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에 촛불 집회를 반대하고, 4대강 파괴, 한미 FTA를 지지해온 보수 기독교 단체인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세력은 해군기지 건설에 긍정적이다.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서경석 목사는 급기야 가톨릭 교회와 맞짱 뜨겠다고 하면서 오는 3월 8일에 개최되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촉구 집회'에 개신교도들이 참여할 것을 공공연하게 촉구하였다. 좌파와 우파의 기싸움에서 우파들이 밀리고 있어 기지 건설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 세 대결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 기독교와 기독교의 대립이 이제 좌우 대립으로 발전하고 있다. 같은 성서를 읽고 어찌 이렇게 매사에 반대의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 서경석 목사는 제주 강정에서 보수 개신교인 2천명이 모이는 집회를 열어 문정현 신부 등 가톨릭교회의 해군기지 반대세력과 맞짱을 뜨자고 선전포고하고, 해군기지 건설 반대 국회의원 낙선운동을 벌이자고 호소했다 |
인간을 자연에 대해 우월한 존재로 보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대하는 관점은 창세기에서부터 볼 수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난 후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1:28)”고 축복한 것이다.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을 때마다 수시로 인용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창세기의 천지창조에 대한 부분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2장 15절에서는 자연을 정복하라는 위압적인 표현이 아니라 “에덴 동산을 돌보게 하였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1장에서 일주일 만에 천지가 창조되고 사람들을 지었는데, 2장에서 다시 천지가 만들어지고 아담을 만드는 것이 반복된다. 창세기에는 신이 스스로를 우리들이라고 복수로 이야기하고 있어(1:26, 3:22)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구분시켜준다고 하는 유일신 신앙하고도 맞지 않는 구절이 나온다. 이러한 이유로 신자들의 신앙이 시험에 든다하여 창세기를 공부하지 못하게 한 엉터리 같은 목회자도 있다고 한다.
앞뒤가 일관되지 않고 서로 충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성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여러 가지 다른 판본이 섞여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점은 교회에서 거의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역사학과 고고학의 연구 성과들을 담아 새롭게 편찬된 ‘신 예루살렘 성경(Neue Jerusalemer Bibel)’에 따르면 창세기의 1장에서 2장 4절의 첫 문장까지는 사제판(priesterscriftliche Überlieferung, P출처)이고 2장 4절의 뒷 문장에서 3장 24절까지는 야훼판(jahwistische Überlieferung, J출처)이라고 한다. [야훼판(J)은 솔로몬 시대까지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판으로서 신을 야훼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야훼판이라고 한다. 사제판(P)은 바벨론 유배 시절에 작성되기 시작하여 다시 돌아온 후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예루살렘의 사제들의 전승에 기초하여 주로 율법과 의식을 중심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천지창조가 두 번 등장하는 것이 하나의 판본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나뉘는 것도 아니고, 보통 성경에서 구분하듯이 천지창조와 에덴 동산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라, 서로 다른 판본이 짜깁기로 들어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2장 4절 뒷 문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오리지날이고, 그 앞 부분은 사제들이 추후에 삽입한 것이 된다.
더 오래된 야훼판과 후에 삽입된 사제판의 두 개의 판본을 대조하면서 원래의 창조 설화가 후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 보자.
1.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야훼판에서는 인간을 신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들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니 사람이 되었다고(2:7) 한다. 반면에 사제판에서는 신이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고 하면서 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냈다(1:27)고 쓰고 있다. 그러나 야훼판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자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에덴 동산에서 내쫓은 것으로 되어 있다.(3:22-23) 즉 만들 때부터 신의 형상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비로소 선악과를 따 먹자 신을 닮게 되었다는 것이며, 인간이 신을 닮아 가는 것은 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추방한 것이다. 아담은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였다.
2.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인용하였듯이 야훼판에서는 아담이 에덴 동산을 돌보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2:15) 반면에 사제판에서는 자연을 정복하고, 모든 짐승을 부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1:28) 독일어로는 2장 15절에서는 경작하다bebauen, 보살피다hüten라고 되어 있고, 1장 28절에서는 굴복시키다unterwerfen, 지배하다herrschen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 차이점이 보다 분명하다. 원래는 인간과 자연이 수평적이고 조화롭던 관계에서 후에 수직적이고 지배적인 관계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의 신과 인간 간의 관계와 함께 생각해 본다면, 처음과는 달리 인간은 보다 신과 닮은 존재로 격상되면서 자연의 위에 서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사제판에서는 신이 ‘빛이 생겨라’고 말을 하니 그대로 되었다고 쓰고 있으며, 이는 창공과 땅, 물고기, 식물, 동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이다. 말과 행동이 구분되고 있으며, 말이 먼저이다. 또 엿새 동안 창조하는 순서를 자세히 적고 이렛날에는 쉬었다고 쓰고 있다. 야훼판에서는 말과 행동의 구분, 엿새 동안의 창조와 일곱째 날의 안식은 서술되어 있지 않다.
후대에 와서 사제판이 앞 부분에 삽입된 이유, 그것도 절묘하게 2장 4절의 앞 문장과 뒷 문장을 연결시켜 하나의 글인 것처럼 붙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제판이 나올 시점에는 이미 왕과 사제를 한 축으로 한 지배자와 힘겹게 노동하면서도 착취 당해 고통속에서 살아 가는 피지배 민중들 사이의 대립이 심해졌다는 것을 본다면, 신의 권위를 빌려 지배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말씀Sprechen과 행함Tun을 구분하여 말씀을 앞세운다는 것은 피지배자들의 행함(노동, 실천)에 대해 지배자들의 말씀(개념, 이론)을 우위에 놓으려는 것이 아닐었을까? 그리하여 노동을 하는 보편적 인간인 아담은 말씀과 안식일을 담당하는 (신의 형상으로 빚어진) 사제들로 대체된 것이 아닐까? 보다 많은 부를 착취하여 쌓아 놓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지배-피지배 관계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보다 많은 수탈로 확장했어야 하지 않을까?
인류 역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 종교, 이데롤로기는 예외 없이 지배 이데올로기화하면서 반대물로 전화하여 지배 계급의 무기가 되어 왔고, 성서도 예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강정마을에서 충돌하고 있는 기독교와 기독교의 대립은 창세기부터 존재하는 오리지날 버전과 이후 삽입된 변형된 버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에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외치면서 일부 인간에 의한 인간과 자연의 착취와 파괴를 정당하게 생각하는 입장, 그 상징으로서 서 목사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모든 인간과 자연을 신의 동일한 창조물로 보고 인간과 자연 모두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 그 상징으로서 문 신부가 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 지구적으로 확대되어 모순이 한계점에 도달한 지금 시대에 이 두 입장 사이의 대립은 가장 보편적인 질문으로서 원초적인 창세기와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