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나온 학생들은 곳곳으로 행진해갔고 몇몇 건물을 점거하기도 했다. 일부 운동가들은 집권 보수당의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는 플래카드를 펼치기도 했다. 그 중에는 휠체어를 탄 젊은이도 있었다.
시위가 특별한 지도부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번져나가자 당국은 시위를 무책임한 ‘난동’으로 몰아갔다. 경찰은 강경 진압에 나섰고 토끼몰이 하듯 시위대를 몰아서 9시간 넘게 길거리에 가두어 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학생들은 한 달 내내 대학 강의실을 비롯해서 곳곳을 점거했고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을 하며 서로의 분노와 아이디어를 엮어갔다. 12월 9일, 등록금 인상과 관련된 의회 표결이 이루어진 날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경찰은 삼엄한 경계를 폈지만 수많은 학생들이 의회 광장에 모여들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조디 매킨타이어(Jody McIntyre)도 그 광장에 있었다. 조디는 11월 10일 보수당 건물 옥상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12월 9일 시위대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나오는 그런 ‘전쟁 반대’ 시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시위라고는 참석해 본 적도 없는 열네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그런 사람들도 많았어요. 이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아무런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고, 그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고 나온 겁니다.”
[출처: ⓒ함께웃는날 자료사진] |
조디는 휠체어를 굴리며 동생과 함께 광장에 섰다가 점차 시위대 앞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공격했다. 조디의 표현을 빌면 많은 이들이 ‘소나기처럼 퍼붓는’ 경찰의 곤봉에 두들겨맞았다.
그리고 네 명의 경관이 조디의 어깨를 잡더니 그를 휠체어에서 끌어내리고는 어디론가 끌고 갔다. 동생과 친구들 역시 구타당하며 다른 쪽으로 끌려갔다. 얼마간의 폭행이 이어진 후 경찰들은 그들을 놔둔 채 사라졌고, 동생과 동료들을 만난 조디는 놀랍게도(!) 다시 의회 광장으로 나아갔다.
거기에는 폭동진압 경찰이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그들을 뚫고나가던 조디는 폭동진압 경찰과 기마경찰 사이에 자신과 동생이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앞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폭행을 가했던 경관 중 한 명이 그를 보고는 다시 다가왔다.
경찰은 휠체어를 기울여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다시 인도까지 끌고 갔다. 그는 순간 의식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경찰에 소리를 지르며 항의했다. 누군가 이 일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고 그것이 영국 사회의 큰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놀랐던 것은 경찰의 폭력도,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도 아니었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조디의 답변이었다.
“그 사건에서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야 했던 것은 왜 그 경관이 나를 휠체어에서 끌어내렸는가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그것에 그렇게 놀랐느냐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정말로 내가 당한 일이, (그날 벌어졌던) 바닥에 누워있던 열다섯 살 소녀의 배를 걷어차는 것보다, 아니면 학생들의 머리를 난타해서 응급실로 보내는 것보다, 그러니까 하마터면 내출혈로 죽을 뻔 했던 그들의 경우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습니까?”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 경찰이 보인 행동은 그렇게 놀라운 게 아닙니다. 정부를 지키는 게 그들 일이죠. 11월 30일 우리가 본 학생 시위, 수천 명의 학생들이 경찰의 허가도 받지 않고 런던 중심부를 관통한 일, 그러면서도 폭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죠. 그런 시위보다 이 정부에 더 위협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런 시위가 이 정부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에게 경찰을 보낸 것뿐이죠.”
참 쿨한 답변이었다. ‘그는 진짜 장애인이 아닐지 모른다’거나 ‘왜 하필 위험한 곳에 갔느냐’는 식의 보수 언론의 공격에도 조디는 마찬가지로 쿨하게 답했다. 요컨대 그는 해당 언론들이 경찰과 다를 바 없는 집권 세력의 수호자들이기에, 그들에게 자신을 정당하게 다루라고 요청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경찰과 언론을 상대로 법정 싸움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경찰과 언론의 폭력이 그다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는 듯 대했다. 오히려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는 인터뷰어에게 묻곤 했다. “왜 당신은 내가 당한 일에 그렇게 놀랍니까? 왜 영국의 대중들은 이런 사건에 놀라는 거죠?” 그리곤 말했다.
“내게 일어난 일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내 일에 놀라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조디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일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에는 좀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두 측면이 있을 것 같다. 첫째, 어떤 면에서 장애인의 삶에 있어 폭력은 특별하지 않다(특히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누군가가 장애인을 휠체어에서 끌어내리는 폭력을 보고 경악했다면, 당신은 그 동안 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지 못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폭력에 대해 이 정도의 감수성을 가졌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더 끔찍한 폭력들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이 보여준 분노는 어제까지 당신이 보여준 침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한다.
둘째, 장애인의 일을 ‘특별히’ 안타까워해주는 사람들의 분노는 장애인이 제기하는 문제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일반의 문제라는 걸 가려버린다. 장애인에게 행사된 폭력은 장애인에게만 가해지는 특수한 폭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행사되는 일반적 폭력의 일단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조디는 “길바닥으로 끌려 내려간 내 일에는 그렇게 크게 분노하면서, 머리가 깨져 응급실 가는 학생들에게 언론은 왜 주목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의 싸움은 장애인만의 특별한 이익과 관심을 요구하는 싸움이 아니라 사회 일반의 해방을 위한 싸움이다.
조디에게는 아마도 이 두 번째 측면이 중요했던 것 같다. 그가 어느 기자에게 털어 놓았듯이 그에게도 “휠체어에서 끌려 내려간 것은 아주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것은 잔인한 폭력이다. 하지만 그는 엄연한 운동가였다. 어쩌다 시위 현장에서 재수 없게 폭력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 정면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팔레스타인에게 갔을 때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매일 밤 마을을 공격했어요. 실탄을 쏘면서요. 거기에 비하면 런던의 경관이 저지른 행동은 내게 겁을 줄 수 있는 게 못 됩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열여덟의 나이로 남미에 갔다고 한다. 체 게바라의 삶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3개월을 머문 뒤 전운이 감도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운동을 벌인 사람이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놀라는 거죠?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마치 시위에서 경찰의 역할에 대해 몰랐던 것처럼, 인생 내내 마치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보여요.”
사람들은 ‘장애인’ 조디를 걱정하고 ‘장애인’에 대한 경찰의 폭력을 비난했지만, 사실 그는 전체 대중의 일반적 이해를 위해 나선 투사이다. 그는 다양한 의제들에 개입하면서 여러 시위들에 참여해왔다.
그의 블로그 [휠체어 위의 삶(Life on Wheels)]의 부제는 한때 ‘혁명을 향해 걷는 한 사람의 여정’이었다.(지금은 ‘권력은 거기에 맞서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말이 부제로 적혀 있다)
가장 선두에서 가장 보편적인 요구를 담아 투쟁하고 있는 사람에게 연민을 보내는 것은 일종의 모욕이다. 지금 그는 싸우고 있다. ‘장애인’에게 어떻게 그런 폭력을 쓰느냐고 경찰을 향해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조디가 의아해 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조디는 사람들에게 놀라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것 같다. 시위대가 대중의 삶을 파탄 낸 집권 세력과 싸우는 게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그 집권 세력이 보낸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는 게 이상한 건지, 둘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게 이상한 건지. 아니면, 정말 그것이 아니면, 시위중인 한 운동가가, 사회의 변혁을 원하는 한 명의 투사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게 이상한 건지.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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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계간 '함께 웃는 날' 13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