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와 소위 ‘어용노조’의 차이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이다. 그리고 이 가치가 공격받을 때,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왔고, 이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던져 싸워왔다. 1998년 2월9일, ‘정리해고 도입 노사정 합의’를 다루기 위해 열린 대의원대회장에 입장하던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의 얼굴을 하얗게 질리게 만든 것도 ‘어용지도부 갈아엎자’는 구호였다. 아마도 민주노조 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로, ‘어용’ 소리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이 나올 때마다 떠오르는 풍경이 두 개 있다. 아니, 이제는 세 개가 됐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닐 게다. 이 풍경들은 아마도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누구나 한번 쯤 곱씹어볼 법한, 잊고 싶어도 잘 잊혀 지지 않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풍경1 : 투쟁성
“물리적 투쟁이 아닌 대타협이 필요한 시기라 판단했다.“ 1998년 2월9일 오후 3시, 성균관대 유림회관 대강당,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이 발언을 불러낸 ‘정리해고 도입 노사정 합의’는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됐지만, 한 번 합의를 이루며 탄력을 받은 정부와 자본은 민주노총 대대 부결 따위에 신경 쓸 일 없었다. ‘대타협이 필요하다’며 민주노조의 투쟁성을 내친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의 외침은 오늘날 쌍용자동차 노동자 21명의 죽음으로 메아리가 돼 돌아왔다.
결국 이날 대의원대회에서 지도부는 총사퇴를 밝혔다. 이 때 같이 사퇴한 부위원장 중 한 명이 바로 오늘 ‘통합진보당 배타적 지지 선거방침’을 주도하고 있는 이영희 민주노총 정치위원장이다.
풍경2 : 자주성
“절대 문제될 일 없다. 중앙일보가 어떤 언론인가. 삼성 자본이다. 우린 삼성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2005년 10월5일 오후 4시, 부산의료원 회의실, 민주노총 21차 중앙집행위원회,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중앙일보의 ‘민주노총 고위간부 금품수수 비리’ 기사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그 다음 날인 10월6일 긴급 체포됐고, 이틀이 지난 10월8일 구속 수감됐다. “절대 문제될 일 없다”던 강승규 수석의 약속은 결국 ‘민주노조의 자주성 위기’로 부메랑이 돼 돌아왔고, 민주노조의 자존감을 후려쳤다.
▲ 2005년 10월 13일 민주노총 사무총국 간부들이 강승규 비리사건과 관련해 지도부 총사퇴를 촉구하며 집단 사직서를 제출했다. [출처: 자료사진] |
당시 현장의 거센 사퇴요구를 거부하던 이수호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결국 사상 초유의 사무총국 집단 사직과 중집위원 9명의 공동성명이 발표된 뒤인 10월20일에 이르러서야 사퇴를 수용했다. 이 때 같이 사퇴한 부위원장 중 한 명이 바로 오늘 ‘통합진보당 배타적 지지 선거방침’을 주도하고 있는 이혜선 민주노총 노사대책위원장(통합진보당 노동위원장)이다.
풍경3 : 민주성
“더 이상 논쟁하지 않겠다. 표결한다” “퇴장할 중집위원들은 퇴장하라.” 2012년 2월8일 오후 2시, 민주노총 13층 대회의실, 민주노총 5차 중집위원회,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선거방침 합의처리’를 요청하는 중집위원들의 의사진행 발언에도 불구하고 표결을 밀어 붙인다.
김 위원장은 이어 열린 2월14일 상임집행위원회에서 ‘ARS 여론조사를 통한 지지정당 결정’이란 기상천외한 결정을 내린다. 조사에 참가하고 싶은 사람만 모아서 하는 조사,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날지 누구나 자기 팔 하나 걸 수 있는 뻔한 조사가 ‘정책결정단’ ‘전수조사’란 그럴듯한 훈장을 달고 진행되고 있다. 이 조사가 ‘민주노총 전수조사 결과’라는 김영훈 위원장의 결론에 과연 몇 개의 상식이 수긍할 수 있을까.
이 세 번째 풍경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말에 따라 ‘아프지만 의미 있는 기억’이 될 수도 있고, ‘승자 없이 상처만 남은 기억’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때 상황을 주도했던 누군가가 시간이 흘러 언젠가 또 어떤 상황을 주도할 지 우리는 모른다. 미래는 내다보기 어렵고, 사람은 때로 너무 쉽게 변하며, 가해자는 너무 빨리 옷을 갈아입는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상처받지 않았던 민주노조 운동이 가진 최후의 보루, 혹은 상처받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해 보듬어 왔던 가치인 ‘민주성’이 정면으로 공격받고 있다는 점이다.
통합진보당의 성격 논쟁, 소위 ‘배타적 지지 내용을 담은 선거방침’의 문제점 논쟁, 정치방침 없는 선거방침의 문제점 논쟁 등, 민주노총 선거방침을 둘러싼 논점은 참 너무 많다. 그러나 이 쟁점들과 함께 주목되는 것은 ‘조직 민주주의’다. 조직이 두 쪽 날지도 모르는 첨예한 쟁점에 대한 중집 표결 강행과, “퇴장도 의사표현”이라며 너무 쿨하게 반응한 민주노총 위원장, 그 뒤에 ‘쿨함’에 ‘반전’까지 더해진 상집의 기기묘묘한 결정이 있다.
그리고 이 ‘민주노조의 민주성’의 가장 큰 적은 집행부도, 특정 정파도 아니다. “말해도 안 통할 것”이란 예단, “난 관심 없다”는 외면, “집행부는 원래 저런 사람들”이란 포기, “나 말고 누군가는 문제제기 하겠지”라는 낙관, “우리가 다수이니 반대는 문제될 것 없다”는 패권 모두가 민주노조의 민주성을 해치는 공동정범이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우린 모두 한 패다. 민주노조 민주성의 목을 죄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일각에서 펼쳐지고 있는 '민주노총 임시대대 소집 운동‘에 주목하는 이유,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