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 너는 누구였느냐
2010년 말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된 직후 부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학교규정개정위원회 회의과정에 참관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규정개정위원회에 학생대표가 참여하기는 했지만 학생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자 대체 회의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지켜보기라도 하자는 소박한 바람이 낳은 요구였다. 그 요구를 불허하면서 학교 측이 내놓은 대답이 걸작이다. “학생들이 들어오게 되면 교사, 학부모 위원들이 위협감을 느낄 수 있다.”
이에 학생들은 ‘근조 정의, 근조 인권’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침묵시위까지 감행하면서 기어코 참관권을 얻어냈고, 결국 학교규정이 학생인권조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개정되도록 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흥미로운 일은 1년 내내 학교에 지각만 하던 한 학생이 이날의 침묵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으로 지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만은 학교에 올 맛이 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참관을 요구했을 때 학교가 느꼈던 위협감(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있어 학교 올 맛이 났다던 학생. 학생인권조례가 만들고자 하는 변화의 핵심을 이 둘은 잘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가르침을 주어야 학생들이 배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배움이 먼저 일어나야 가르치는 것도 가능해진다. 우리는 흔히 교사를 두려워해야 학생들이 교사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침묵이지 경청이 아니다. 배움과 경청은 질문을 가진 이들에게만 가능한 행위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질문을 던질 자유가 없이는 배움도, 교육도 불가능하다. 처음으로 학교에 올 맛이 났다던 학생은 처음으로 질문을 던짐으로써 교육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비로소 학교가 내 삶이 펼쳐지는 장소가 될 수 있었다. 학생들이 결정권도 아니고 고작 참관권을 요구했을 뿐인데도 학교가 위협감을 느꼈던 이유도 바로 학생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삶을 외면했던 학교가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역사적 변화가 이 같은 ‘질문’에서 비롯됐음을 알고 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여성은 왜 연단에 오를 수 없는가? 몸의 손상이 아니라 사회적 장벽이 장애를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교사는, 판사는, 소방관은 왜 노동자가 아닌가? 대표를 뽑고 난 다음에는 다시 노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민주주의인가? 애초 위험하기 짝이 없었던 이런 질문들이 진보를 일궈온 거름이었다. 변화를 꺼리는 이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변화의 방향을 고정시키고 싶은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질문을 품은 이들의 출현이다.
[출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학생인권조례는 교육의 과정에서 학생들이 질문하고 판단할 기회를 주자고 말한다. 학생들이 자기 몸이 놓인 자리에서 문제를 응시하고 해결을 모색하며 타인을 환대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인권이고 교육이라고 말한다.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해 맹렬히 떨쳐 일어선 이들은 이 진실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싸움이 결국 교육의 본질을 되묻는, ‘진보’의 오늘과 내일을 묻는 정치적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쟁의 파노라마
학생인권을 둘러싼 싸움이 치열해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학생인권이란 의제가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학생인권이 ‘하면 좋은 것, 그러나 결코 오지 않을 내일’이었을 때는 학생인권에 대한 제대로 된 논쟁조차 불붙지 못했다. 반면 학생인권조례가 ‘해야 하는 것, 그리고 곧 도래할 오늘의 현실’로 육박해 들어오자 학생인권에 관한 수많은 논쟁들이 불붙기 시작했다. 그래서 학생인권을 둘러싸고 펼쳐진 수많은 논쟁의 파고를 넘는 과정은 학생인권에 관한 사회 인식이 얼마만큼 여물었고 또 어느 지점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지는지를 확인하는 시험무대이기도 했다.
