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99%를 위한 새로운 세기가 다가오고 있다

[기고] 3월 10일, 희망의 광장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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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에도 숱하게 올라봤다
도심의 cc카메라탑은 셀 수도 없다
한강 난간에 올라가도 봤고
매달려 있다 강물로 뛰어내려보기도 했다
크레인에도 올라봤고
포크레인 위에도 올라봤다
건물 옥상에도 올라봤고
지붕 위에도 올라봤다

손수 지어 오른 망루도 셀 수 없다
망루에서 불타 죽고도
1년 동안 장례도 못 지내고 냉동고에 갇혀보기도 했다
목 매단 이
뛰어내린 이
화염에 휩싸인 이
곤봉에 방패에 맞아 죽은 이
말할 수 없다

도대체
이 땅의 빈민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도대체
이 땅의 농민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도대체
이 땅의 1700만 노동자 가족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도대체
이 땅의 평범한 이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공장 문도 닫히고
은행 문도 닫히고
법원 문도 닫히고
국회 문도 닫히고
언론사 문도 닫히고
주인집 문도 닫히고
민주주의도 닫히니
모두의 미래가 닫히고
모두의 꿈이 닫혔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빼앗긴 자들이여
다시 민주주의의 거리를 열어라
쫓겨난 자들이여
저 너른 광장을 점거하라
생을 반납하지 말고
저들을 제압하라
좌절은 1%의 몫
보라. 99%를 위한 새로운 세기가
저기 다가오고 있다


[덧말]

‘희망의 버스’ 건으로 구속되어 3개월여를 차디찬 마루바닥의 0.9평 독방에서 지내다 얼마 전 보석으로 나왔다. 이것도 운명인지, 출소 인사를 해야 할 절친한 이들이 모두 영하 10도의 혹한에 ‘희망뚜벅이’들이 되어 서울에서 평택 쌍용자동차까지 걷기 행진을 하고 있었다. 가서 인사를 하는데도 모두 바빠 말 건네기도 계면쩍었다.

주변 걱정도 많아 바로 발 수술을 받으려 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소선 어머니 묘소 참배는 하고 들어오고 싶었다. 작년 10월 어머니의 소천 때 ‘이소선 어머니의 희망버스’를 부제안하고, 모시며 했던 약속이었다. 85호 크레인 위 사람들이 무사히 내려오고, 나와 정진우 씨도 수배가 풀리면 다함께 어머니 묘소로 찾아뵙고 좋아하시던 소주 한잔, 담배 한 개비 올리겠다는 약속이었다. 다시 내가 병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언제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터라, 급하게 일정을 맞춰 어머니 묘소를 다녀오곤 병원으로 들어왔다.


모란공원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제서야 우리는 편하게 몇 마디씩 그간 소회를 얘기하며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검찰은 우리를 공동공모정범이라 해서 무슨 일을 사전에 협의하고 공모한 이들이라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날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 가 있던 김진숙과 정홍영과 박성호 씨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서러운 눈물을 보아야 했다. 나도 벅차올라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2차 희망버스가 계획된 후 연일 85호 크레인에 대한 사측과 용역깡패들의 침탈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던가. 박성호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던 이야기. 만약에라도 진짜 강제 침탈이 벌어지면 여기에서 생을 버릴 수도 있다는 각오들을 했다는 얘기였다. 2009년 쌍용자동차 건물 지붕으로 쫓겨 올라갔다 내려온 이들이 아직도 <와락>에서 심리상담 치료를 받고 있듯, 당시의 아픔들이 아직도 모두 이 안전한 평지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음을 서럽게, 아프게 느껴야만 했다.

그렇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크레인 위에서 내려오지 못했고, 아직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다. 김진숙과 그의 동료들은 집행유예 등의 형벌을 받아야 했고, 나와 정진우 씨는 이 사회에 작은 희망의 씨앗 하나 심는 일에 함께 했다는 까닭으로, 아픈 이웃을 사랑하고 도우려 했다는 죄로 구속이 되어야 했다. 또 수많은 이들이 약식 기소되어 수백만원 씩의 벌금 폭탄과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기소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한진중공업 사측과 어용노조 집행부는 곧바로 지친 조합원들을 협박 회유해 복수노조를 만들었다. 1년 이내 복직이라는 약속을 어떻게라도 파기해보고 싶은 불손한 시도들이 현장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이기고, 무엇이 끝났다는 말인가.

