가장 앞에서 담장을 넘었고, 물대포를 맞았고, 전경들과 몸싸움을 했다.

백기완 선생님께서는 몇 번이고 흔들리지 말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본인 역시 잡혀갈 일을 꾸며보라고 용기를 주셨다. 김진숙이 살아 내려오지 못하면 부산에 당신의 목숨 역시 함께 묻겠다고 하셨다.

주변 분들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팔순 노구의 어른을 모시면서도 어떤 준비도 없었다. 따로 격식을 차리지도 않았다. 차수가 늘어날 때마다 박정희, 전두환 때 이후 처음으로 19년만에 십수 장의 소환장을 받으시기도 했고, 새파란 어버이연합 사람들에게 우산대로 찔리는 등 거리에서 수모를 받기도 하셨다. 급기야 경찰서로 연행되시기까지 했다. 당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선생님은 우리 노동자민중운동의 상징이시기도 하다. 그런 어른께 이 막되먹은 정부가 함부로 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수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을 물리쳐주신 것도 선생님이셨다. “괜찮어, 진숙이 저 가스나를 살려야 하지 않갔어”가 선생님의 간절한 대답이었다.


화창한 초봄, 선생님을 모시고 어느 골목집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당뇨 때문에 운동을 해야 해서 연구소까지 한사코 걸어가시겠단다. 열 발자국 정도 걸으시다 멈추곤 한다. 봄 하늘을 보시는 겐가 하는데, ‘송경동이’ 하고 부르신다. 목발을 짚고 ‘예’하고 가 뵈니. 묵은 말씀을 한다.

“그때 말이야. 2차 때 봉래로타리에서 경찰들하고 맞붙었잖아. 뚫고 나가야 겠다고 전경들을 밀다가 내가 나가 떨어진 거야. 옛날 몸이라고 생각한 거지. 넘어지면서 콘크리트 턱에 부딪혀 전두환 때 맞아 부실한 이 고관절이 나간 거야. 그때부터 이렇게 걷기가 힘들어. 다 네놈 때문이야. 알간.”

쩔쩔. 식은 땀이 흐르는데 한번쯤은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가 보다. ‘동지여! 하루의 무용담을 말하세’라는 민중가요의 한자락 처럼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었다고 말씀 하시고 싶으셨던가 보다. 말씀하시면서도 그런데 하나도 안 아픈 얼굴이시다. 아, 오히려 이 봄볕보다 더 해맑은 소년의 얼굴이시다. 장난꾸러기 소년의 웃음이시다. 그 어마어마한 백구라의 신바람이 언뜻 비치시는 폼이시다.

그런 선생님이 팔순이시란다. 안하겠다는 것을 주변에서 우겨 잔치를 연단다. 그것이 못내 미안하신지, “거 왜, 시청 광장에 농성하고 있는 희망광장 노동자들하고 우리 비정규직 동지들 와서 밥이라도 한끼 하라고 해줘” 하신다. 그들이 우리 사회의 주인임을 잊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평생의 벗임을 잊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왕 벌어진 자리 선생님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모여 아직 못다 한 우리 모두의 해방의 노래를 생각해 보는 따뜻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18일 오후 다섯시부터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연다. 당신을 핑계로 한번쯤은 모두가 어울려 즐거운 날이었으면 좋겠다.

  • 광장

    민족해방, 노동자해방 , 삼민의 그날, 통일의 그날을 꼭보셔야합니다 . 재호와 세진이도 저승에서나마 감격할것입니다 선생의 건투를 기원합니다

  • 청솔

    백기완 선생님을 보니 가슴벅참니다. 항상 늘 푸른 소나무 같이 싱싱한 노동자 인것처럼 항상 우리곁에 있어주어서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