학생과 인권의 만남은 청소년인권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늘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학생이 인권은 무슨 인권이냐!’ ‘학생에게 인권은 있지만 인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으므로 제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학생에게는 인권보다 배움과 보호가 우선이다.’ 비슷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변주되는 사이, 학생인권 주장은 늘 시기상조로 취급되어야 했다. 경기도에 이어 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는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하면 학생인권을 전면 부정하거나 시기상조를 내세우는 논리가 상당히 미약해졌음이 이번 논쟁과정에서 확인됐다. 과거에는 ‘학생이 인권은 무슨 인권이냐!’라는 식의 어법이 강세였다면, 지금은 부분적 제한을 주장하는 어법이 더 자주 사용된다. 학교라는 공간의 특수성, 학생이라는 신분의 특수성만으로 인권을 제한할 명분을 삼기에는 그 사이 학교의 추악한 모습이 너무 많이 알려졌고, 청소년인권운동의 약진으로 인권과 자발성에 기초한 교육에 대한 공감대가 커진 결과이다.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두 번째 논쟁은 ‘교육 vs. 정치’의 구도 위에서 펼쳐졌다. ‘학교가 정치판이 된다.’ ‘진보교육감이 우리 아이를 망칠 권리는 없다.’ ‘진보교육감의 홍위병을 양산한다.’ 학생인권조례를 진보교육감의 학생 선동 조례로 규정짓는 이 같은 주장들은 당연하게도 조례의 수많은 조항 중 집회의 자유를 골라내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2008년 촛불집회’에서 청소년들이 보여준 놀라운 활약상을 집단적으로 경험한 뒤였기에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게다가 시민들은 이제 알고 있다. 어른들의 부채질에 놀아나는 존재로 집단적으로 형상화되기에는 ‘개념찬 학생들’이 많거니와, 나이가 많거나 교사라는 이유만으로는 학생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규범적 정당성이 더 이상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을.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세 번째 논쟁은 ‘성적(性的) 보수주의’와 ‘호모포비아’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었다. 학생인권조례의 차별 금지 조항에 열거된 여러 차별금지 사유들 가운데 ‘성적 지향, 임신․출산’이란 문구만 따로 떼어내어, 조례가 마치 동성애를 조장하고 초등학생 임신을 부추길 것이라는 주장이 조례의 의회 통과를 앞둔 시점에서 불을 뿜었다. 이는 2008년 촛불의 거리에 청소년들이 대거 쏟아져 나오자, 우익논객 조갑제가 광화문을 청소년 통행 제한 구역으로 지정하자고 주장하면서 ‘청소년에게 촛불집회를 보여주는 것은 포르노를 관람시키는 것과 같다.’는 이유를 내세운 것과 동일한 전략이다.
이 주장의 허무맹랑함과 졸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학생인권 가운데 가장 기반이 약한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 조례의 지지세력들 내에 분열을 조장했음은 분명하다. ‘체벌 금지, 두발 자유는 그렇다 치더라도 청소년에게 성(性)적 권리가, 동성애가 웬말인가.’ 성소수자․인권단체들의 절절한 호소, 보수가 친 덫에 걸려들어서는 계속 밀리게 된다는 정치적 위기감이 공감대를 얻으면서 간신히 차별 금지 조항도, 조례 제정도 지켜낼 수 있었지만, 이 지점은 여전히 뜨거운 쟁점으로 남아있다.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마지막 논쟁은 ‘위험한 아이들’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학교폭력 문제가 다시금 주목받자, ‘학생인권조례는 괴물(가해자)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라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주장들이 의도적으로 제기됐다. ‘위험한 학생’과 ‘내 아이’를 구분 지으면서 내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는 학생인권에 반대해야 하며 교사에게 강력한 지도권을 쥐어주어야 한다는 식이다. 학생인권과 교권이 대립한다는 주장만으로는 학생인권을 외면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자, 이제는 ‘학생인권 vs. 내 아이의 안전’을 본격 부각시킴으로써 ‘적의 적은 동지’라는 선택을 하도록 사람들을 내모는 형국이다.