재능교육 특수고용 비정규직들은 1500일을 결국 넘어야했고, 얼마전 콜트-콜텍의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은 5년만의 대법 판결에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 함은 반드시 기업의 도산을 회피하기 위한 경우에 한정되지 아니하고,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하여 인원 삭감이 객관적으로 보아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도 포함된다’는 지난 판례의 적용을 받기도 했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로만도 그간 수백만명의 정리해고가 가능했는데, 이젠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까지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한다. 그 사이 유성기업과 구미 KEC에서는 더 많은 이들이 잘려 나갔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이 시대 모든 평범한 이들의 공통 운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3월 10일 토요일 시청광장에 다시 모여 이번에는 ‘희망의 광장’을 열어보자고 했다 한다. 우리의 연대로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를 막아냈던 소중한 승리의 경험을 살려, 이제는 한 공장의 울타리 안에서가 아니라, 이 사회라는 울타리 전체에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라는 우리 시대 최악의 악성종양을 도려내는 간절한 ‘희망’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개별 사업장 단위를 넘어 사회적으로 연대해 보자는 것이다. 마침 희망의 버스 이후 2012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정치적 공간을 맞아 모든 정치권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법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또 다시 사탕발림의 빈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것을 이루려면 작년 희망버스 때보다 더 많은 이들이 모여 광장에서 민중의 법을 먼저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총대선이 어떤 당의, 어떤 인물들의 당선과 집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요구와 의제를 분명히 하고, 한국 사회의 질적 변환을 꾀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들이다. 그래서 다시는 우리 모두가 여야를 불문하고 구시대적인 정치인들의 권력 놀음의 거수기나 주변이 되지 말고, 우리 모두가 이 막중한 정치의 시기에 분명한 주인 행세를 해보자는 것이다.

이제 수술을 마치고 거동이 아직 불편해 나는 나가지 못하지만, 이 광장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날 전국에서 모이는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다시 김진숙처럼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군요’라는 감격의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진짜 많은 이들이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무슨 보살행을 바라는 것도, 무슨 동정이나 연민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 나온 콜트-콜텍과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법 판결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싸움은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평범하고 가난한 90%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회적 투쟁들이다. 이 싸움을 이제 더 이상 소수의 노동자들이 외롭게, 신경쇠약에 걸려가며, 가정이 파탄나며, 관계들이 모두 어긋나며 과도하게 짊어지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가슴 아픈 일들이지만, 보석으로 출소 이후, 몇몇 기자들과 사람들로부터 쌍차 희망텐트와 재능교육 특수고용직 1500일 투쟁, 인천 부평공장의 콜트-콜텍 농성 등을 얘기하며 ‘그곳엔 크레인이 없지 않느냐?’, ‘그곳엔 96일을 굶던 김소연이, 김진숙이 없지 않느냐?’ 거기다 어떤 때는 눈앞이 아득하게도, ‘송경동이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아니 그곳에 있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김진숙이며, 김소연인 것이 보이지 않냐고, 느껴지지 않냐고 울고 싶었다.

그런 전형적 상황이, 그런 야만적인 상황이, 그런 가슴 아픈 사연들이 다시 와야만 또 한번 잠깐 움직일만큼 사람들이 나약하게 보이느냐고, 바보스럽게 보이느냐고, 영악하게 보이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다시 또 한 명의 김소연이, 유명자가 굶으러 들어가고, 또 한 명의 김진숙이 죽음의 계단 한 칸씩을 오르고, 또 누군가 매달리려 내려가고, 또 누군가 내가 희생해서라도 라는 위험한 생각의 귀퉁이로 몰린다는 것을 잊었냐고 묻고 싶었다. 다시는 그 누구도 혼자 죽음을 결심하지 않아도 되게 이 평지에서, 이 거리에서, 이 광장에서 먼저 연대하면 좋지 않으냐고 묻고 싶었다.

물론 꿈꿔지는 모든 것은 실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상되어진다. 하지만, 그 꿈이 모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제반의 조건들이 맞아야 하는 한계가 있음을 안다. 삶은, 사회는 그런 것이라고 뻗쳐오르던 기대를 접는 때가 더 많기도 하다. 또 어떤 한 사람이 계획되어있지 않았던 한 손만을 내밀 때도 얼마나 많은 고민과 결의가 필요한지도 어렴풋이 알기에 함부로 사람들에게 원칙주의적으로, 교조적으로 어떤 행동을 요구할 수도 없다. 그건 오히려 선의로 치장된 폭력이 되기가 일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꿈꿔본다. 그런 광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이들이 많을 거라고. 모두가 그런 열린 광장의 시대를 다시 꿈꾸고 있을 것이라고, 법도 국회도 은행도 공장도 주택도 사랑도 우정도 그 어떤 것도 모두 닫혀 있는 이 시대의 척박한 공기 속에서 곧 질식할 것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광장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법과 윤리를 새롭게 주체적으로 제정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희망버스의 법정에서 나는 거의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내가 다 한 것으로 하고 더 이상 피해자들을 만들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큰 오만일 수 있었다. 희망의 버스는 실제 누가 주고 누가 부이고, 누군가 지시를 내리는 소수의 갑이 있고, 이에 무작정 따르는 을이 있었던 수동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참여한 모든 이들이 그 현장의 주인이었으며, 기획자였고, 주동자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도 희망의 버스 운동이 모두 설명되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영광임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희망버스 승객 한 사람에 불과했음을 확인하고, 전근대적인 검찰의 기소 내용을 모두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정당한 나의 주장대로 희망의 버스 승객들은 나와 보니 그간에도 많은 변화와 변이를 거듭하고 있다. 쌍용의 ‘희망텐트촌’으로, 연대와 ‘희망의 뚜벅이’들로, 강원도와 김해로 향하는 ‘생명의 버스’로, 강정으로 향하는 ‘희망의 비행기’로 수없이 진화해가는 희망의 씨앗들이, 산소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런 새로운 ‘기획자’들이, ‘주동자’들이 이 광장에 함께 해주기를 꿈꿔 본다. 그들의 연대로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희망의 광장’이 풍성해지기를, ‘웃으며 끝까지 즐겁게, 투쟁’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빨리 나아 나도 그 문화의 광장에, 기쁨의 광장에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11년 6월 11일, 1차 희망의 버스 당시 비가 내리는 85호 크레인 아래에서 어울려 밤새 노래하고 춤추던 그 날처럼 눈물겨우면서도, 아름다운 광장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재작년 기륭 투쟁 과정에서 이 병원에 들어와 웅크리고 누워 겨울을 보내고 있을 때 김진숙 씨가 85호 크레인 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가슴이 무너졌었다. 그래도 올해는 다행이다. 그가 잘 내려와 이번 희망의 광장 때는 팔순을 맞은 백기완 선생과 토크쇼도 연다고 한다. 허클베리핀, 와이낫, 무키무키만만수, 윈디시티 등 밴드들이 함께하는 희망 콘서트의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다시 새 봄이 오고 있고, 이 봄은 이제 더 이상 눈물만 흘리고 있는 봄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쭈뼛쭈뼛 새순들 마냥 솟는다. 이런 생동하는 기분이, 기운들이 너무 좋다.


* 추신 : 부산구치소 시절 지켜주고 찾아봐 주셨던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러분들의 간절함이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열심히, 잘 사는 일로 갚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더불어 희망의 버스 당시 정말 많은 분들이 각양각색으로, 적재적소에서 수많은 일들과, 아름다운 마음들을 내어주신 것으로 압니다. 그분들의 수고가 잊혀지지 않고 기억될 수 있도록 찬찬히 제가 아는 일들을 이 역사 속에 기록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