그러나 반인권적인 학교문화가 학교폭력의 화수분 노릇을 하고 있다는 비판, 학생인권을 존중하면서도 학교폭력을 줄이는 데 성공한 혁신학교의 사례들이 공감을 얻으면서 이 주장 역시 세를 잃어가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른바 ‘위험한 아이들’의 인권이 학생인권의 지형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모호한 것은 청소년인권운동의 여전한 과제로 남아있다.
[출처: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
학생인권조례 너머에서 새롭게 만나야 할 질문들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학생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는 이제 한국사회의 중심적 의제로 자리 잡았다. 학생인권조례의 파란만장한 운명엔 청소년인권운동이 걸어온 설움과 희망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인권대통령을 표방한 김대중 정권 아래에서도 교육부가 채택하려고 했던 학생인권선언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었고 2000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두발자유운동(이른바 ‘No Cut’(노컷)운동) 역시 ‘학교별 토론을 거쳐 두발규정을 개정하라’는 교육부의 지침을 얻어내는 데 그쳤다.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권 아래서도 초중등교육법 안에 학생인권의 구체적 기준을 삽입하려 했던 학생인권법 제정 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이 역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앙상한 조항 하나가 삽입되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미흡하나마 학생인권의 보호막 구실을 해왔던 교육부의 지침들마저 ‘학교자율화 조치’라는 이름으로 대거 폐기되면서 학생인권은 광폭한 정글에 내던져졌다.
이와 같은 절망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희망의 두레박이 바로 지역별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었다. ‘가능한 교육자치체에서부터 교육청과 학교에 학생인권 보장 책무를 지우는 조례를 제정함으로써 학교를 변화시키는 한편, 전국적 그물망을 짜들어감으로써 중앙정부와 법률을 포위한다.’ 그 시도가 이제 경기, 광주에 이어 서울에서 성공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학생인권이란 소수자 인권을 전면에 내걸고 주민발의 서명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인권의 가치가 시민들의 삶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용광로를 만들어내었다. 그 과정에서 학생과 인권의 만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자 진정한 민주사회로 진입하는 길목이라는 인식도 좀 더 탄탄해졌다.
20여년 가까이 지겹도록 반복되어 온 체벌금지, 두발금지, 표현의 자유, 참여권 보장 등 학생인권의 대표적 의제들이 기본 상식 수준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청소년인권운동이 짊어져야 할 몫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학생이 파마가 웬말이냐, ‘엎드려 ㅤㅃㅕㄷ쳐’도 못 시키냐는 해묵은 아우성과 저항감이 강고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청소년인권운동은 학생인권의 의제를 확대하고 구조적 문제와 연결한 세밀한 전망을 내놓아야 할 책임도 부여받고 있다.
보충수업과 야간수업을 강요하지 않으면, 교사 수를 늘이면, 급식 질이 좋아지고 무상으로 제공되면 공부할 권리는 완성되는 것인가. 학교에서 밀려난 혹은 학교를 밀어낸 이들에게 학생인권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미 성적표가, 다니는 학교가 계급이 되어 있고 계급에 따라 인격의 값도 달라지는데 학생인권은 이 문제에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청소년인권운동이 제대로 던져보지 못한 것들이다. 이처럼 묵혀진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청소년인권운동이 학생인권이라는 의제를 넘어 새로운 의제들 속으로 본격 진입할 수 있는 도약점에 이른 것도 분명하다. 성(性), 성정체성, 노동, 밤(夜), 정치, 비어 있는 시간, 지역사회 등 청소년들에게 금지된 것들, 이제껏 청소년의 권리로서 적극 주장되지 못했던 변방의 의제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
맞지 않을 권리, 자기 머리모양은 알아서 결정할 권리 등 청소년들이 가장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를 얻어내는 데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연한 것들조차 버젓이 모욕당하는 사회에서,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의 도전은 더더욱 벅찰 수밖에 없다. 학생인권 너머를 열기 위해서라도 학생인권조례는 더욱 힘차게 펄럭여야 한다. (출처=인권오름)